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교사로서 '수학을 잘 가르친다, 수업이 재미있다'하는 평가가 가장 좋을 만도 한데, 본 수업보다 심심풀이용 이야기가 더 재미있다는 평을 가장 인상 깊게 간직하고 있는 나도 이상한 인간이다.
요즘 수학은 아이들이 지겹도록 선행을 하고 교실에 앉아 있어서, 학교에서 배우는 수학이 새로울 것도, 신기할 것도 없다. 그래도 학교에서만 할 수 있는 수업이 있어, 어떻게든 학원에서는 못 배운 빈틈을 찾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내 소임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하려고 노력한다. 수업도 중요하지만, 학교는 공부만 배우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꼰대 마인드도 있어서, 어떤 날은 "야, 솔직히 학원에서 다 배웠잖아. 지금 수학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 한다. 이거 들어라."하고 책 덮으라 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막 떠들 때도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한다. 부모님이 들으면 '헉!' 할 이야기도 많다. 듣는 사람은 학생들이니까 학생들 관심사에 맞춰서 이야기 한다. 수학에 전혀 관심 없이 눈만 뜨고 있는 수포자도, 공부에 미쳐있는 전교 1등도 잠시 펜을 놓고 피식 거리며 듣고 웃을 때는 세상 뿌듯하다. 내가 개그맨이 된 거 마냥, 재미있고 즐겁다.
내가 자주 하는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다.
- 성적표로 혼내는 부모님 입 틀어막는 법
- 수능치고 부모님 길들이는 법
- 집에서 부모님 잔소리 안 듣게 휴대폰 하는 법
- 싫은 부모님으로부터 빨리 독립하는 법
- '엄마 친구 아들'에 '내 친구 엄마'로 응대하는 법
- 대치동에 다니면서 공부해도 성적이 안 오르는 이유
- 대학 가서 교환학생이나 어학연수 꼭 가야 하는 이유
- 연인과 안전 이별 하는 법
- 대학과는 상관없이 20대에 노력해서 성공한 친구들 이야기
- 고등학교 때 공부해야 하는 이유
- 돈 없이 살면 비루한 이유
- 고등학교 친구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유
- 지금까지 나에게 들어간 사교육비 계산해 보기
- 그것이 바로 부모님이 갑자기 화를 내는 이유임을 깨달아보기
- 내가 본 전교 1등들이 공부하는 법
- 성적이 안 오른다 징징대는 니들이 양심불량인 이유
수학시간이지만, 저런 이야기를 하나둘씩 하면서 공부하도록 살살 마음을 긁어주면 수업에도 조금 숨통이 트인다. 이야기 들으면서 눈빛이 바뀌는 학생들도 있고, "아, 팩폭"을 외치며 엄살떠는 놈들도 있다. 이 놈들은 부모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놈들이기 때문에, 그나마 학교 선생님인 내가 부모님 대신 정신교육 시켜준답시고 떠드는 이유도 있지만, 사실 그런 이야기할 때 제일 재미있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내가 재미있어서 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려면 자료가 많아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많다. 그 대학 그 과를 나오면 어디로 취업할 수 있는지, 연봉은 얼마인지 궁금하다. SKY를 나와도 취업하기 힘든 게 사실인지 궁금하다. 공부를 못 했는 데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더 궁금하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고 있다 보면, 헤어디자이너의 삶은 어떤지, 수입은 괜찮은지, 몇 살 때부터 어떻게 배웠는지, 보조 생활은 몇 년 동안 해야 하는지, 얼마나 힘든지 궁금하다. 전과와 편입으로 끊임없이 레벨업하는 제자에게 전과는 어떻게 했는지, 편입은 어떻게 준비하면 되는지 물어본다. 학생들이 가기 싫어하는 학교나 학과는 진짜 노답인지, 아예 인생이 망하는 길인지 궁금해서 알아보고 찾아본다. 우리 집 싱크대 누수를 봐주시는 분이 30분 일하시고 25만원을 받아가시는데, 이런 일들은 어디서 어떻게 배우는 건지 궁금해서 찾아본다.
