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류센터 안에선 뛰지 마시고 안전거리를 확보해 주십시오. 의료기기, 전자기기 구역은 관리자 외에 접근을 철저히 제한하고 있으니 유의하여 주십시오.”
여기저기 달려있는 스피커에서 안내방송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는 물류센터 안 5층, 수민이 플라스틱 상자에 가득 담긴 물건을 진열하고 있다.
삑삑삑
“심플 레이어드 골드 반지가 네 개... 으악!”
아차 하는 순간 투명한 포장지에 감싸진 반지세트가 5층과 4층을 연결하는 철제 계단 사이의 미세한 틈으로 떨어졌다.
당황하거나 놀랄 시간도 없다.
최대한 빨리 물건을 찾아내야만 한다.
수민은 탕탕탕 소리를 내며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떨어트린 장소와 수직으로 맞닿는 자리부터 곧장 확인해 봤지만 물건이 없다.
무게감이 전혀 없는 물건이라 떨어졌다기보단 날아갔을 것이다.
큰일인데.
개수가 안 맞으면 관리자한테 보고를 해야 되고 그러면 싫은 소리 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날아갔어도 4층 안에 있을 거고 멀리는 못 갔을 거야.
빨리 찾자.
어제도 부산스러운 룸메이트 덕분에 잠을 제대로 못 자 잔뜩 충혈이 된 눈을 크게 뜨려 노력하는 수민.
바닥에 코를 박을 것 같이 허리를 접고 4층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는데 “악” 숙이고 있는 자신의 머리가 어딘가에 부딪히자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수민이 얼얼한 정수리를 비비며 일어나니 호빵만 한 빨간 도장을 양쪽으로 찍은 것 같은 화장을 한 미경이 씩씩거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죄송해요. 안 다치셨어요?”
“이게 안 다친 걸로 보여?” 미경은 한쪽 옆구리를 손으로 쥐어 잡으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너 혹시 나 질투해서 이러니?”
“네? 질투요?”
“그렇잖아. 내가 이쁘고 남자들한테 인기 많으니까 그러는 거지?”
수민은 기가 찼다. 미경이 횡단보도에서 지나가는 남자들 보다가 교통사고 당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로 남자의 환장한 여자일 줄이야.
“미경 님, 저기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요.”
“너 진작부터 맘에 안 들었어. 얼마 전에 새 학기로 물량 터졌을 때 멀리서 환섭 님이랑 나 보면서 쑥덕거리는 거 내가 다 봤거든? 잘생긴 관리자가 나만 도와주는 게 억울하디?”
수민은 더 이상 말을 해봤자 통하지 않을 것이란 걸 직감했다. 대충 둘러대고 빨리 자리를 떠야 한다. 지금 급한 건 반지를 찾는 일이니까.
“부딪힌 건 죄송해요. 뭘 좀 찾는 중이었어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뒤로 돌아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수민의 뒤통수 위로 미경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너 어리다고 예쁜 거 아니다. 20대라고 다 예쁜 거 아니라고. 행여 네가 나보다 예쁠 거란 착각하지 마!”
한참을 걷자 더 이상 미경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수민은 선반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어 미경의 동태를 살폈다. 미경은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끝만 스쳐도 보안업체에서 바로 출동 나올듯한 도어록이 달린 문 앞이었다. 문에는 커다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의료기기 구역, 관리자 외 출입금지>
“뭐?”
직원 식당 한편에 마련된 자동 조리기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는 환섭. 수민의 얘기를 듣느라 잘못 깬 계란 껍데기가 국물 속으로 쏙 빠졌다. 점심 메뉴로 나온 마요네즈 마카로니 샐러드에 캔참치가 버무려진 것을 본 환섭과 수민은 셀프 라면 코너로 향한 것이었다.
“그 여자랑은 절대 엮이면 안 돼. 오해받기 싫은 남자들이 그 여자한테 업무적으로 할 말이 있으면 다른 여자 직원들한테 전해달라고 부탁했거든? 근데 이젠 그러지도 못해.”
“왜요?”
“오늘 당해봐서 알잖아. 여자들이 말 걸면 자기가 예뻐서 질투하는 거라고 억지를 써대니까.”
“정말 이상한 여자예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맨날 핑크색 옷에 가방에 신발에 화장은 얼마나 무섭게 하는지 깜짝깜짝 놀란다니까요.”
“어렸을 때부터 자기 오빠의 대한 집착이 남달랐다나 봐. 12살 차이가 나는 여동생을 끔찍이도 아꼈던 오빠가 결혼을 하니까 새언니를 질투하고 죽일 듯이 괴롭힌 거지.”
“그래서 남자들은 다 자길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여자들은 경쟁 상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거기다 결혼도 못한 상태에서 죽었으니 집착이 더 심해졌겠지. 아무튼 좀 피곤해지겠어.”
“피곤해지다뇨?”
