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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용 시뭔SiMone Mar 29. 2022

내 안에 벌컥하는.

그때 일만 생각하면 난 지금도 울컥한다. 아니라면 울적한가? 


반나절 진료를 마친 토요일 오후는 특별한 스케줄이 없이 항상 애매하다. 무슨 일을 벌이기에는 시간이 한참 모자라고 아무것도 안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남기 때문이다. 어정쩡하게 되어버린 따분한 간극인 것이다. 그 상황이 벌어진 토요일도 그러한 무료함을 달래 보려고 문을 나섰었다. 다리에 착 달라붙는 청바지에 줄무니가 고상한 캐주얼 재킷을 걸치고서. 짙은 감색 진에 어울리게 영국산 구두까지 꺼내 신고 아무런 작정도 없이 집을 기어 나왔다. 오래간만에 시내를 가볍게 거니려고 그래도 차림새에 신경을 조금 쓰긴 썼다. 아껴두었던 신발을 한참만에 신어서인지 발 뒤꿈치가 아파와 운동화로 갈아 신을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가 스스로 보아도 훨씬 젊어 보이는 고동색 구두 쪽을 택했다. 


문 밖으로 나오기 직전에 현관 거울로 전신을 비춰보았다. 동안童顔 클럽의 회장은 아니더라도 부회장감은 족히 되어 보였다. 매우 흡족스러웠다. 매사에 부정적인 내가 아무리 부정적으로 나이를 한껏 더 높여 잡아도 50대 초반 이상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았다. 만약에 긍정적이면서도 인심이 후한 분들을 만난다 치면 40대 중반까지도 문제없이 봐줄 터이었다. 무척 고무되었다.


전체 높이가 24층인 아파트에서 우리 집은 딱 중간 12층이다. 좀 높긴 하지만 집에서 나올 때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는다. 언제나 계단으로 걸어 내려온다. 나만큼 젊음을 유지하려면 어느 정도 성의는 보여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나의 젊고 세련된 맵시를 이웃들에게 자랑해야만 했기에 타고 내려가기로 했다. 엘리베이터 문 앞에 다가서니 우리 층을 막 지나서 24층까지 그대로 올라갔다. 한 참을 꼭대기층에서 정지해 있다가 내려올 때는 층마다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주말 오후라 왕래하는 주민들이 많았던지 아니면 장난꾸러기들이 마구 단추를 눌러댔는지 모르겠으나 온 층마다 멈춰 섰다가 내려왔다. 무지 느려터져 평상시대로 걸어 내려갈까 갈등도 일었으나 다수의 동네 주민에게 노출되는 편을 선택했다.

어쩐 일인지 막상 우리 층에 문이 열렸을 때 속이 텅 비어있었다. 사람들로 꽉 차 있지를 않아 내심 서운한 맘도 들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어 1층으로 내려가는 버튼을 꾹 눌렀다. 



세 개 층을 곧장 내려가더니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눈에 설은 사십대로 짐작되는 남자 하나와 초등학교 1학년이 채 될까 말까 한 여자애 하나가 들어왔다.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하거니와 낯도 꽤 가리는 편인 나는 안면이 없는 그들에게 적당히 눈인사만 보냈다. 그럴 밖에 달리 할 말도 없었다. 

그런데 남자가 갑자기 허리를 90도로 굽혀 나에게 절하다시피 인사하는 것이 아닌가.

"안녕하십니까. 얼마 전에 9층으로 전입 온 '아무개'입니다." 

다 같이 늙어가는 판에 이렇게 정중한 인사치레라니 몹시 쑥스러웠다. 그래 처음 이사 왔으니 잘생긴 터줏대감에게 그러할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머리를 제대로 숙이며 답례하였다. 

"아 그러시군요. 요 며칠 인테리어 공사를 하시는 것 같더니만...'. 


다음이 더 문제였다.

"죄송했습니다. 그동안 많이 시끄러우셨지요? 어르신."

뭐라, '어르신?' 너무도 기가 막혔지만 눈이 지독히도 나쁜 사람이겠거니 하고 이 혼란스러운 사태를 재차 참아 넘겼다.

"아, 네. 그리 소란스럽지 않았어요. 여기로 자알 오셨습니다." 



요다음은 더욱 가관이었다.

남자는 자기가 데리고 탄 여자 아이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은주야, 앞으로 여기 계신 할아버지를 뵈면 꼬박 인사드려야 해! 그래야 착하지."

뭐 뭐 뭐 뭐라고 '할아버지?'

홀연히 지축이 흔들리고 엘리베이터는 막바로 땅으로 곤두박질쳐 무중력 상태에 이르렀다. '가속계와 중력장은 동등하다'는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몸은 허공에 붕 뜨고 머리는 어질어질해졌다. 그 시점에서도 정신을 가다듬고 손잡이를 움켜 잡은 뒤 혹시나 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나 나 외에는 뒤에도 옆에도 할아버지로 불릴만한 사람은 아무도 안 계셨다. 

가속계와 중력장은 동등하다.


아하, 이렇듯 무참하게.....

...... 

나만큼이나 젊은 다른 네티즌들은 이럴 때 허걱이라고 쓰는지, 헐이라 하는지? 

.......

....... 

시공간이 뒤틀린 상황에서도 뉴튼의 운동 제2법칙은 건재했기에 엘리베이터는 일층에 도달했다.

난 문을 빠져나가면서 그 남자를 쳐다보고 한 마디 벌컥 흘렸다.


"참 이쁜 손녀를 두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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