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7. 5 기록
많은 사람들이 귀 기울여 듣지 않거나, 눈여겨보지 않는 것에 이야기하는 사람은 언제나 저의 흥미를 끌었습니다. 비록 '듣도 보도 못한'이라는 수식어는 때때로 조롱의 의미로 쓰일 때가 있더라도 말이에요.
듣도 보도 못한 무언가가 세상에 있다는 건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 본들 세상의 모든 것을 일일이 귀담아들으며 살 수는 없다는 걸 의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엇을 귀 기울여 들을지 공을 들여 취사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면 저는 조롱 또한 가볍게 넘기면서 살아가 보고 싶어요. 낯선 조합이 전해주는 설렘과 호기심을 즐기기에도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주의 주간 배움 기록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의 조합'을 보여준 콘텐츠를 애정을 담아 소개해 보려고 해요.
메탈에 열광하는 사람들(메탈 헤드)은 거칠고 무서운 음악을 듣는데도 의외로 친절하다는 농담이 있습니다. 저는 메탈 헤드를 실제로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이 농담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전혀 몰라요.
그런데 메탈 헤드 당사자들이 이러한 농담을 바탕으로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등에서 꽤 많은 콘텐츠를 만든 걸 보면, 농담의 사실 여부를 떠나 메탈 헤드 당사자들은 일단 이 농담을 정말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어느 정도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농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메탈은 상처, 고통, 불안처럼 내면에 깊게 자리 잡은 감정을 굳이 숨기지 않고, 오히려 극도로 공격적인 방식으로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이는 상처와 분노 같은 격렬한 감정을 토해내고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줍니다. 일종의 테라피처럼 말이에요.
게다가 패션이나 음악 취향으로 인한 편견에 시달린 적 있는 메탈 헤드라면 오히려 타인을 편견 어린 시선에 가두지 않고 좀 더 친절하게 대하고자 하는 경향도 있을 거예요. 메탈 헤드가 의외로 친절하다는 농담이 나온 데에는 아무래도 이러한 요소가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 같기도 합니다.
어제는 우연히 어느 메탈 밴드의 릴스를 보았습니다. 공연장에 찾아온 12살 아이로부터 받은 팬아트가 너무 멋져서 아이의 부모님과 협의 후 그 팬아트로 밴드의 공식 굿즈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담겨있는데요. 굿즈 판매로 얻은 수익의 일부는 아이의 대학 등록금에 보탤 것이라고 합니다.
영상의 댓글에서는 익숙한 농담을 또 한 번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메탈 밴드를 괜히 무서워하지만 실제 메탈 밴드가 하는 행동은 이러하다면서요.
물론 메탈 헤드가 생각보다 친절하다는 이 오래된 농담의 사실 여부는 누구도 단언할 수 없고, 수차례의 경험을 통해 개인이 직접 판단을 내려야만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잠시 내려놓고 눈앞의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도를 해보는데 이런 농담이 꽤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의 첫인상은 정지 화면처럼 고정된 상태로 남을 수 있지만 사실 사람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영상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저도 때로는 과거가 저의 미래마저 영원히 정의할 것 같아 겁이 나곤 합니다. 현재 어떤 상태이든 과거의 평가나 기억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기란 말도 안 되게 불가능할 것처럼 느껴지곤 해요. 하지만 과거, 선입견, 편견처럼 스스로를 단정 짓는 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이들을 함께 끌어안은 채 나아가 볼 시도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메탈 헤드에게서 미처 기대하지 않았던 의외의 친절함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의외의 모습을 발견할 기회를 저도 저에게 기꺼이 내주고 싶어지네요.
[나누고 싶은 질문]
타인의 눈으로 평가받는 이미지, 혹은 세상의 선입견에 맞춰 스스로를 정의하고 있지는 않나?