“곧 알게 될 거야. 한 숟가락만 퍼와야지.” 환섭은 쌀밥을 가지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물만 남은 라면 그릇에선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집품팀에서 약속을 했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미안했다고 오늘부터는 진짜 응급한 상황이 아니면 벨 띵띵 울리지 않겠답니다. 본인들이 다른 라인으로 돌아갈 테니 길 비키느라 고생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관리자의 말이 끝나자 진열팀 직원들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촘촘하게 서있는 진열장은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텅텅 비어 있었다.
“자자. 서둘러서 채워 넣어 보자고.” 인생과 진열팀 모두에서 가장 선임인 환섭이 말하자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아있을 땐 정리정돈이라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던 수민이지만 진열팀에서 일하게 된 지 8개월 만에 정리중독에 빠지고 말았다. 집품팀과 재고조사팀이 보기 쉽게 바코드가 잘 보이는 방향으로 진열을 하고, 앞에 물건이 뒤에 물건을 가리지 않도록 세로로 정렬했다. 진열 고수라는 환섭에게 직접 사사한 수제자 아니던가. 살아있을 땐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로 일 하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움직이는 이런 일이 적성에 딱일 줄이야. 관리자들과 동료들에게 일 잘한다는 칭찬도 꽤 많이 받아 어깨가 으쓱한 수민이었다.
“이게 뭐야. 강아지들이잖아.”
수민이 연 박스 안에는 대시보드의 달아 놓으면 달랑달랑 거리는 차량용 액세서리들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귀여운 애들이 많았지만 강아지 종류의 문외한인 수민은 너무 많은 강아지 종류에 눈이 뱅글뱅글 돌았다.
“우선 얘네는 하얗고, 눈동자가 반짝거리네 총 서른 개.”
“얘네들은 목도 다리도 몸통도 길고 늘씬하네 마흔두 개.”
인간의 실수는 항상 방심할 때 그리고 뭔가를 어설프게 잘할 때 일어나는 법이다. 아무리 똑같이 생긴 물건이라도 그리고 귀찮더라도 반드시 물건 하나하나 바코드를 입력해서 진열을 해달라는 환섭의 말이 있었다. 늘 잘 지켜왔는데 이 순간 수민은 뭐에 홀린 듯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마 건방짐이란 것에 홀렸던 듯하다.
“이건 얼굴과 몸에 주름이 많고, 험상궂게 생긴 게 강아지 잘 모르는 나도 뭔지 알겠다! 불독이야. 마흔아홉, 오십. 오십 개. 근데 이건 왠지 섬뜩하다.”
다른 강아지들은 포근한 매트에 누워서 자는 강아지들을 접착 스티커로 대시보드에 고정하는 모양이었는데 불독만 쇠사슬로 그것도 아주 꽉 조이는 목줄을 하고 유리창에 목매달 듯 붙이는 모양이었다. 거기에 혓바닥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까지 그려져 있어 수민의 미간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으으. 소름 돋아.”
수민은 최대한 손톱 끝으로만 불독을 잡아 진열한 뒤 뭐라도 묻은 것처럼 손을 씻으러 갔다.
“수기들 떴다!!!”
집품팀의 방해 없는 평화를 누린 지 채 두 시간이 안 됐을 무렵 빈 플라스틱 바구니를 왼쪽 팔목에 걸고, 오른손엔 PDA 기계를 든 재고조사팀이 우르르르 몰려 들어왔다. 살아있는 인간 계수기들이라며 진열팀 사람들은 그들은 수기들이라고 불렀다. 재고조사팀 사람들은 유난히 얼굴색도 창백하고, 표정이 없는 데다, 인기척도 없이 스르르르 왔다가 스르르르 간다며 저승사자들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재고 조사팀의 관리자들 역시 다른 공정 관리자들처럼 지정된 자리에서 근무하지 않고 이동식 테이블을 끌고 다니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서 진열팀 직원들이 놀라 주저앉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온 수민은 다음 박스에 들어있던 여성용 멜빵 반바지가 마음에 들었다. 갈 때라곤 기숙사와 물류센터 밖에 없으니 입고 갈 때는 없지만, 여자의 마음이라는 게 봄이 되면 옷을 사게 되는 마치 자성의 이끌리는 마그네틱과 같기 때문에 수민은 반바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간신히 쇼핑욕구를 억누른 수민이 바지를 진열하려는 그때 후크선장의 날카로운 손이 수민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헉소리를 내며 얼굴을 뒤로 빼는 수민. 옆으로 고개를 돌린다. 쌍꺼풀 없이 긴 눈을 가진 소년이 아래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다. 재고조사팀의 태훈이다. 미안하다 비켜달라 소리도 없이 후크선장 손처럼 생긴 S자형 고리를 선반에 척 걸고 반대쪽은 바구니에 연결한다. 그리곤 무자비하게 안에 담긴 물건들을 바구니로 쏟아내더니 개수를 세기 시작한다.
