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호라 Oct 24. 2021

잘츠부르크에서 계획없이 돌아다닌 저녁

맑은 날의 잘츠부르크(18.10.06.)

잘츠부르크는 독일-오스트리아 국경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도시였다. 물론 잘츠부르크는 뮌헨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도시였는데, 오스트리아도 독일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약간은 독일의 다른 도시에 온 듯한 느낌이기도 했다. J와 나는 뮌헨에서 여행하는 동안 독일어를 조금씩 익혀둔 덕분에 꽤 편하게 그리고 즐겁게 여행할 수 있었다. 사소하지만, ‘Hbf.’가 중앙역(Haupt Bahnhof)의 약자라는 것, 광장은 Platz, 출구는 Ausgang, 입구는 Eingang과 같은 표지판에 자주 쓰이는 단어들이 은근히 유용했다. J는 독일어로 출구, 입구라는 뜻을 가진 ‘아우스 강, 아인강’이라는 단어에 꽂혀서 이제 막 단어를 말하기 시작한 아이처럼 맥락 없이 이 단어들을 계속 말하곤 했다. 마치 우리나라 어느 지역의 사투리처럼 ‘아인강’에 억양을 넣어 말하는 게 포인트였다. 나도 그게 즐거워서 J를 따라 많이 말했다. 그리고 여행하는 동안 생각날 때마다 독일에 오기 전에 조금 공부했던 몇 가지 단어와 간단한 인사말 ‘Ich in OO.(이히 빈 OO(나는 OO입니다.))’ 같은 표현을 J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잘츠부르크 중앙역에서 내려서 ‘무슨 광장(Platz)’이라는 표지판을 따라 역 앞 광장으로 나왔다. 역에서 숙소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였는데, 무슨 패기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캐리어 3개를 끌고 다니며 택시도 버스도 타지 않고 그냥 걷기로 했다. 캐리어를 두 개 끌고 있던 J가 먼저 지쳐갔다. 나는 사실 새로운 도시의 풍경에 들떠있었다. 내가 든 짐은 J에 비하면 훨씬 가볍기도 했다. 잘츠부르크는 전체적으로 밝은 파스텔톤의 건물이 많아 보였다. 뮌헨에서보다 건물에 화려하고 섬세한 장식이 많이 보이기도 했다. 짐을 끌고 숙소에 가는 와중에도 나는 그 풍경들을 담고 싶어서 사진을 틈틈이 찍으며 걸었다. J는 힘들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인내심 있게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중간쯤 왔을 때, 큰 나무가 있는 공원이 있었는데 J가 그곳에서 쉬었다 가자고 했다. J는 속이 안 좋다고 그랬다. 그제야 눈치 없이 혼자만 신나서 여기저기 사진을 찍으며 걸어왔던 것이 미안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도시를 같이 즐기지 못하고 있는 것도 아쉬웠다.

생각해보면 나는 여전히 들뜬 기분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공원에서도 거의 넘어지다시피 기울어진 큰 나무를 보며 신나서 어린애들과 함께 그 나무 위에 올라가기도 했던 걸 보면. 공원에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숙소로 향했다. 가는 길에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지로 유명한 ‘미라벨 정원’이 있었다. 나는 그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캐리어를 두 개 끌고 있는 J를 배려하지 못한 게 참 마음에 걸리는데, 나에게 이 때는 J보다 미라벨 정원이 먼저 보였다. 그때 날씨가 너무 좋았고 그다음 날에는 비가 왔기 때문에 그래도 이때 미라벨 정원을 잠깐이라도 들른 건 잘한 선택이었다. 빨간 꽃들이 여러 모양의 곡선을 이루며 가꾸어져 있었다. 정원이라기보다는 넓이를 생각했을 때는 공원이라고 부를 만도 했다. 중앙의 산책로에서는 분수대 바로 뒤쪽으로 잘츠부르크 성이 정면에서 보였다.