그런 것들을 모아서, '선생님이 이런 이야기를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하는 이야기를 일부러라도 해주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삶을 관찰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나 스스로가 많은 경험을 해야 학생들에게도 다양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우울증까지 체험하게 되었다. 직접 하는 경험이 소중하다 생각했지만, 우울증까지 겪지는 않았어도 되었을 텐데,우울증도 직접 경험의 범주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지만 우울증의 경험을 교실에서 풀어놓기는 아직은 어려울 것 같다.
"야, 나도 우울증 걸려봤거든"하면서 풀어놓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수업시간 잠 깨기 에피소드로 풀기에는 그 시작도, 과정도 적절치 않고 나에게도 그리 유쾌한 주제도 아니다.
그래도 글로는 잔소리를 풀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글을 빌어 우울증이라는 학생들에게 꼰대질 좀 하려고 한다. 이미 갈 길 찾아 잘 살고 계신 어른들은 못 본척하고 넘겨주시길.
얘들아.
일단 사과부터 하고 시작할게. 미안해.
쌤이 너희들 우울증이라고 하고, 공황이라고 하고, 학교 안 오고 수업 안 듣고 하는 거.
솔직히 개뻥이라고 생각했거든?
의지박약에 나약한 놈들, 저거 다 거짓말이고 꾀병 부리는 거라고 생각했어.
게으르고 한심한 새끼들이라고 욕도 많이 했다.
솔직히, 너무 귀찮거든.
출결 서류 계속 챙겨야 되고, 나이스에 체크해야 되고, 부모님이랑 연락해야 되고.
그런데, 쌤이 우울증 걸려보니까, 진짜 젖은 낙엽 되는 거 맞더라.
못 움직이고, 침대에 누워만 있고, 잠만 자고.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 맞더라.
학교도, 못 가는 거 맞더라. 나도 학교 못 가서 주저앉았어. 학교 주위만 가도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식은땀나고.교실에 못 들어가겠고 학교가 공포의 대상 맞더라. 선생님이면서 어른인 나도 이런데, 아직 어린 너희들은 오죽하겠니? 이해한다.
성적 안 나와서, 좋은 대학 못 가서 우울하다고, 공부하기 싫다 하는 것도
'공부 안 해서 못 하는 주제에, 개소리하고 앉았네.'
했는데, 그것도 사과한다.
책도 공부도, 눈에 안 들어오는 거 맞더라.
집중 안 되고, 글씨 안 읽히고, 암기력 떨어져서 그날 날짜요일도 기억 못 하는 거 맞더라.
"요즘 집중이 안 돼요." 하는 말에는 늘,
"야, 집중은 '되고, 안 되고'가 아니라, '하고, 안 하고'야. 니가 하는 거야. '집중'."
이라고 재수 없게 말한 거 사과한다. 잘난 척했네. 미안하다.
집중, '되고, 안 되고'인 거 인정할게. 미안하다.
쌤이 딸 키워보니까, 학교도 힘든 거 맞더라.
친구 때문에 학교 가기 싫다 하는 것도 한심하게 생각했는데, 너희들한테는 친구가 유일한 사회생활이라, 싫은 인간들이랑 8시간씩 같은 교실에 있는 것이 고통이라는 것도 이제 조금은 이해한다. 급식실에서 짧은 순간이라도 마주치는 어떤 새끼 때문에 급식실 내려가기 싫어 밥 굶는 것도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다. 학교가 지옥이 될 수도 있겠다, 어렴풋이 이해한다. 알겠다.
니네가 어렸을 때부터 학원 뺑뺑이 돌면서 얼마나 피곤한 인생을 살았는지도 이해한다.
영어학원 갔다 오면 수학숙제, 수학학원 갔다 오면 영어숙제 해대다가, 주말에는 그때 밖에 못 가서 국어랑 과학학원에 다니면서 그렇게 계속 살았으니, 이제 지칠 때도 됐다 싶다.
부모님은 1년만, 2년만 더 하면 된다, 한 등급만 더 올리면 희망 있다, 너는 교과로는 안 되니 종합을 해보자, 수시는 글렀으니 정시를 해보자며 계속 '된다, 된다'만 외치니까 더 답답한 것도 알겠다. 1년만 죽었다고 생각하고 공부하라는데, 그게 진짜 웃긴 이야기지. 살아있는데 죽었다고 생각하라니.
그래서 학교도 안 간다 하고, 공부도 안 한다 하고, 대학도 필요 없다 하는데.