: 세상이 메탈을 듣는 사람을 어떤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든 메탈을 들으면서도 세상에 친절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처럼, 편견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로도 편견과는 상반되는 행동을 해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용기 있는 행동보다는 세상이 내게 말해주었던 대로 스스로를 단정 지었던 경우가 좀 더 많았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 이 모습으로는 적합하지 않고, 오히려 관심 밖의 대상이 되는 게 당연하고, 이대로라면 삶은 계속 어려워질게 뻔하고, 다른 희망은 없다는 극단적인 얘기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 관리를 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그 모든 말을 머릿속에서 영영 잊어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이 모든 말을 부정하려고 시도하는 모든 행위 자체가 결국 이러한 말에 계속 얽매이고 있는 걸 증명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모든 과거를 그럴듯하게 값을 친 교훈으로 뒤바꿀 수 없다는 건 아쉽긴 하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에 계속 연연할 수는 없다. 언제 어느 시기를 보내든 과거를 꼬투리 삼아 흠을 잡는 말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을 테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그 말에 가두지 않으려는 시도는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선입견과 편견을 받은 채로도 조금은 나아가고 변할 수 있을 것이다. 남이 아니라 나는 나를 어떤 사람으로 여기는지 잘 알고 있다면. 어떤 삶이든 어쨌든 일시정지된 사진보다는 재생 중인 영상에 훨씬 더 가까우니까.
이번 주에는 슬립토큰이 최근에 발매한 4집 앨범을 열심히 들었는데요, 그중 앨범의 9번째 수록곡인 겟세마네가 일주일 내내 머릿속에 자주 떠올랐습니다. 잔잔하고 아름다운 인트로로 시작되는 노래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슬픈 가사가 이어진다는 점에서 위험할 정도로 파괴적인 곡이기도 해요. 저는 이 노래와 아주 살짝이라도 유사한 경험을 겪어 본적도 없는데 들을 때마다 속상하더라고요.
겟세마네의 화자는 상대가 항상 무심하고, 언제나 이기적으로 굴며 자신에게 상처만 주었지만 그래도 상대를 정말 사랑했었다고 노래합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에게는 '그래도 이 사람도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중이다'라고 말하며 상대방을 옹호하기도 했고, 상대를 위해 스스로를 바꿔보려 애를 썼다고도 밝힙니다. 상대의 밀고 당김에도 개의치 않고, 돌아가는 길에는 항상 울어버리지 않고, 상처에도 무뎌진 그런 사람이 되어보려 했지만 결국 상대방이 자신에게 상처만 주었다는 점을 분명히 직시하고 상대와의 결별을 선언하며 그 없이 살아가겠다고 밝힙니다.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쓴 노래인지, 앨범의 컨셉을 위해 만든 가상의 스토리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신원은 철저히 익명으로 감추고 오직 음악으로만 소통하고자 하는 밴드의 컨셉 때문에요. 하지만 상당히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해로운 관계에 대해 노래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곡임은 굳이 상세한 설명 없이도 분명하기만 합니다.
모든 가사가 인상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초반부에 등장한 낯선 단어의 조합이 눈길을 끌더라고요. '나는 당신의 로봇 동료였고, 당신은 나의 가장 좋아하는 색이었어'라는 대목이 자꾸만 눈에 밟혔습니다. 상대에게 마치 도구처럼 이용당했지만 그래도 상대를 '가장 좋아하는 색'으로 여겼다니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그런데 상대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으로 여긴다는 건 어떤 심정에서 비롯된 표현일까요? 로봇 동반자라는 단어 뒤에 배치되기에는 너무 이질적인 표현인데 대체 상대를 어떤 식으로, 얼마나 좋아했다는 뜻일까요? 어렵지 않은 단어로 쓰인 가사 한 줄이지만 제게는 정말 복잡한 질문을 남긴 가사였습니다.
