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에도 있어', '우리 학년에도 있어', '몇 년 전에 이런 애도 있었잖아'하며 근무하면서 만났던, 우울증과 관련된 각종 케이스들을 친한 선생님들이 말해주었다. 나도 짧지 않은 담임 경력으로 여러 학생들을 만나보았고, 코로나 이후 조금 더 심해졌다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래도 깔때기처럼 다 모아놓고 보니 학교에 얼마나 많은 우울증 환자가 있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선생님들 모두가 해가 가면 갈수록 더 심해진다고 했다. 우리는 의사도 아닌데 환자도 봐야 한다고, 나와 같은 일을 겪고 나면 앞으로 담임은 진짜 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담배 피우는 애들도 잡기 힘든데 곧 있으면 화장실에서 마약 하는 애들 잡고 다니겠다는 무서운 농담도 했다. 이제 앞으로는 교사들은 상담사도 하고, 의사도 하고, 경찰도 해야 된다고 했다.
학교에서 마주하는 우울증은 비단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학생과 교사, 학부모까지 모두의 일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학생들의 우울증이다.
요즘 학교에서 담임을 잘 수행해 내려면 심리상담사 자격증을 필수 조건으로 해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학급에는 마음이 아픈 학생들이 많다. 우울증이나 ADHD, 공황장애가 가장 흔한 케이스이다. 고등학교에서 대부분의 교직생활을 했던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의학적 통계 수치를 갖고 오지 않더라도 코로나 이후에 확실히 저런 증상을 가진 학생들이 증가하는 추세이다. 아니, 증가추세가 아니라 그냥 확 늘었다.
이것이 코로나 세대의 대인관계나 학교 생활의 부적응의 문제인지, 스마트기기와 모바일 환경에 의한 정서적 문제인지, 예전에 비해서는 숨기지 않고 드러낼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의 변화에 따른 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어쨌든 확실히 정신과 진료를 받으며 약물치료를 하고 있는 학생도 많고, 상담을 정기적으로 하고 있는 학생도 많다. 부모가 학생의 문제를 인지하고 치료나 상담이라도 받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제발 병원에 좀 데리고 가라고 하고 싶은 학생들도 넘쳐난다.
청소년들은 원래 고민이 많고 예민하다. 요즘 우리나라 청소년들 중에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싶다.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얼굴이 예쁘든 안 예쁘든, 친구가 많든 적든 이것을 포함한 일상과 학교생활에서 겪어내는 그 모든 것이 스트레스이며 고민거리이다. 우울증에 빠진 청소년들은 억지로 긍정회로를 돌려도 모자랄 판에 긍정으로 들어가는 모든 신경계가 박살 난 상태라 공부도 친구관계도 보통 학생들보다 더 어렵다.안정이 안 되니 집중을 할 수 없고, 집중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공부를 못 하는 것이 당연하다. 당연히 성적도 잘 나올 리 없다. 좋은 대학은 가고 싶은데 능력이 안 되니 괴롭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생각해도 해도 안 되는 게 맞는데, 부모는 너가 공부를 안 해서 그렇다며 열심히 하면 된다고 한다.
공부 잘하는 학생도 힘들긴 마찬가지다. 올 1등급인 학생도 한 문제만 틀려도 2등급이 될 수 있는 스트레스에 공부를 잠시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지필평가, 수행평가, 모의고사, 발표 과제, 생기부 활동을 다 해내면서 1등급을 유지하는 학생들이 대단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압박감은 그렇게 학교생활을 해본 적 없는 우리 어른들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9등급제는 정말 잔인하다. 선택과목이 늘어나서 수강인원이 제각각인데, 상대평가의 잣대는 절대적이다. 수강인원이 적은 과목은 30명쯤으로 1명만 1등급이다. 중국어 과목을 30명이 수강하는데, 중국에서 살다 온 애가 이미 3명이나 있다. 1명만 1등급인데, 이미 계산기 다 두드려봐도 아무리 열심히 해봐야 3등급 맞기도 힘들다는 것을 보통 학생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중국어를 포기한다는 학생에게, 중국어 때문에 내신 다 깎이고 대학도 못 갈 것 같다는 학생에게 '열심히 해봐, 안 되는 게 어디 있니, 1등급 할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못 한다.