“어려서 뭘 모르는 건지 원래 개념이 없는 건지 내가 그냥 비키고 만다. 하아, 오늘 정말 하루 종일 왜 이러냐.” 수민은 카트를 끌고 통로로 나오며 분노를 꾹꾹 삼켰다.
개수를 금세 마친 태훈이 통로로 나와 다른 칸 앞에 선다. 거기엔 수민이 조금 전 진열한 강아지 액세서리들이 있는 곳이었다. 태훈은 이번에도 바구니에 개들을 다 꺼내서 개수를 세기 시작했다. 수민은 은근히 신경이 쓰여 진열하는 척하며 태훈을 살펴본다. 근데 이번엔 뭔가 좀 이상하다. 태훈이 지금 같은 곳을 열 번째 세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곤 고개를 갸우뚱한다.
“뭐가 잘못된 건 아니겠지?” 수민은 내가 뭘 잘못하기라도 한 걸까 괜히 불안한 예감이 들었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삐삑 소리와 함께 수민의 PDA가 멈추고 이런 메시지가 팝업창에 나타났다.
<관리자가 호출하였습니다. 하던 업무를 잠시 중단하고 데스크로 이동해 주세요.>
“수민 님 이 하얀 강아지들은 비슷하게 생겼지만 반은 사모예드고 반은 스피츠예요. 그리고 다리가 긴 강아지들 역시 각각 다른 품종인 이탈리안 그레이 하운드와 휘핏이고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얘네는 다 불도그가 아니고 그중 반은 보스턴테리어예요. 봐봐요 미세하지만 이쪽이 살짝 다리가 더 길죠?”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쓴 관리자가 보스턴테리어의 다리를 수민에게 내밀었다.
“죄송해요. 제가 개를 키워본 적이 없어서 같은 종류라고 생각했어요.”
“그것과는 별개예요. 바코드를 하나씩 꼼꼼하게 입력했으면 기계가 다른 종류라고 알려줬을 거예요. 잘하시는 분이... 그동안 이런 실수 안 하셨잖아요?”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환섭을 발견한 수민. 개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 눈을 피하려는데 환섭이 먼저 홱 돌아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할아버지가 나한테 실망하셨겠지... 수민은 애꿎은 손톱을 잡아 뜯으며 고개를 숙인다.
“재고 조사팀에서 삼십 번 세어봤답니다. 개수가 안 맞아서.”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이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제 다시 업무 복귀하세요.”
관리자에게 목례를 하고 뒤돌아 선 수민. 기분이 최악이다. 되는 일이 정말 하나도 없는 하루다. 하루종일 참아온 물들이 모이고 모여 댐이 열리자마자 폭포수처럼 방류될까 심호흡을 하며 진정을 해본다.
“그러게 다른 사람 시기하고 질투할 시간 있으면 본인 일이나 똑바로 해야지.”
미경이 수민 옆구리로 카트를 들이밀며 비아냥거렸다.
“뭐라고요?”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악!!!”
누군가 정수리로 미경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오전에 수민이 한 그대로였다. 정수리를 비비며 일어난 사람은 바로 환섭이었다.
“영감님!!! 이게 뭐 하시는 거예요!”
“어이쿠,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내가 뭘 좀 찾느라고.”
“뭐라고요? 아니 근데 이 사람들이!” 미경은 양손을 허리춤에 올리고 가슴과 고개를 저돌적으로 수민과 환섭을 향해 들이밀었다.
그때였다.
띵띵!
“으아아아아아아아앙!”
“좀 비켜주실래요? 급해서요.”
혜미와 등에 업힌 아기가 미경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넌 또 뭐야?”
띵띵!
“으아아아아아아아앙!”
띵띵!
“으아아아아아아아앙!”
혜미가 계속해서 벨을 울리자 아기는 계속 울어댔고, 미경은 귀를 막으며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관리자가 뛰어오며 혜미를 말린다.
“집품팀 사원님!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벨 안 울리기로 했잖아요.”
“죄송해요. 워낙 응급 상황이어서요.”
혜미는 수민에게 찡긋 윙크를 해 보이고 아기는 꺄르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수민도 오늘 처음으로 웃음이 나왔다.
하루종일 꽁꽁 언 마음이 따뜻하게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잠시 후 혜미와 열무가 떠난 자리엔 환섭과 수민만이 남았다.
“할아버지. 죄송해요. 제가 여기 온날부터 친할아버지처럼 챙겨주시고 일도 다 가르쳐 주셨는데 제가 이렇게 사고를 치네요. 그런데도 방금 또 제 편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편 들어준 거 아닌데?”
“네?”
“나 진짜 뭐 찾고 있었어.”
“제가 도와드릴까요? 뭘 찾으시는데요?”
“이미 찾았어. 자 여기.” 환섭은 수민에게 받으라는 식으로 물건을 감춘 주먹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