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선생이 관상을 왜 봐요
사람의 얼굴을 가장 많이 보는 직업은 어떤 직업일까?
서비스업? 경찰? 영업직? 공항 출입국 직원?
여러 가지 직업군이 있겠으나, 사람 많이 만나기로는 교사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교사는 많은 사람을 상대할 뿐만 아니라, 학생들과 1년이라는 시간을 보낸다.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응대'정도가 아니라 '밀접 교류'를 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사람을 많이 상대하는 다른 직업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학생의 성격이나 행동을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관찰할 수 있다. 학습태도, 교우관계, 인성, 기질, 가정사까지 파악하게 된다. 학부모 상담이나 면담을 통해 학생의 부모의 특성까지 알 수 있다. 여기서 상담을 조금 더 해보면 어릴 때 양육환경이라던가, 가정 분위기 같은 것들도 이해할 수 있다. 연구로 치면 횡단연구와 종단연구가 같이 돌아간다고 봐야 한다.
내가 고3 때의 일이다. 3월 첫 수업을 들어오신 어떤 선생님께서
"너네, 딱 일주일만 수업해 보면, 내가 너희 다~ 파악가능하거든! 성적부터 성격까지, 쫙~! 다 견적 나온다는 걸 알아라."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뭔 개소리야. 일주일보고 자기가 뭘 안다는 거야." 빈정댔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선생님 혼자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사람을 재단하는 이상한 선생님이라 생각했었다. '딱 봐도 아니까, 자기한테 잘 보이라는 거야, 뭐야. 웃겨.' 하며 수업도 제대로 안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이해 못 했던 그 선생님의 말을, 지금은 이해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내가 교사가 되어보고 나니, 아이들을 2000명쯤 보고 나니, 알 것 같다.
일주일은 무슨, 3시간이면 충분하다.
1시간만 수업해 보면, 그 반의 1등을 골라낼 수 있다.
2시간 수업해 보면 공부 안 하는 농땡이들 5명쯤 분류가능하다.
3시간 수업해 보면, '1년 동안 얘네 데리고 수업하면 되겠다' 하는 괜찮은 애들을 대충은 가려낼 수 있다.
담임으로 만나는 학생들은 학기 초의 상담 1번만 해봐도, 대충 파악 가능하다.
'아, 얘는 좀 명랑하네'
'얘는 엄청 긍정적이네'
'얘는 반장 하면 잘할 것 같은데'
'얘는 좀 시니컬하네'
'얘는 애가 좀 음침하네'
'이 새끼 이거, 완전 또라이네'
하는 첫인상을 간직하게 된다. 1년을 지내다 보면 이 첫인상에 대한 예측(?)은 대부분 확신으로 바뀌게 된다. 반전의 순간을 주는 인물은 흔치 않다. 대부분 예상과 맞아 들어가는 성격과 예측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학업성적이 신기하다. 경험이 통계적 데이터가 되어 확증편향을 가중시킨다.
「관상은 사이언스다」하는 말을 나도 모르게 되뇐다.
'얘는 이럴 것 같더니, 내 생각이 딱 맞네'에서 '이럴 것 같다'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한 생각일까?
나는 관상을 볼 수 있게 된 걸까?
'얘는 이럴 것 같더니, 내 생각이 딱 맞네'하는 내 예측은 왜 자꾸 맞는 걸까?
하는 생각에 관상학 책을 보기 시작했다. (지금도 심심하면 본다.)
수학선생이 관상을 왜 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수학전공자도 유사과학(?) 쌉소리 좋아한다. 나는 타로카드도 볼 줄 아는데, 별거 아닌 것들이 아주 착착 들어맞는 걸 보면 신기하고 재미있다.
어쨌든, 관상학을 좀 공부했다. 어차피 수양대군이 왕이 될 상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관상가가 될 것도 아니니, 슬슬 넘겨가며 재미있는 부분만 읽었다. 눈이 어떠니 남에게 해를 끼칠 상이고, 입이 어떠니 서방이 둘이 될 상이니 이런 것은 굳이 머릿속에 넣을 필요는 없었다. 좋은 것만 봤다. 사람 잡는 선무당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너무 열심히 공부하면 안 될 터였다.
심심할 때마다 보았던 관상학 책에서 내가 유념하고 있는 것은 이런 것 들이다.
1. 안광(眼光 : 눈에 서려 있는 기운)
- 눈은 마음의 창이다.
- 눈은 부귀빈천을 보는 곳이다.
- 얼굴이 천 냥이면 눈은 구백 냥이라 할 정도로 관상에서 가장 중요하다.
- 정신적인 모든 것은 눈을 통해 알 수 있다.
- 눈은 힘이 있고, 광채가 나야 한다.
- 작고 또렷한 동공에서 나오는 빛은 재물을 모은다.
- 눈이 깨끗하게 빛난다는 것은 좋은 기운이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이다.