우리 부모 세대 중 누가 이런 거지 같고 잔인한 시스템에서 공부해 봤는가?
성적에 관계없이 즐겁게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보면, 너는 우울증 없어서 다행이다 싶다가도 성적에 아무 관심이 없이 행복한 것도 정상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교사들도 마음의 병을 지고 사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소소한 어려움들이야, 어느 직장인들 개꿀빠는 직장이 어디 있겠냐는 직장인의 마음으로 이겨낼 수 있다. (물론 요즘 점점 더 희한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어서 이겨내기가 힘들어지고 있긴 하다.)
그러나 우리끼리 말로, 소위 '똥 밟았다' 하는 경우의 일당백 금쪽이 학생이나 개진상 학부모를 만난다면, 그들과 함께 하는 1년의 학교 생활은 그냥 망하는 거다. '오늘도 열심히 해야지!' 하는 화이팅으로는 못 이겨낸다. 뉴스기사나 맘카페에 쉽게 언급되는 '교사로서의 사명감'따위로는 어림도 없다. 교사로서의 사명감은 커녕 인류애가 상실된다. 진상 같은 학부모나 학생에게, 어디 말하기도 부끄러운 모욕을 당한 날에는 하루종일 개떡 같은 기분을 안고 '내가 이러려고 선생이 됐나'하는 자괴감에 빠져 꾸역꾸역 하루를 마무리한다.
소위 문제행동이 있는 학생들을 지도하다 보면, (고등학생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다'는 말을 생활신조로 삼게 된다. 매번 똑같은 일과 사고가 반복되는 학생에게,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게 만드려고 없는 시간을 쪼개 상담하고, 위로하고, 조언하고, 대화를 한다. 서로 손잡고 눈물까지 흘리고, 이제는 잘해보겠다 다짐하고 보내면, 다음날 똑같은 일로 다시 이야기해야 되는 상황이 어김없이 온다. 오은영 선생님이 수천번, 수만 번 가르쳐야 된다고 하는데, 나는 그 학생의 부모가 아닌지라 수천수만 번의 가르침을 주기에는 인내심이 모자란다. 문제없이 예쁘게 잘 지내는 우리 반 아이들에게 더 쏟을 수 있는 관심을, 매일 말해봤자 바뀌지도 않는 이 학생에게 나의 모든 관심과 시간이 투자되는 것에 대해서는 가끔 화가 치밀어 오른다.
특히, 학생의 우울증과 같은 심리적 문제들이 자해나 자살과 관련되어진다면 담임과 관련 교사들은 하루종일,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방학에도 극도의 스트레스와 불안에 휩싸인 삶을 살아야 한다. 부모야 자식일이니 감당할 의무가 있다고 치자. 아무리 '스승'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다 한들 한편으론 월급 받는 직장인일 뿐이고, 퇴근하면 직장일은 잊고 싶기 마련인데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하겠는가?
이런 위기학생이 있을 경우 업무적으로 관련 있는 모두가 우울의 영향권에 있다. 담임, 학년부장, 학생부장, 상담교사, 보건교사, 교감, 교장까지 모두가 행정적인 책임을 지고 있고, 심리적 압박을 받는다. 백방으로 방법을 찾고, 상담하고, 위기관리위원회도 열고, 학부모 면담도 한다. 매뉴얼대로 모든 일을 진행한다 해도 다들 로봇이 아닌 이상 과중되는 업무와 해결되지 않는 위기상황이 괴롭다. 혹시나 내가 져야 할 책임은 없는지, 더 안 좋은 상황이 발생되지 않을지, 아까 내가 그 학생에게 한 그 말이 그 학생을 자극하지나 않을지, 늘 전전긍긍이다. 이런 문제 상황에서 퇴근하고 나면, '일은 일이지'하며 모든 것을 잊고 필라테스나 하며, 맛있는 거 사 먹고 행복하고 활기차게 생활할 수 있는 사람은 소시오패스 아니고서야 잘 없다.
