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는 터덜터덜해도 수영은 터덜터덜할 수가 없쟈나
어디 갈 기분도, 뭘 할 기분도, 누구를 만날 기분도 아니었지만.
어디 딱히 나갈 일이 없으면, 3일이고 4일이고 그 모습 그대로 있었다. 씻지도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고 집에 있었는데 그 꼴을 눈 뜨고는 못 봐주겠던지 남편은 운동이라도 하라고 매일 성화였다.
테니스를 쳐라, 골프를 쳐라.
남편이 강권하던 운동은 두 가지.
둘 다 진짜 별로였다. 노노.
테니스는 생각만 해도 기력이 딸렸다. 테니스 근처에 가본 적도 없는데, 지금 레슨 받고 새로운 운동을 배우는 것은 무리다 싶었다. 테니스는 탈락.
골프는 배우다가 돈도, 시간도 아까워 때려치웠었다. 우울증 때문에 직장도 쉬고 있는데 골프 치러 다닌다 하면 남들이 좋게도 생각하겠다 싶었다. 그리고 골프는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니까 개피곤. 여러 사람 만나기 싫어. 기빨리니까. 골프도 탈락.
운동이라는 것을 하기는 해야겠다 싶었다. 모두가 앵무새처럼 외치는, "운동이라도 해라", "조금이라도 움직여라"를 하려면 돈을 내고, 어딘가에 등록하여 반강제 정기적으로 할 수 있는 운동이 필요했다.
필라테스? 공간이 답답해. 탈락.
복싱? 남자밖에 없을 것 같아. 탈락.
PT? 트레이너랑 말하기 싫어. 탈락.
다 탈락. 대체 마음에 드는 운동이 뭐냐.
그러다가 내가 운동을 해야 하는 주요 목적이 '집 밖으로 나가기'와 '씻기'에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지금 나는 씻지 않는 더러운 인간이므로. 그럼 뭐야, 사우나가 있는 곳으로 갈까?
오? 수영??
수영을 할까?
대학생 때 수영을 1년 넘게 배웠었다.
오리발을 끼고 중급반으로 넘어가자 팔 근육이 붙어 갑빠가 커졌다. 허벅지도 터질 듯이 땐땐해지고 종아리도 굵어졌다. 친구들이 조폭이 될 작정이냐고 놀렸다. 코스모스처럼 가녀려지고 싶었던 여대생은 김종국이 되기 전에 수영을 그만두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가녀린 여자가 될 필요도 없고, 마동석이 되어도 상관없었다.
수영을 다시 해보자. 그럼 씻기라도 하니까.
수영을 등록했다.
내가 다니는 수영장에 신규로 수영을 등록하려면 신규등록일 새벽에 오픈런을 해야 한다. 그때도 젖은 낙엽처럼 침대에만 붙어있었을 때였다. 그 정신에 새벽에 수영을 등록한답시고 어떻게 새벽 5시에 알람을 맞추고 일어나 집을 나섰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하지만 올해 가장 잘한 한 가지를 뽑자면, 이 날 새벽, 오픈런으로 수영을 등록한 일이다.
(들어보세요. 얼마나 잘한 일인지. ㅋㅋ)
수영복을 사야 했다.
수영복을 고르고 구경할 정신도 없었다. 예쁘고 화려한 수영복은 보지도 않았다. 내 기분과 실력에 딱 맞는 시커먼스 아레나 수영복으로 통일했다. 수모도 수경도 수영복도 시커먼스. 20년 만의 수영강습이라 튀지 않는 무난한 것으로 골랐다. 조금 더 다니다 보니 그 시커먼스 수영복은 "나는 수영을 잘 못하는 인간이오. 나는 수영 초보요." 하는 표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무슬림 수영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은 초급반에 초짜밖에 없다. 심지어 노출이 수줍은 초짜들은 올블랙 수영복은 기본 옵션이고, 팔도 달리고 다리도 달리고 목까지 올라오는 지퍼달린 수영복을 착용한다. (우리 수영장에는 없었지만 혹여나 있을 텃세쩌는 무서운 언니들에게 시기질투를 살 수 도 있으니, 분위기 파악을 위해서 처음에는 올검의 시커먼스 수영복장을 갖추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하다. 검은 수영복은 '저는 못해요~'하며 온몸으로 겸손을 내뿜는 좋은 도구가 된다. )
첫 수업날이 되었다.