2. '신수(身手)가 훤하다'는 말의 의미
- 관상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화'이다.
- 신수는 사람의 겉모습의 얼굴의 건강 상태나 기운을 포함한 전체적인 모습을 말한다.
- '신수가 훤하다'는 말은 건강하고 복된 기운이 얼굴에 드러난 상태를 뜻한다.
- 얼굴에 좋은 기운이 넘치면, 이로 인해 좋은 운이 따른다.
- 얼굴의 생김새뿐 아니라, 몸과 마음의 건강함과 여유로움까지 표현하는 말이다.
- 신수가 훤하려면, 양 눈썹의 사이, 즉, '인당'이라고 하는 곳이 밝고 깨끗하고 빛이 나야 한다.
- 인당이 어두운 사람은 마음에 수심이 많고, 정신이 맑지 못하다.
3. 입꼬리의 중요성
- 『주역』에서 입은 '만물의 조화를 일으키는 곳'이라고 했다.
- 눈, 귀, 코에 비해 입은 가장 많이 움직일 수 있으며, 입의 움직임을 통해 표정과 마음상태를 표현한다.
- 입은 단순히 '움직이는 기관'으로서가 아니라, '말'을 내뱉는 기관이다.
-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표현하는 기관으로서 입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운명이 좌우된다.
- 양쪽 입 끝이 약간 올라간 듯이 힘이 있으면, 대단한 귀격으로 삼으며 관운이 가장 좋다.
- 양쪽 입꼬리가 힘없이 축 처진 모양은 배가 뒤집힌 형국으로, 가난과 고통을 상징한다.
- 입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복이 들어오는 입으로 바꿀 수 있다.
4. 가난, 고독, 근심은 3종 세트
- 가난과 고독과 근심은 한 세트이다.
- 가난하면 고독하고, 고독하면 근심이 쌓인다.
- 근심이 있는 사람은 얼굴에 반드시 드러난다.
- 재물복이 있는 관상은 정해져 있으나, 그 복을 다 얻는 사람이 있고 걷어차는 사람이 있다.
- 그것은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 달려있다.
내가 다녔던 병원에서는 접수를 하면, BDI검사(벡 우울 척도, Beck Depression Inventory)라는 검사를 먼저 탭으로 체크하여 진행했다. 한참 우울에서 휘적대고 있을 때, 이 척도검사에서 저 문항에는 항상 '나는 내 모습이 매력 없이 변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또는 '나는 내가 추하게 보인다고 믿는다'를 체크했었다. 평소 내가 못 생긴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거울을 보면 한없이 초라한 내가 있었다.
피부는 푸석푸석하고 얼굴빛은 흙빛이었다. 눈은 흐리멍텅하고 초점이 없었다. 입꼬리는 항상 축 쳐져서 팔자주름이 도드라졌었다. 어깨는 쫙 펴지 못하고 팔다리는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자세는 구부정하고 걸음걸이는 터덜터덜했다.
화장? 화장 같은 것은 할 정신도 없었다.
나는 혈색 없는 입술이 싫어 자기 전에도 새빨간 립을 바르던 사람이었다. 같이 여행 갔던 친구들이 자는데 무슨 쓸데없는 짓이냐고, 미쳤냐고 할 정도로 나는 허여멀그레한 입술을 싫어했다. 그런데 우울증에 젖어있는 동안은 입술에 뭘 바르기는커녕 화장품 파우치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했다. 얼마나 추레하고 얼빠진 모습이었냐면, 하루종일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돌아다니던 어떤 날이었다. 지갑을 잃어버렸다. 없어진 지갑을 찾아 아파트를 돌아다니던 중 퇴근하던 남편을 마주쳤다. 남편은 나를 못 알아봤다. 산발한 머리에 흙빛의 얼굴,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이상한 옷차림, 초점 없는 눈동자, 메마른 허연 입술.
나를 처음 보는 사람이 보았어도, 관상 같은 것에는 1도 관심 없는 사람이 보았어도,
'아, 저 인간 어둡다. 우울함이 뿜어져 나온다.' 하는 몰골임을 느꼈을 것이다.
우울함이 얼굴에서 생기를 다 빼앗아갔다.
그러니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질문지의 '자신의 매력'을 평가하는 질문은 우울증을 측정하는 데 아주 적합하다고 본다.
'너 좀 우울해 보여'
'그 사람, 우울한 것 같아'
라는 말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마 우울 최절정이던 그때의 나의 모습과 비슷한 면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너는 이렇게 생겼으니까 이렇게 살 운명이다」라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관상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아니다. 생긴 대로 살아야 되는 운명이면 왜 살아야 하겠는가?