미라벨 정원을 신나게 구경하던 와중에 숙소의 집주인에게 재촉하는 연락이 와서 오래 구경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다음날 다시 오기로 하고 미라벨 정원을 관통하여 잘자흐 강변을 지나 숙소 부근에 도착했다. 숙소가 있는 거리는 꽤 번화가였다. 집주인은 밖의 거리에서 나와서 기다리다가 두리번거리고 있는 우리를 먼저 발견하곤 말을 걸었다. 그녀는 중국인인지 혼혈인지 모를 동양인이었는데 한국말로 말을 걸지 않은 걸로 봐서는 한국인 같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영어로 말했는데 왠지 모르게 서양인들의 영어보다 꽤 알아들을만했다. 집주인은 급한 일이 있다면서, 필요한 건 안에 다 있을 거라는 말을 하고 서둘러 떠났다.


우리 둘 다 뮌헨 숙소보다는 낫겠지, 그래도 빨래는 할 수 있겠지 정도의 숙소를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막상 문을 열고 들어오니 기대 이상이었다. 생각보다 넓고 아늑하고 깨끗했다.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CD 플레이어였다. 잘츠부르크 숙소에 머무는 동안 그곳에 있던 모차르트 CD를 거의 항상 틀어두었는데 그 분위기가 참 좋았다. 어쨌든 이때는 숙소에 느긋하게 숙소를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유럽의 마트가 대부분 일찍 닫기 때문에 자칫하면 이날도 물이나 간식거리를 사지 못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근처에 있는 ‘SPAR’라는 슈퍼마켓으로 갔다. 다행히도 숙소에서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마트가 문을 닫기 직전인 오후 6시 45분쯤에 갔음에도 불구하고 꽤 이것저것 장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여러 종류의 치즈로 치즈 플레이트를 해서 맥주와 함께 즐길 생각으로 네 가지 종류의 치즈를 샀다. 세 가지는 뭔가 아쉬울 것 같았다. J는 무척 달달해 보이는 빵과 케이크를 샀다. 이날 그때까지 먹은 건, 뮌헨 맥도널드에서 먹은 버거와 기차에서 오는 동안 먹은 젤리와 커피가 다였다. 그래서인지 나도 J도 기운이 없었기 때문에 단 것들이 눈에 계속 들어왔다. 우리는 장본 것을 들고 숙소에 들어가서 적당히 정리하자마자 금방 사 왔던 빵과 케이크로 적당히 배를 채웠다. 그런 걸 보면 우리 둘 다 여행하는 동안 먹는 것은 뒷전이었다.


밖은 금방 어둑어둑해졌다. 해질 무렵의 잘자흐 강변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우리가 숙소에서 적당히 휴식을 취한 뒤 나갔을 땐, 하늘이 푸릇하게 어두워진 뒤였다. 멀리 보이는 흰 잘츠부르크 성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이날 계획은 잘츠부르크 성에 야경을 보러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무작정 성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상점은 문을 닫은 상태였지만 그저 생소한 건물과 골목을 걷는 것만으로도 우리한테는 그 모든 것이 즐길 거리였다. 시계탑이 정면에서 보이는 골목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J가 참 정성 들여 사진을 찍는 바람에 몇 번씩 돌아보라고 해서 나는 약간 민망해서, 그만 좀 찍자고 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니 그런 J가 여행 파트너였기 때문에 나중에 보면 남는 사진도 많아서 다행이었다.

‘빙글빙글 돌아봐~’ 라고 하는 J의 말에 민망해하면서 돌고 있는 나

J와 나는 취향이 다른 부분도 많았지만 여행 스타일만큼은 비슷했던 것 같다. 우리에게는 특정한 계획보다도 그때 그때 느끼는 것이 중요했다. 물론 아주 느슨한 계획은 있었지만, 그 느슨한 계획 속에서 즉흥적으로 뭔가 많이 할 수 있었고, 우리 둘 다 계획을 트는 것에 망설이지 않았다. 또 계획이 틀어지는 바람에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져도 우리 둘 중 누구도 실망하거나 화내지 않았다. 약간씩 힘들어서 짜증을 냈던 적은 있었던 것 같긴 한데, 그게 우리 둘 사이에 다툼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지는 않았다. 그런 부분 덕분에 J는 더없이 좋은 여행 파트너였다. 내가 좀 이기적인 부분이 있어서 J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부분은 일단 넘어가자.