애들 데리고 워터파크나 댕겼지, 제대로 된 수영강습은 진짜 딱 20년 만이었다. 워터파크에서는 구명조끼로 몸매를 가리고 둥둥 떠다니면서 파도나 탈 줄 알았다. 내가 접영이라는 것을 할 줄 안다는 사실은 기억 속에서만 존재했다. 오리도 날 수는 있다더라 하는 말과 비슷했다. 못해도 상관없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몸풀기로 25m 자유형을 돌았다.
와. 헉헉. 숨이 너무 찼다.
우울이 절정일 때였다. 온몸에 힘이 없고 느릿느릿 힘없이 해골처럼 걸어 다니고, 기력이 없어 손에서 휴대폰도 자주 떨어트릴 때였다. 그때의 몸풀기 자유형은 우울이라는 것이 시작된 후로, 단위시간당 가장 빠른 속도로 움직인 순간이었다.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빨리 움직여야 했다. 앞사람이 출발하면, 나도 재빨리 뒤따라 출발해야 했다. 뒷사람에게 따라 잡히지 않으려면 빨리 가야 했다.
걷기는 터덜터덜 할 수 있어도, 수영은 터덜터덜 할 수 없었다.
헬스나 필라테스였으면 자리에 뻗어 누웠을 텐데 수영은 누울 데도 없었다. 서서 내 순서를 기다리거나, 팔다리를 휘저을 뿐.
침대에 누워 은둔생활하던 나에게 수영은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20년 전에 배웠던 접영은 삭제되지 않았고, 자전거 타기처럼 몸이 그 방법을 기억해 냈다. 처음 온 애가 접영을 하는 것을 보고 원래 있던 언니들이 "수영 좀 배우다 오셨나 봐요, 접영 잘하시네요."라며 말을 걸어주기 시작했다. (접영 절대 잘하는 거 아님. 지금도 못 함.) 그러면서 나를 점점 앞 순서로 승진 시켜주더니 접영 어떻게 하는 거냐, 수영 언제 배웠었냐, 나는 평형이 앞으로 안 나가는데 어떻게 해야 되냐 물었다. 그러다가 몇 살이냐, 어디 사냐, 결혼했냐, 애는 있냐, 애들 영어학원 어디 다니냐 묻다가, 이 언니는 몇 년생이다, 나는 몇 살이고 저기 저 노란 수모가 젤 막내다 라며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말을 걸어주었다. 레일 끝에서의 그 짧은 대기시간 동안 초고밀도의 아줌마 토크가 진행되었다. 이것은 바로 내가 대학생 때 기겁했던 수영장 아줌마들의 호구조사 토크였다.
옹? 나 이거 옛날에 분명히 싫어했는데?
수영장에서 아줌마들이 개인적인 질문하는 거 완전 극혐이었는데?
그런데 오랜만에 활기찬 사람들이랑 이야기해서 그런지, 이 사람들한테는 내 우울 히스토리를 설명 안 해도 된다 싶어서 그랬는지, 나도 이제 영락없는 아줌마라 그런지, 이제는 그런 실없는 TMI 토크가 세상 재미있었다. 귀찮거나 무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친근하게 말 걸어주는 아줌마들이 고마웠다. 나도 안 우울한 척하며 질문도 하고 떠들어댔다.
수영 배운 지 2개월, 3개월 된 사람들 틈에 있으니 접영까지 할 줄 아는 나는 거의 마이클 펠프스 급의 대우를 받았다. 언니들은 자꾸 나더러 앞으로 가라며 순서를 양보했다. 심지어 나한테 "자기, 자기는 완전 물개다"라고까지 했다. 칭찬 잔뜩 듣고 "아잇, 아니에요~" 하는데 인상을 쓸 수 있나? 웃으면서 말해야지.
심지어 수영장에 강습받는 사람 중에는 인상 찡그린 사람이 없다. 그날 기분 안 좋은 사람은 수영장에 입장 자체를 안 할 것이다. 일단 수영장에 들어와서 수영복 갈아입고 수모, 수경 쓰고 물속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어떤 일정한 활기가 몸에 채워져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수영장에서는 다른 생각을 하기가 힘들다. 잡념을 머리에 넣고서는 수영을 할 수가 없다. 초짜들은 다들 음파음파 하며 뻣뻣한 발차기와 로봇 같은 손놀림을 하느라 정신이 없고, 좀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이번 주행은 팔을 더 뻗어봐야겠다, 머리를 더 빨리 빼봐야겠다 하는 다짐으로 25m를 달린다. 지치고 힘들어도 널브러져 있는 사람이 없다. 그저 힘들어도 그냥 한다. 숨이 차도 그냥 간다. 내가 가야 뒷사람도 온다. 그래서 그냥 간다.