관상서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마의상법』이라는 책에는 "잘난 관상은 몸이 튼튼한 신상(身相)만 못하고, 몸이 좋은 신상은 마음씨 좋은 심상(心相)만 못하다. 심상이 좋으면 관상이나 신상이 좋은 것보다 낫다."라고 되어있다. 결국 생긴 것도 중요한데, 니 마음이 관상을 이겨낸다는 소리다. 관상이 잘 나도 잘 써먹고, 관상이 별로 안 좋아도 짜져있지 말고 알아서 노력하라는 소리다.
한참 우울에 쩔어있을 때, 누군가 나에게 한 말이 아직도 상처로 남아있다.
"OO아, 표정이 왜 이래? 웃어. 웃어야 좋은 일 생기지."
참 나. 돌았나. 진짜.
"좋은 일이 없는데 뭘 웃어요?"
라고 톡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럴 기력도 없어 참았다.
어렇게 우울증 환자에게는 웃어라, 행복해지자 하는 말도 흡수가 안 된다. 비아냥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만큼 꼬였고, 그래서 우울증이다.
「웃으면 복이 와요」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겁니다」
라는 복장 터지는 소리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저 말이 맞는 말일수도 있는데, 맞는 말이라서 더 짜증 나는 말이기도 하다. 웃는 게 안 되는데 어쩌라고.
그럼 뭐냐?
우울할 때는 웃는 것도 고통이다. 괴롭다. 그래서 잘 안된다. 거울 보는 것도 괴롭다. 그래서 우울의 최절정에서는 '웃어보자'하는 것은 절대 처방이 될 수 없다. 그때는 백약이 무효다.
그래도 우울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겠다, 살짝은 기분이 나아졌다 싶을 때가 있다. 터널에서 나오고 싶다, 이제 좀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이때다!!'하고 더 빨리 빠져나오기 위한 가속 페달로 「외모 가꾸기」를 이용해 보자.
세일하는 올리브영에 가서 평소에 사지 않던 틴트도 사보고, 지저분한 눈썹이 보기 싫으면 가장 고급진 눈썹칼도 사보자. 카카오톡 선물하기에서 샤넬 립스틱을 나에게 선물하기로 주문해 보고,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꼴 보기 싫다 생각이 들 때, 바로 미용실로 달려가보자.
자꾸 못났다, 거울 보기 싫다 하지 말고 세수도 하고 거울도 보자. 어차피 먹고 싶은 것도 없을 텐데 화장품은 사두면 언젠가는 쓰니까 꾸밈비용을 왕창 지출해 보자. 돈이 좀 더 있으면 피부과 시술도 받아보자. 탱탱한 피부와 옅어진 기미와 좋아진 피부결이 돈 쓴 만큼 기분을 올려줄 수 있다. 돈으로 외모와 행복을 같이 사보자.
예전에 교사 연수에서, 승무원 교육하시는 강사님에게 「이미지 메이킹」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승무원들이 밝은 인상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많이 연습하는 것 중 하나가 '눈썹 올리기'라고 한다. 눈썹을 2mm 정도만 살짝 올리는 것이라고 했다. 눈썹을 살짝 올리면 눈빛도 조금 맑아지고, 입꼬리도 살짝 올라간다고 했다. 그렇게만 해도 얼굴의 전체적인 인상이 밝아지고 미간이 펴진다고 했었다. 어머. 이 분, 관상학 좀 배우신 언니였다.
그럼, 우리도 승무원이 될 건 아니지만, 우중충한 인상을 바꾸기 위해 눈썹을 살짝만 올려보자. 죽은 동태눈깔도 애써 힘주어 바짝 떠보자. 처마 밑 고드름처럼 축축 쳐져있는 입꼬리도 U자가 되도록 살짝만 올려보자.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재물을 불러들인다고 하잖는가!) 그리고 얼굴에 톤업 선크림이라도 살짝 두드려 바르면 '조금 괜찮은데?'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것이 우울퇴치의 첫걸음이 될 수도 있다. 내 얼굴의 생기를 모두 잡아먹은 우울 귀신을 쫓아 보낼 수도 있다.
우울의 가장 무서운 적은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내 인상이 조금은 복을 끌어 담는 얼굴이 되도록, 신수가 훤~한 사람이 되도록.
좋은 관상을 만들어보자.
나를 사랑하는 첫걸음으로 「외모 췤크↗」를 실천해 보자.
여보시게 관상가 양반,
내가 우울한 상인가, 복이 있을 상인가.
그것은 대감께서 짓는 표정에 달려있습니다. 나으리.
+ 최악의 나날을 겪었지만 얻은 것도 많더라고요
+ 우울증 걸리기에 최적이 시기가 있을까
+ 우울한 날 글이 잘 써져서 좋다던데 나도 그럼 즐겨보자
+ 우울해도 성공(?)한 사람들을 찾아보았어요
+ 우울증 없이는 미술도 음악도 소설도 영화도 없습디다
+ 우리가 뭐, 대단한 예술가가 될 것은 아니니까요
+ 우울해도 너무 깊어지지는 말고 살짝 맛만 보고 빨리 탈출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