그래. 뭐. 다 이해한다. 알겠다.
그런데 있잖아.
쌤이 우울증 걸리고 제일 많이 했던 생각이 뭐였는지 아니?
나는 다 커서 우울증에 걸려서 정말로 다행이다.
직업이 있어서 다행이다.
대학은 나와서 다행이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해서 다행이다.
이거야. 내가 만약 학생 때 우울증에 걸려서 무기력에 빠져 지냈다면, 마침 그 시기가 지필고사 기간이라 공부도 못하고, 시험도 망쳐버렸다면? 그래서 내신등급이 떨어져 남은 기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내가 가고 싶은 대학에 못 갈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면? 나도 아마 헤어 나오지 못하고 길을 잃고 방황했을 거야. 자퇴한다고 하고, 정시한다고 하고, 집에 돈 있었으면 유학 보내달라 난리 쳤겠지.
쌤이 우울증을 지나오면서 책을 정말 많이 읽었거든. 우울증에 관한 책들.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나, 상담사가 쓴 책들도 많이 읽었지만, 사실 더 잘 읽혔던 책들은 진짜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의 책이었어. 그걸 읽고 또 느낀 게 뭔지 아니? 그런 책들 중에서도, 읽다 보면 짜증 나는 남의 일기처럼 징징대기만 하다가 끝나버리는 책들이 있고, 무너지고 또 무너지지만 조금씩이라도 나아가 보는 것이 느껴지는 책들이 있었거든. 이렇게 분류하는 게 좀 웃기긴 하는데, 후자에 속하는 책들은 쓴 사람들이 다들 똑똑한 사람들이더라. 공부한 사람들이더라고.
다들 우울증이랑 조울증에 두드려 맞으면서도, 가만히 멍석말이해서 두드려 맞도록 내던져 두지 않더라고. 자기 자신을 싫어하면서도, 괴로움에 무릎 꿇지 않고 자신을 들여다보고, 글로 쓰고, 병원도 다니고 의사쌤도 찾아다니고 하더라. 이상한 의사 만나서 좌절도 하고, 약 먹고 부작용도 겪고, 상담선생님 만나서 상담도 하고, 친구나 가족한테 욕먹고 상처받아도 그것도 다 글로 써내면서 풀어냈더라. 이유가 있다면 이유를 찾고, 사람이 괴롭히면 사람을 손절하고, 직장이 힘들면 직장을 쉬고, 이유가 없다면 '이유 없는 우울증도 있다더라'하며, 억지로 받아들이기도 하면서. 끈질기더라.
그 끈질긴 사람들한테는, 앞으로는 똑같은 어려움이 와도 조금은 덜 힘들겠지. 우울증을 자신을 보는 돋보기로 써먹었으니까. '나'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았으니까, 내가 어떨 때 넘어지는지 알았으니까, 그걸 피하기가 조금은 쉽겠지. 그래서 생각했어. 공부 잘하는 놈들은 우울증도 잘 이겨내겠네.
그래서, 너희들도 꼭, 공부라는 것을 하길 바란다.
우울해도 공부는 해야 해.
학교 공부를 할 수 있는 상태라면, 학교 공부를 해. 공부할 상태가 되면 우울은 일단 저 밑바닥에 좀 미뤄놔 두고, 일단 급한 대로 공부부터 해. 고등학교 3년은 금방 가니까. 더러운 물 밑에 가라앉아 있는 것들 휘저어서 물 다 더럽히지 말고, 밑에 더러운 게 있는 걸 알지만 그냥 위에만 깨끗한 상태로 일단 살아. 공부되는 정신이면 무조건 공부해.
공부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게 해주기도 하지만, 하기 싫은 것을 제거시켜 주기도 하잖아? "와, 나는 화학은 절대 못 하겠다. 아무리 공부해도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하면, 너는 화학과에는 가면 안 되겠지. 화학이랑 안 맞는 건, 화학을 공부해 봐야지만 알 수 있는 거야. 우리는 손흥민이나 김연아가 아니니 특출 나게 잘하는 건 없어. 그냥 내가 진짜로 하기 싫은 것을 골라내면서 남은 것들 중에 그나마 제일 맞는 것을 찾아내야 해. 그러니까, 일단 공부해. 공부해서 대학가. 돈 벌어. 너, 우울한 데 나중에 직업도 없고, 돈도 없으면 진짜 더 우울하다. 우울해도 돈은 있어야지. 그래야 덜 비참하지.