내가 교사로서 정신과를 드나들며 느낀 것은 '의사들이 교사보다 낫긴 낫네'하는 것이었다. 만나려면 미리 예약을 해야 하고, 돈도 내야 하고, 시간도 정해져 있다. 환자가 의사 개인 번호를 알아서 사적인 시간에 연락할 환경도, 그럴 일도 없다. 만약에 의사한테 '제가 힘들 때 개인적으로 연락하고 싶으니 번호 좀 알려주세요'했을 때,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지 않는 의사가 이상한가, 의사의 개인 번호를 물어보는 이 환자가 이상한가?
진료하던 환자가 갑자기 오지 않으면 왜 안 오는지,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해할 필요도 없고 작성해야 할 서류도, 처리해야 할 행정적 업무도 없다. 그런데 우리 교사들은 학생이 아침 조회만 안 와도 불안하다. 특히 이런 심리적으로 불안한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화장실만 가도 혹시 나쁜 일이 있나, 신변에 위험될 만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닌가 불안 초조 그 자체의 상황에 떨궈져 버린다.
가장 힘든 사람들은 부모이다.
청소년기 우울증 환자들의 가장 대표적인 증상은 등교거부이다. 학원이야 돈 내고 가는 것이니, 안 간다면 끊으면 된다. 돈 내고 안 가더라도 돈이 아깝고 속이 뒤집어질 뿐이다. 밥을 안 먹으면 배고프면 뭐라도 먹겠지 하고 넘기면 된다. (물론 이것도 식이장애 문제로 넘어가면 심각한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학교에 안 간다고 하는 것은 부모 입장에서 가장 걱정되고 화나는 일이다. 오늘 하루 결석하면, 앞으로도 결석한다고 할 텐데 어떡하지, 저러다 자퇴한다고 하면 어떡하지, 성실해야 검정고시라도 칠 텐데 저 정신으로 검정고시는 칠 수 있을까, 중졸(혹은 초졸)로 잘 살 수 있을까 걱정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친구 없는 게 학교까지 안 갈 일인가, 학교 가서 혼자 있으면 안 되나, 남들 다 가는 학교를 쟤는 왜 저렇게 안 간다고 하나, 계속 학교에 안 가면 내 직장은 어떡해야 하나, 그만두고 애를 케어를 해야 하나..............
이해를 하려고 해도 문득문득 올라오는 화는 부모를 더 괴롭힌다. 끝도 없는 걱정은 부모를 피폐하게 만든다. 여기에 담임에게 매일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연락하는 일도 실로 엄청난 스트레스이다. 아프다는 것이 거짓말인 줄 서로 알면서 아프다고 결석한다고 연락한다. 매일 출결처리로 지친 담임의 짜증 섞인 전화가 서운하다. 힘든 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주십사 길게 보낸 문자에 "네. 알겠습니다." 하는 짧고 건조한 담임의 답장에 속이 상한다.
학교도, 병원도, 상담센터도 가지 않는 답답한 자식 놈 때문에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한 걸까, 뭘 잘못해서 얘가 이렇게 된 걸까 하는 자책만 하다 보면 한없이 우울하다. 초등학생도 아닌지라 안 간다는 애를 강제로 끌고 갈 수도 없어 더 답답하다. 아이보다 내가 먼저 병원문을 두드려서 우울증 약 처방을 받아 온다.
갱년기인 듯 아닌 듯, 몸이든 마음이든 열불이 터진다. 자식은 속 썩이는데 부모도 기댄다. 몸도 얼굴도 점점 늙어가는데 꾸역꾸역 뭐 때문에 약까지 먹고살아야 하나 싶다. 다 인연 끊고 혼자 살면 이런 고통이 없었을 텐데 싶어 결혼을 한 내 과거의 선택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자책한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온 마을을 망치는 데는 한 아이면 충분하다」라고 하고 싶다.
우울증 학생 한 명이 학교와 가정에 미치는 영향은 굉장히 넓고, 파괴적이다. 청소년기 우울증은 쉽게 낫기도 힘들다. 적성을 찾고, 공부하고, 진로를 찾아야 할 시기에 그것을 멈춰버리면 학업도, 직업도 갖추기 어렵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장기적으로 큰 손해가 아닐 수 없다.
나는 동네에서 엄마로서는 아주 대단한 왕투덜이였다.
