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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용 시뭔SiMone Oct 10. 2023

그러면 식탁에서는 오직 바른 꽈배기

"막내가 꽈배기를 먹고 싶다니 좀 사 오세요."

지난 1월 영국으로 떠나기 바로 전 날 집사람에게서 전화가 온다.

"아, 참 그리고 설날이 가까워 오니 떡국이라도 끓여 먹게 떡국떡도 조금 가져오시고." 

그 길로 하나로 마트에 가서 가래떡을 구입한다. 싸 둔 가방은 집사람 구두, 옷, 이불 등으로 기이 꽉 차 있다. 방금 산 떡을 틈새로 어렵사리 집어넣고 우격 다짐으로 지퍼를 잠근다. 짐은 여행 가방 둘, 라면박스 하나 그리고 백팩이다. 육신은 죽어 나겠으나 시키는 대로 했으니 마음만은 편하다. 몇몇 구두와 옷은 아주 오래전에 한국에서 태어나 이십 년 전 비행기 타고 갔다가 재작년에 이삿짐과 나란히 배를 타고 왔던 놈들이다. 시방 다시금 가면 이번 여름엔 주인과 함께 비행기로 또다시 돌아와야겠지... 역마살이 끼어도 보통 많이 낀 녀석이 아니다.




다음날 아침 인천 공항.

출국 수속을 하기 전에 먼저 4층으로 올라간다. 파리바게뜨점 푸른 문을 열고 곧장 꽈배기를 향해 걸어가 몽땅 다 사버린다. 부피가 만만치 않거니와 들고 다니기도 귀찮아 위탁 수하물로 부쳐야겠다고 결심한다. 빵을 가방에 집어넣으려 사람이 안 보이는 구석에서 풀어헤치니 그동안 움츠렸던 물건 물건이 여름날 비 만난 개구리들처럼 튀어나온다. 원래대로 다시 싸기도 버거울 텐데 도저히 이대로는 들여놓을 방도가 없다. 두 손으로 살포시 꽈배기를 눌러본다. 비닐 포장지채 납작해져 크기가 엄청 줄어든다. 잼처 가만가만 힘을 빼보니 스프링처럼 원상태로 돌아온다. 천만다행으로 몰라보겠다. 

재빨리 결단을 낸다. '그래, 도착하자마자 얘네를 꺼내 인공호흡 시켜주면 아무 일 없었던 듯 되살아날 거야. 그까짓 12시간인데 그걸 못 참겠어?'




이곳저곳 빈 공간을 찾아 어거지로 쑤셔 넣은 가방을 부치고 나니 마음은 무거웠으나 몸은 훨씬 가볍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출국장 입구에 도달하자 또다시 다른 분심이 떠오른다.

'아니, 양이 너무 적지는 않을까?' 큰 아들도 오고 게다가 그 애 여자 친구까지 오면 합이 다섯인데...'

결정을 신속하게 내린다. 그 길로 재차 빵집으로 달려가 보니 꽈배기 진열장은 역시나 텅 비어있다. 같은 매장이 2층에도 있대서 그곳에 가 이번에도 싹쓸이한다. 짐은 이미 부쳤기에 종이 빵봉지를 내내 들다녀야만 했다. 몸은 무거웠으나 마음만큼은 한층 가벼워진다.



히드로 공항 제4 터미널에 도착하니 날은 벌써 깜깜하고 스산한 바람만이 나를 맞이한다. 그나마 익숙한 런던 시내도 아닌 캠브리지 근처 '펜 디튼'이라는 새로 이사한 마을에 가야 한다. 마지막 버스의 출발 시간이 임박해져 서둘러 타는 곳을 찾아야 한다. 공항까지 마중 나오겠다는 걸 굳이 사양한 나 자신이 밉다. 가득가득 짐실린 카트를 밀면서 물어 물어 버스 정거장까지 간다. 손에 붙들고 온 놈들이라도 제대로 지키려고 종이 봉다리를 카트 손잡이에 매달으니 한여름 축 늘어진 소불알처럼 덜렁거린다. 신라면 한 박스까지 짐이 총 5개다. 개수에 따라 요금을 추가하는 운전기사 때문에라도 빵봉지는 좌석까지 모셔 와야만 한다.


내 숨도 올바로 못 챙기며 급하게 버스에 올라탔기에 가방에 꾸겨 넣은 꽈배기 녀석에겐 숨을 불어줘 소생시킬 엄두도 못 낸다.





여차저차하며 가까스로 집에 도착하자마자 식구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파리바케트 봉지를 연다. 여태까지 조신하게 모시고 왔는데도 불구하고 풀어지고 끊어지고 한결같이 처참한 모습뿐이다. 한가락씩 떨어져 온통 제멋대로 나뒹군다. 배배 꼬이지 않고 모두 똑바르니 꽈배기라 부르기도 멋쩍다. 미장원이 아니어도 난기류를 만나 흔들리는 비행기에서는 매직 스트레이트파마가 저절로 되는 모양이다. 



처음에는 관심을 보이던 아이들이 실상 하나도 온전히 먹지 않고 그 후에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입맛이 달라져서 그렇단다. 집사람도 말은 없었지만 '무슨 꽈배기를 저리도 엄청나게 사가지고 왔나?' 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가방 속 틈마다 구겨 넣은 비닐 포장지에 대해서는 아직 입도 뻥긋 안 했는데 말이다. 

다시금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가방 안의 꽈배기는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냉동고 안에 밀어 넣기로 속하게 결정한다. 영국집답게 냉장고가 그리 큰 편이 아니어서 속은 이미 다른 식품들로 꽉 찼다. 불행히도 꽈배기는 완전 사망했는지 쪼그라질 대로 쪼그라들어 냉동고 틈에 그런대로 안치한다. 다행히도 증거는 당분간이나마 인멸한 셈이다.



그러니까 언제더라 인천공항에서 바로 히드로공항으로 날아온 것은 아닌데, 더 늙기도 어려운 나이, 꽈배기 위에 쏟아진 설탕가루가 내 입술에 온통 묻어도 나는 이제 더 이상 달지가 않구나.


부여잡은 손이 뒤틀려 꽈배기네. 그러면 식탁에서는 오직 바른 꽈배기, 하지만 씹을수록 입안에 고이는, 그래도 씹다 보면 저녁 혼밥 속의 언뜻언뜻 서러움 같은, 


어느덧 오늘이 파리바케트의 푸른 문을 열어 보여도, 꽈배기를 고르기에는 너무 질린 나, 누구에게나 하나씩 불에 댄 자국 같은, 단팥빵을 고르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없네.



p.s.

글의 몇 문장은 존경하는 심재휘시인 '그 빵집 우미당'을 패러디했습니다.



단팥빵을 고르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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