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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단근 Jun 24. 2024

밥솥을 사랑한 삼식이

저녁을 먹고 나서 아내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당신을 성공한 남자로 만들어 줄게”

“로또라도 당첨됐나!”

“돈은 많이 벌 수 없지만, 당신이 평생 놀아도 밥상은 차려줄게”

“됐네! 이 사람아!”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늙어서도 날 챙겨주겠다는 속마음이 고마웠다.

출세와는 거리가 먼 가장이지만, 내 생애 최고의 성공이 아니겠는가!

맞벌이하는 아내가 아침을 준비하는 건 힘든 집안일이다.

나는 아침밥 대신 깊이 잠든 그녀의 아침잠을 지켜주고 싶어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현관을 나갔다.

     

부부는 식사 준비와 잠자리 마련과 집안일로 서로 싸운다.

그중에 제일은 끼니 전쟁이다.

마님의 한숨을 살펴보자.

한국인의 힘은 밥심에서 나온다는 쪼잔한 남편의 타령이 지겹다.

허기를 채우려고 나랑 결혼한 것은 아니잖아!

밥통이 아우성치면 당신이 밥하지!

그것도 귀찮으면 햇반을 돌려먹어라.

꼬박꼬박 끼니를 챙겨달라는 삼식이가 인생 말년에 졸혼을 당한다는 뉴스도 못 봤냐.

자꾸 그러면 나도 당신이 늙으면 오래 먹을 수 있는 곰국 끓이고 친구들이랑 놀러 갈 거야.

     

이제 삼식이의 변명을 들어보자.

오늘도 정글에서 생존하느라 간과 쓸개가 다 문드러졌다.

창자마저 빼주고 나니, 금세 허기가 찼다.

치사해서 당장이라도 일을 때려치우고 싶지만, 토끼 같은 자식과 여우 같은 마누라를 떠올리면서 참는다.

집에 와서 토끼를 돌보는데 그깟 밥해주는 게 그렇게 힘드냐!

울 엄마는 아무리 늦게 와도 식사를 준비했다.

큰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좀 챙겨주라.

     

밥이 진짜 불만일까? 겉으로 드러난 불만일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자기를 과대평가하고 자기중심적인 나르시시즘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남편은 회사에서 혀가 빠지도록 일한 자기의 노고는 잘 알지만, 보이지 않는 아내의 수고는 잘 몰랐다.

그는 하루 내내 집안일하고 허리가 아파서 잠시 소파에 기댄 그녀가 온종일 놀고먹는다고 미워했다.

그런 일이 쌓이니, 식사를 핑계로 불만을 표시한 것은 아닐까.

      

부부 사이는 말하지 않아도 연결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말은 입 바깥으로 나오기 전까지 원하는 바를 알 수 없다.

상대방이 무엇이 필요한지 실타래 풀 듯 차근차근 풀자.

죽이 잘 맞는 날을 택해라.

이야기는 나로 시작하라.

그런 다음 단짝의 얘기를 들어라.

“당신의 기분은 그렇구나”라고 호응하자.

대화하면서 서로가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조금씩 깨닫는다.

자신의 무지를 깨달은 소크라테스는 4대 성인이 되었다. 

    

오늘도 우렁각시가 “저녁에 뭐 해줄까”라고 전화했다.

“멸치랑 김치만 있어도 돼. 당신이 최고의 반찬이잖아”

나는 입바른 거짓말을 했다.

집사람의 정성에 감사하고 낮은 자리로 임하라.

그러면 맛있는 고기반찬을 먹을 수 있다.

밥하는 기계가 고장이 나면 제일 비싼 밥솥을 사주라.

각시가 아프면 반드시 밖에서 먹고 오고.

때론 그녀를 위해 밥을 차려주라.

밥은 누군가 해줄 때 맛있다.

삼식이가 밥솥만 사랑할 수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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