예민하고 민감한 딸은 어렸을 때부터 나를 힘들게 했다. 학교에서 전교 1등 하고, 의대 가고, 서울대 가는 학생들을 매일 보다 보니 자신감이 생겼는지, 우리 아이도 잘 키우면 서울대 가는 내신 1.0의 똑똑한 아이로 키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서울대는커녕, 기분이 나쁘거나 숙제를 덜 하면, 여하튼 수틀리면 학원에 안 간다고 소리소리 지르는 예민쟁이가 내 딸이었다.
같이 애 키우는 동네 엄마들을 만나면 나는 늘 푸념만 늘어놓았다. '왜 이런지 모르겠다, 미치겠다, 유난이다, 10살부터 사춘기다'하며 내 기준에 안 차는 아이를 디스 하기 바빴다.
'우리 OO이가 공부도 안 하고 놀기만 해서 문제다'
'남들 다 가는 수학학원을 안 다닌다 하니 미치겠다'
'주말만 되면 하루종일 나가서 친구들이랑 놀기만 한다'
하는 동네 엄마들이 있으면, 예전에는
"언니, 말도 마요" 하고 남의 입을 막고 내 말하기 바빴다.
우리 집에서는 무슨 일 있었는지, 우리 딸은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나는 어떤 굴욕과 모욕을 당했는지 늘어놓기 바빴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들고 우리 딸이 나를 제일 못살게 굴고, 얘 때문에 내가 정신과에 갈 지경이라고, 대체 얘는 왜 이렇냐고 떠들기 바빴다.
올해 우울증과 대면하고 나서는 가치관에 변화가 생겼다.
얘가 이러다가 우울증에 걸리면,
스트레스를 건강하게 소화하지 못하면,
부모가 소통의 창구가 되어주지 못한다면.
얘도, 나도, 선생님도, 우리 가족의 미래도 다 망치는 거네.
친구 있고, 웃고, 잘 먹고, 휴대폰 잡고 낄낄대는 게 한심해도,
학교 갈 시간에 학교 잘 갔다 오는 게 제일 좋은 거네.
학교만 가도 건강한 거네.
하는 마음으로 조금씩 바뀌고 있다.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변화는 동네 왕투덜이 엄마도 바꿔놓았다.
이제는 동네 엄마들에게 내가 학교에서 만나고 들은 마음이 아픈 아이들에 대해 말한다.
그런 학생들 중에 단 한 명도, 진짜 단 한 명의 학생도 부모와 사이가 좋은 학생들은 없다는 것에 대해 말한다. 지금이야 어리니 애들 윽박지르고 혼내도 금방 풀어지고, 버럭 하면 학교도 학원도 부모 마음대로 보낼 수 있지만, 머리 커지면 그것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해준다. 자식과 대화가 끊기는 순간, 자식이 부모에게 입을 다물고 문을 처닫고 들어가는 순간, 모든 재앙이 시작됨을 경고한다.
"언니, 진짜 우울증 안 걸리고 학교 잘 가면 그게 제일 효도하는 거예요."
"밥 잘 먹고, 잘 웃고, 친구 있으면 됐어요."
"학교만 잘 다녀도 행복한 거예요."
"공부 못 해도 살길 많아요. 부모가 찾아주세요."
"어차피 공부 미친 듯이 해봤자 비슷하게 사는 거 알잖아요."
"공부 못 하는 애들이 더 스트레스 많아요. 공부 못하는 것도 불쌍하잖아요. 잘해주세요."
동네 1번 투덜이 엄마는 우울 극혐자가 되었다.
교사로서 학교에서 자살시도 학생을 만나고, 방임에 가까운 가정을 관찰하고, 그 가정에서의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단절이 어떤 지옥을 불러오는지를 경험하고, 그 늪에 빠져 본인도 우울증에서 같이 뒹구르고 나서는 우울증 예방 홍보 대사가 되었다.
우울증에서 허덕이면서 우울증에 대한 책을 읽고, 유튜브를 보고, 글을 쓰면서 우울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았다. 좋은 대학을 졸업한 공부 잘하는 학생도 우울증에 걸리면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살아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성인기 발현되는 우울증도 어린 시절의 환경과 부모의 양육태도와 학창 시절의 스트레스에서 상당 부분 기인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이제는 틈만 있으면 청소년기에 터지는 우울증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렵고, 고치기 힘든 것인지 설파한다. 걸리기 전에 안 걸리도록 부모가 엄청난 노력을 해야 된다고 이야기한다. 어릴 때부터 스트레스 너무 주지 말고, 우리 대학 갈 때랑 다르고, 시대도 많이 바뀌어 가니, 좋은 대학 가지 못하더라도, 내신 등급 잘 못 받아도 너무 혼내지 말자고 이야기한다.