잘츠부르크 성까지 간다는 느슨한 계획 속에서 우리는 미로 같은 거리를 지도를 켜지 않고 그냥 이끌리는 대로 걷다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작은 터널 안에서 노래를 부르는 버스킹 공연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참 동안 노래를 들었다. 터널을 빠져나오니  바로 아래에 있는 광장이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황금구가 있었고,  위에 사람이 서있었다. 여행 오기  블로그에서 봤던 사진이 떠올랐다. 블로그에서  위에 있는 사람을 보고 정말로 누가 올라가 있는  알고 깜짝 놀랐다고 써놓았었는데, 나도  위에 우뚝 서있는 사람 형상을 보고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다. 황금구 아래쪽에는 하얀 페인트로 체스판이 그려져 있고 나무로  체스 말이 있었다.   덧살 정도  금발머리 남자아이들 둘이  말들을 열심히 옮기는 중이었다. 게임을 시작하기 위한 배열로 맞추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렇게 옮겨놓고 게임을 하는  알았는데,  애들은  가버렸다.


나와 J 덕분에 체스 게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조금만 하다가  생각이었는데, 오랜만에 체스를 두는  재밌었다. 몸으로 직접 옮기면서 하는 느낌이 새로웠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체스게임이 생각나기도 했다. 우리가 게임을 계속하니 어느덧 우리의 게임을 지켜보는 사람이  많이 늘어있었다. 대부분은 서양인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중국이나 일본 같은 곳에서 유럽인 커플이 장기를 재밌게 두고 있는 광경을 보면 누구라도 구경하게  것이라고. 우리는  시선을 즐기면서 게임을 계속했다. 사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민망해서 게임을 빨리 끝내고 싶었고, 턴을 이어나가기는 했지만 생각을 많이 하지 않고 체스 말을 그냥 툭툭 두었다. 마침내 J ‘체크메이트 외치자 많은 관객들이 소리 없이 떠났다. 나는 왕을   피신시키다가 이내 포기하고 게임을 마쳤다. 내가 지긴 했지만  많은 사람들 속에서 광장에서 몸을 움직이며 게임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왠지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우리는  들뜬 마음으로 본격적으로 성을 오르기 시작했다.

잘츠부르크 성 아래 광장에서 체스게임을 하는 중

성까지 금방 휙 올라가는 ‘푸니쿨라’라는 열차가 있었지만 J와 나는 여유롭게 가자며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우리는 마음이 들뜬상태였기 때문에 성을 걸어 올라가는 것이 하나도 지칠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생각보다 성은 가까이 있는 것 같았다. 막상 올라가 보니 그리 가깝지만은 않았지만. 성벽 앞까지는 그런대로 지치지 않고 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성의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을 찾지 못해서 헤맬 때는 좀 지쳐있었다. 성 위에서 본 야경은 황금빛이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화려하지는 않았다. 도로도 넓지 않고 건물들은 모두 간접조명을 받아서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성을 비추는 조명이 너무 환해서 눈이 부셨기 때문에 야경을 보는데 방해가 많이 되기도 했다. 그 조명의 정체는 저게 뭐 길래 이쪽으로 계속 환하게 쏘고 있는 걸까- 생각하다가 한참 후에야 깨달았지만. 깨닫고 난 후에는 그 조명을 탓할 수 없었다. 그 조명이 없다면 성은 저절로 하얗게 빛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래도 우리는 성을 힘들게 걸어 올라왔기 때문에 야경을 한참 보다가 내려왔다. 그래도 평소에 볼 수 없는 풍경이기 때문에 눈에 많이 담고 싶었다. 성을 다 내려오니 광장에 있는 체스 말들은 일렬로 나란히 모여 사슬에 묶여있었다. 우리는 그걸 보고 그 말들이 묶이기 전에 체스를 둘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배고픔을 꾹 참고 숙소에 돌아왔다.


장을 보면서 샀던 치즈를 플레이팅하고 잘츠부르크의 대표 맥주, ‘스티글’ 맥주와 함께 먹었다. 모차르트 음악과 함께. 그리고 여행 오기 전, J가 챙겨 와 달라고 했던 컵라면을 함께 먹었다. ‘왕뚜껑’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평소에 J와 나 둘 다 매운 걸 좋아하지도 않았고, 한국에서도 밥 대신 맥주와 파스타, 치즈 같은 것을 무척 많이 먹는데도 그곳에선 왜 그리도 한국의 매운맛이 그립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컵라면은 여행 필수템이었다는 걸 이때 깨달았다.

잘츠부르크 성에서 본 야경


이전 04화 뮌헨역에서 맛본 맥도날드 버거와 스타벅스 커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