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 돌아오며
광화문에서 남편과 만족스러운 점심 식사를 한 후, 교보문고에서 필요한 책을 두 권 샀다. 바로 옆 스타벅스 구석자리에 앉아 책장을 넘기고 밑줄을 쳤다. 인상적인 문구에 밑줄을 치거나 동그라미로 묶는데, 이때 사각사각 연필 소리가 참 듣기 좋다. 특별히 지울 일 없지만 언제든 지우개로 지울 수 있어 좋고, 색이 없으며, 필압에 따라 농담이 달라진다는 것도 좋다. 투박하고 원초적인 느낌이라 좋다.
우리는 같이 있는 동안 "누가 보면 부부인 줄 알겠네", "사귀는 줄 알겠어"라며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았는데, 매일 출퇴근하는 오빠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참 재미있었다. (그만큼 귀한 나의 외출...) 9년 전 광화문 쪽에서 인턴이던 때에는 이렇게 광화문에서, 서촌에서, 삼청동에서 종종 데이트를 했는데. 새삼스럽다.
남편과 헤어지고 홀로 운전대를 잡았다. 집으로 향하는 길은 여러 가지였는데, 거리는 더 길지만 교통체증이 적어 가장 빠르게 도착하는 경로를 따랐다. 삼청동 거리를 따라 오르고, 북악산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삼청터널을 건넜다. 길은 가파르고 구불구불해서 속도를 낼 수도 없었고 한눈을 팔 수도 없었지만 산을 가로지르는 운전길은 괜히 상쾌하다. 비탈길을 오르면서도 힐끗힐끗 주변을 살폈다. 40km 속도 제한 덕분이다. 그 이상을 내지르면 도로교통법을 준수하고 말고를 떠나서, 일단 내 생명이 위험해지니 그럴 수도 없었지만은. 크고 작은(대부분 으리으리한) 전원주택 골목을 지나며, 내가 이런 동네의 저런 집에서 사는 것을 잠시 상상해 봤다. 집값을 떠나 굽어진 도로의 불편함, 한적함에서 오는 무서움, 안팎 손질의 번거로움을 이길 날이 올까 싶었다. 와닿지도 그려지지도 않았지만 그것을 이길 날이 온다면, 그것들쯤은 아무것도 아니겠다는 생경한 마음도 들었다. 물론 그보다 저런 대저택을 소유할 만한 경제력을 갖추는 것부터가 어렵다는 게 현실이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지!
집에 도착해 주차하고, 우리 집 단지가 내다 보이는 (내가 좋아하는)카페에 왔다. 따뜻한 페퍼민트 티를 마시며 짧았고 평범했던 오늘 하루 몇 시간을 복기하는 중. 여기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30분 남짓이지만 그럼에도 좋아... 지금 이 시각 집에서 돌봄 선생님과 블록 쌓기를 하고 있는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은 갖지 않을 테다.
그간 딸로 살던 나는, 생소하지만 필연적인 엄마라는 역할을 맡게 된 이후- 나를 위한 시간이 때로는 자그마한 죄악처럼 느껴져 괴롭다. 아이가 태어난 후 정확히 말하면 작년 4월, 다시 일을 시작한 후부터 묘한 부채감을 갖고 지내는 이유이기도. 디지털노마드로 존재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좋으면서도, 아이 옆에 머무르며 일이라는 핑계로 내 시간을 보내는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복잡 미묘한 감정들에 지쳐버린 나.
그러나 점점 확신한다. 알고 있었던 것을, 앎을 넘어 체득하고 있다. 내 시간을 갖는 것이야말로 아이를 위한 길이라는 것을. 설마 가스라이팅은 아니겠지? 싶지만, 뭐 그런들 어떠랴!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 집에 가서 '밥태기'인 우리 아가가 밥풀을 휘휘 날리더라도, 밥을 떡처럼 주무르더라도, 즐겁게 받아줘야지. 잠들 때까지 흠뻑 사랑해 줘야지. 우리 잘 크자! 내일도, 모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