공부 잘하는 아이보다 공부 못 하고 하루 종일 게임하는 애들이 스트레스는 더 많이 받는다고 말한다. 속은 터져도 더 불쌍하고, 어쩌면 더 잘해주고 더 웃어줘야 되는 애들이라고 이야기한다.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애들만 칭찬 들어서, 걔네들은 학교에서는 칭찬들을 일도 없으니 집에서라도 칭찬해 주고 다정하게 대해주라 주위의 부모에게 말한다. 한 번씩 속 터질 때 혼내고 지지고 볶더라도, 자식에게 살 가치도 없는 놈, 식비와학원비만 축내는 하찮은 벌레 취급하며 마음에 상처 주는 막말은 하지 말라고 연설한다.
내 일장 연설을 듣고 있던 경상도 출신 동네 언니가 말했다.
"야! 니, 완전 김창옥 다 됐네! 야가 우울증 걸리더니 행복전도사 돼뿟노! ㅋㅋ"
그렇다. 갑자기 행복전도사가 되었다.
가장 앞서 내 자식의 허물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며 '공부 안 한다, 말 안 듣는다, 성격 이상하다'라고 나불거리던 내가, '애들 품어주자, 칭찬해 주자, 웃어주자'하는 행복전도사가 되었다.
자식 욕 하는 것보다, 이게 조금 더 재미있고 보람 있는 듯하여 이 컨셉으로 좀 더 나가볼 생각이다. 요즘 동네 아줌마들이 나를 좀 좋아한다. 한참 이야기 하다가 집에 갈 때,
"에휴, 학교 잘 가주는 것도 효도란 말이지? 오늘 저 한심한 인간 맛있는 거나 해줘야겠다."
하며 집으로 간다. 세상에 버릴 경험 하나 없다더니, 올해 나의 침울한 경험들이 이렇게 공익적으로 쓰임이 있을 줄 몰랐다.
이 글을
나를 아는 누군가가 본다면,
"웃기네! 자기도 애한테 맨날 소리 지르면서!"
혹은 우리 딸이 본다면,
"뭐래, 엄마나 잘하지. 누구한테 뭐래는 거야!"
라며 비웃을 수 있다.
왜냐하면, 지난주에 있었던 대전쟁의 여파로 우리 딸은 6일 동안 방문을 걸어 잠그고 집에서 대화를 하지 않았다. 학원도 다 안 가고 집에만 있었다. 그나마 평소의 정신교육 덕분인지 학교는 제시간에 가줘서 그것만으로도 엄청나게 고마웠다. 자기 전에는 내일도 말 안 하면 어떡하지, 내일 학교도 안 간다고 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과 불안에 휩싸여 안절부절못했다. 말을 안 하는 동안 답답하고 화가 났다.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겨먹으려고 했던 나 자신이 한없이 멍청했다. 그러면서 왜 이번 주제는 하필 이거야 하며 나의 현실과 동떨어진 글을 쓰고 있는 것이 한심했다. 이런 글을 쓸 자격이 되나.
그래도, 이 글을 쓰면서 또 다짐했다.
나는 오은영 선생님이 아니니까 오은영 선생님처럼은 못 한다. 버럭버럭 화내고 소리 지르는 엄마임은 어쩔 수 없다. 울고 소리치고 한 대씩 찰싹찰싹 때리면서 키울지라도, 지지고 볶고 엉망진창인 집구석이 되어도, 학원은 안 가도 집은 안 나가도록, 공부는 안 해도 손목은 안 긋도록 잘못한 게 없어도 그냥 미안하다, 엄마가 잘못했다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도 말처럼 들어주자 다짐한다. 돼지우리 같은 방도 호텔처럼 매일 치워준다 다짐한다. 스트레스가 깊은 우울증이 되지 않도록 부모가 바람 빼주는 역할을 해주자 다짐한다. 멀지 않은 미래에 실패하고 또 후회하고 눈물짓고 있겠지만, 어쨌든 또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