학교 공부를 할 수 없는 상태라면, 일단 학교 공부는 미뤄놔. 대신에 '나'에 대해서 공부해. 나는 왜 이렇게 됐는지, 내 인생에 공부나 학교가 의미가 있는지, 공부가 내 길이 아니라면 나는 어떤 것을 하면 되겠는지, 나는 무얼 싫어하고 무얼 좋아하는지. 그걸 찾아봐. 무조건 다 싫다, 안 한다, 안 간다 하면서 방에 박혀서 유튜브만 보고 있지 말고. 고민하고 생각해. 제발 지금만 보지 말고, 1달 뒤, 1년 뒤라도 생각해 봐. '앞으로', '어떻게'라는 것을 고민해 봐. 그런 고민들이, 그 고민들에 답을 찾는 시간들이 지금 무너져 있는 너희들을 조금이라도 잡아줄 거야. 내가 나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데, 누가 나를 도와주니?
아무도 못 도와준다. 너가 직접 해야 해.
병원 가봤지? 약 먹어봤지? 상담받아봤지?
다 알잖아. 약 먹어도 가만히 있으면 아무 소용도 없어. 매일이 똑같아. 쌤이 '활기를 주는 약'을 먹어봤는데, 활기는 개뿔. 아무 변화도 없더라. 그거 먹고 기분 좋아지고 우울증 한큐에 나으면, 그것도 마약 아니냐? 약은 보조일 뿐이야. 주체는 '나'고. 병원 갔다 약 먹고 가만히 앉아서 게임이나 몇 시간씩 하고 앉아있으면, 병원인들 약인들 무슨 효과가 있겠니?
공부다. 공부해. 중요하다.
무엇이든 공부해. 그래야 살 수 있어.
학교 가기 싫으면 자퇴해도 돼. 요즘 자퇴 좀 많이 하니? 괜찮아.
집이 너무 싫으면 쉼터로 가도 돼. 집이 지옥이면 집을 떠나야지.
친구 때문에 힘들면 친구 안 사귀어도 돼. 친구 없어도 아무 일도 안 생겨.
공부 못 해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 이상한 대학가도, 대학 끝까지 안 다녀도 다 잘 살더라.
니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도, 인생 안 망해. 다 잘 살아.
그런데, 절대 자신을 해하는 방식으로는 살지 마라.
부모가 싫다고, 부모가 원하는 것이 공부라서, 성적을 올리면 엄마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공부 때려치우지 마라. 엄마말 듣기 싫어서, 부모가 꼴 보기 싫어서, 부모 괴롭히려고 양아치나 범죄자가 되지는 말자.
우울증의 탈을 쓰고 기생충이 되지는 말자.
부모도 남인데, 남이 좋아하는 일 하기 싫어서 나를 망치는 방식으로 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남이 좋아하든 말든 나에게 도움이 되면 하고, 나에게 도움이 안 되는 것은 하지 않으면서 살자. 누군가를 위해서, 누군가를 위하기 싫어서 내 삶을 결정하지 말자.
힘들다고 손목 긋지 마라. 아프고 힘들 때 더 아프고 더 힘든 방법으로 행동하지 말자.
분노조절장애라고 부모한테 쌍욕하지 마라. 너가 하는 저질 행동들을 병으로 합리화하지 말자.
"우리 모두는 축복받은 생명이고, 다 귀한 존재야" 같은 소리 안 할게. 축복은 무슨, 낳아달라 사정하지도 않았는데, 부모 마음대로 낳아놓고 먹여줬다, 키워줬다 고마워하라는 소리, 너네가 제일 싫어하는 개소리라는 거 안다.
그래도, 지금까지 학교랑 학원만 다니면서 재미도 없는 공부만 하면서 살았는데, 이렇게 힘없이 고꾸라지기에는 너네 인생이 좀 불쌍하지.
내 돈 벌어 내 마음대로 좀 써보고, 하루종일 남의 간섭 없이 놀아도 보고, 눈에 피나도록 휴대폰이랑 게임도 해보고. 능력 찾으면 인정도 받아보고. 여행도 가보고, 연애도 해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