초급반 제일 구석 레인에서 한 팔 접영도 겨우 하고 힘들어 헥헥 대며 쉬고 있을 때, 옆으로 펼쳐진 중상급반 레인에서 수십 명의 여성들이 동시에 접영을 하고 있는 광경을 보면, 찌릿찌릿하다. 이건 현장에서 직접 봐야 그 느낌을 알 수 있다. 올림픽에서 중계되는 한 레인에 한 명씩 들어가 있는 접영 경기와는 완전 느낌이 다르다. 에너제틱한 여자들이 만들어내는 접영파티. 장관이고, 대단하고, 존경스럽고, 멋있다.
그 접영파티를 보고 있다가, 스쳐 지나간 생각.
아. 여기, 수영장에는 우울증은 한 명도 없겠다.
매일 이렇게 수영하면, 있던 우울증도 도망가겠다.
우울증 있는 새끼들 병원 말고 여기로 다 끌고 와서 수영을 시켜야겠네.
누가 우울증은 수용성이라 했는가.
캬. 진짜 명언이다.
운동이 우울증에 왜 좋으냐, 뇌를 자극해서 호르몬이 나오고 그것이 신경계에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의사가 하는 이야기 들으면 된다. 말해 뭐 해. 좋겠지, 뭐.
내 생각에 "씻어야지", "나가야지" 이거 두 개만 시작하면, 우울증은 나을 수 있다. 거기에 "움직여야지"가 더해지면 더 희망적이다. 이 세 가지를 한방에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수영이다. 심지어 어쩌다 커피모임에 초대까지 받는다면 새로운 인간관계와 사회생활도 오픈된다.
나를 물개라고 불러주던 언니들이 마치고 커피 마시러 갈 건데, 할 일 없으면 같이 가자고 했다. 예전 같으면 기겁을 하고 안 갔을 텐데, 여기는 뭔가 긍정에너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바로 간다고 했다.
세상에. 이렇게 건전한 아줌마 모임은 처음이었다.
교육, 학원, 시댁, 명품, 부동산 같은 주제들은 밥상에 올라오지도 않는다.
심지어 자식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는 앓는 소리도 없다.
어느 수영장이 50m 레인이 있냐
이 수영장은 자유수영에서 오리발 써도 된다
접영에서 어떻게 해야 손바닥을 잘 뺄 수 있냐
오리발은 어떤 것이 좋으냐
요즘 MZ들이 하는 수경이 뭐냐
주말에 좋은 수영장 원정 뛰러 가자
이 얼마나 건설적이고 발전적인 대화의 주제들인가.
텃세 있을까 봐 걱정했는데, 이렇게 건강하고 밝은 사람들과 인연까지 맺어주니 참 감사한 일이다.
나는 가슴이 절벽이고 어깨가 넓다.
이것은 나의 신체적 콤플렉스이고 옷도 잘 골라입어야 한다. 그런데 수영복에 수모까지 딱 쓰고 수영장에 입장하기 전, 전신거울 앞에 서면 그 자태가 내가 봐도 좀 멋있다.
거의 중국 다이빙 국가대표다.
예전엔 미스코리아 같은 수영복 자태가 부러웠는데, 지금은 떡 벌어진 내 어깨가 참 마음에 든다. 실력과는 상관없이 수영을 엄청 잘하게 보인다. 겉으로는. 그래서 수영장에 들어갈 때마다 설레고, 조금 신난다. 우울한 쭈구리에서 벗어나는 느낌이 든다.
지금 가장 칭찬해주고 싶은 것은 대학 때 접영까지 배워둔 21살의 나 자신이다. 그때 배운 수영이 마흔 살의 우울증을 고쳐줄 줄 몰랐다. 너, 그때 수영 배워놓길 정말 잘했다. 칭찬해.
씻기라도 하겠지 싶어 시작한 수영이 나의 최애 운동이 되었다. 어렵게 찾은 최애 운동이 평생 운동이 되었으면 좋겠다.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상급레인에서 다이빙스타트 하는 할머니가 되어있겠지. 다이빙스타트 배울 때까지 오래오래 수영하려면 손톱부터 관절까지, 손끝하나 다치지 않게 몸뚱아리를 잘 간수해야겠다.
내 정신도, 몸도, 수영도 소중하니까!!
+ 내 인생 망치는 새끼들은 가만두지 마요
+ 마음의 다리미를 찾아 떠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