[나누고 싶은 질문]
상대를 '가장 좋아하는 색'처럼 여긴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 좋아하는 색은 어딜 가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고, 어떻게든 몸에 걸칠 수 있고, 항상 주변에 둘 수 있지만 그 취향은 이성이 아닌 감성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걸 의미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색은 명확한 이유 없이도 그저 좋아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우리의 일상 속에 깊게 스며들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색은 뚜렷한 형체가 없기 때문에 함께할 수는 있어도 온전히 그 색과 완벽하게 일치된 삶을 살아갈 수는 없다. 어떤 색이든 다른 색과 뒤섞이면 오히려 처음의 색과는 멀어질 뿐이다. 로봇 동반자는 감정이 제거된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나 변함없이 원하는 행동을 수행하도록 조종할 수 있지만, 좋아하는 색은 전적으로 감정에 따라 선택한 것이며 아무리 옆에 가까이 두더라도 그 색과 완벽하게 하나가 될 수는 없다. 이런 가사를 어떤 마음으로 썼을지 생각하면 정말 속상하다... 실제로 이와 비슷한 관계를 겪은 경험이 있다면 과거에 어떤 상처를 받았든 잘 이겨내고 여기까지 와주어 무척 대단하고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다.
어쩌면 그 펍은 정말로 다른 세계의 공간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원래 내가 있던 세계의 존재를 증명할 만한 건 뭐가 있을까. 가진 거라고는 휴대폰과 시장에서 사 온 커다란 빵 한 조각뿐이었다. 나는 세계의 거의 유일한 증거를 천천히 뜯어먹으며 생맥주를 마셨다.
<내 꿈에 가끔만 놀러와>, 고선경
며칠 전에는 고선경 시인의 산문집을 완독했습니다. 2주에 걸쳐 천천히 읽었던 책인데요, 어려운 책은 아니었지만 시인의 안목을 엿볼 수 있는 멋진 문장에 감탄하면서 읽느라 완독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멋진 문장이 곳곳에 담겨 있었지만 그중에서 저는 시장에서 사 온 빵 한 조각을 '세계의 거의 유일한 증거'라고 표현한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일단 제가 빵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빵처럼 흔하고 일상적인 사물에게서 이 세상 전체를 대변하는 거의 유일한 증거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 점도 무척 좋았어요.
대수롭지 않은 존재에게 사실 세상을 뒤흔들 엄청난 잠재력이 깃들어 있었다는 상상을 해보는 건 언제나 재밌습니다. 그래서 찢어진 것, 거친 것, 구겨진 것, 흠집 난 것에 유독 관심이 가기도 하더라고요. 요란하지 않고 담백한 맛의 빵 한 조각과 함께 여행을 떠나면 그 빵은 이전에 속했던 세상을 대변해 주는 존재로 여길 수 있는 것처럼, 지금 내 세상을 대변할 수 있는 사소한 사물을 하나 골라본다면 무엇일까요?
[내게 남긴 질문]
지금 내 세계의 전부나 다름없는 물건은 무엇일까?
: 지금 당장 떠오르는 건 약 5년 전에 충동적으로 구매한 아이패드이다. 집과 얼마나 먼 장소에 있든 아이패드 하나만 있다면 내가 좋아하는 대부분의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 나의 세계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핸드폰이나 노트북, 패드와 같은 디지털 기기 없이 살 수 있는 현대인은 보기 드물긴 하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흔한 답이지만 실제로 이 작은 패드가 내 삶의 거의 전부를 대변하는 건 사실이기도 하니 굳이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내 세계의 거의 대부분을 하나의 기계 안에 담을 수 있다는 건 반대로 말하자면 나의 세계가 이 작은 기계 안에 갇혀버렸다는 말과 동일하기도 하다. 늘 스크린타임을 줄이고 '진짜 삶'을 살아보려 노력하긴 하지만 매번 핸드폰이나 패드를 손에 드는 게 자연스러워지는 이유도 어쩌면 나의 삶이 어느샌가 이 기계 안에 갇혀버린 지 오래되어서 그런 것 같다. 나의 세상을 작은 기기 안에 담을 수 있다는 건 내게 득일까 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