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칠의 말
( 여러나라의 비참과 치욕 https://brunch.co.kr/@sonsson/27 )
영국의 역사는 로마의 정복으로부터 시작된다. 처칠의 말이다. 나라의 첫 페이지를 식민지의 역사로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 섬은 BC 6천 년경 대륙에서 분리되었으며, 유럽의 해안에서 여러 부족들이 건너오고, 스톤헨지가 세워지고, BC 8세기 무렵부터 켈트족이 등장한다. 기원전 55년 율리우스 카이사가 2만명의 병력으로 브리튼을 공격하여 복속시켰고, 당시 잉글랜드 지역은 제대로 자리 잡힌 왕국과 정치세력이라기 보다는 여러 부족의 연맹체가 존재하고 있는 곳이었다. 잉글랜드는 카이사르 이후 100여 년 간 명목상 로마에 복속된 상태였고, 기원후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 5만명에 달하는 군대에 의해 다시 한 번 본격적인 정복을 당하게 된다.
로마 세력은 잉글랜드와 웨일즈 지방에 대한 정복을 끝내고 칼레도니아와의 경계선에 하드리아누스 장벽을 세우게 된다. 스코틀랜드는 끝까지 로마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었고, 이후 1707년이 되어서야 동군연합 관계였던 잉글랜드 왕국과 통합하게 된다.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의 핵심 중추 지역인 잉글랜드에는 로마군이 기원후 410년까지 주둔하였다. 이후 원주민이라고 할 브리튼인들은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지방의 픽트족과 스코트족으로 부터 지속적 침략을 받게 되고, 유럽 본토로부터 앵글로색슨 족을 용병이자 이주민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계속 바다를 건너오게 되는 앵글로색슨 족과 기존의 원주 세력 간의 갈등이 커지며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고, 마침내 원주민이라고 할 켈트족 위주의 브리튼인들은 게르만족의 일파였던 앵글로색슨족에 패배하게 된다. 이들 켈트족은 앵글로색슨족의 지배를 받아들이거나 스코틀랜드나 웨일즈 지방으로 피신하게 된다.
8세기에서 9세기에 걸친 시기에는 브리튼 섬으로 바이킹이 침략해 왔다. 자신들도 이주민들이었던 앵글로색슨족의 일곱 개 왕국은 큰 피해를 입었고, 웨식스 왕국에 의해 간신히 명맥이 유지되었다. 정복과 혼란의 시기를 지나 10세기가 되어서야 최초로 통일된 잉글랜드 왕국이 등장한다. 11세기 초반에는 다시 덴마크의 데인족의 침략으로 일시 정복당하게 되고, 11세 후반에는 바이킹족의 후예였던 프랑스 노르만공국의 공격으로 잉글랜드 왕이 전사하고 노르만 왕조가 열린다.
이후 앵글로색슨 계통과 프랑스 계통의 언어적, 문화적, 계급적 갈등이 표출된다. 잉글랜드의 노르만 왕조는 바다 건너 영지에 대한 귀속권을 두고 프랑스와 백년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런 과정을 겪고 나서야 영국과 유럽 대륙과의 국경선이 분명히 그어지는 셈이 되었다. 백년전쟁 당시 영국은 프랑스 인구수의 1/5밖에 되지 않았고, 문화적 경제적으로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후진국이었지만, 게릴라적인 약탈과 방화 등의 방식으로 프랑스를 괴롭힐 수 있었다.
영국은 로마의 식민지로 출발하여 앵글로색슨족과 바이킹족과 데인족과 노르만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으며, 프랑스에 의해 언어적 문화적 침탈이자 세례를 당하게 되었다. 영국의 해양에서의 명예는 포르투갈과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지나간 길을 따라가며 앞선 자들을 괴롭히고, 약 올리고, 속이고, 공격하고, 모방하면서 자기의 몫을 챙기는 방식의 결과물이었다.
이미 확고히 잡리잡힌 식민 정부는 본격적으로 건드리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나중에 발견되거나 쓸모가 없어 보이는 땅을 차지하고, 구대륙의 안정된 지역에서는 조그만 항구의 더부살이로 시작하여 주위를 점차 포섭 확대해나가고, 마침내 엔진의 거대한 생산력과 기관총의 무차별적인 1대 100의 살상력을 바탕으로 제국의 토대를 닦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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