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인가?
현관문을 여니, 낯선 동물과 눈이 마주쳤다.
고양이는 경계심을 보이며, 집사람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아내에게 웬 냥이냐고 물었다.
동생이 없던 딸이 애완동물을 기르고 싶다고 졸랐는데, 마침 사촌 처제가 기르던 고양이를 준다고 해서 집으로 데려왔단다.
딸은 복스러운 흰털을 가진 녀석이 마음에 들었는지 백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백이가 우리 집에 왔을 때, 내 월급이 얼마 안 되어 녀석에게 먹이를 풍족하게 사줄 형편이 안 되었다.
그래서 제일 싼 사료를 먹이고, 간식으로 손질하고 남은 멸치 대가리를 주었다.
생활비도 빠듯한데, 반려동물에게 돈을 쓰니 나는 괜히 심술이 났다.
결재 문서에 딸려 온 이면지처럼 불편한 동거인이 미웠다.
민원 업무로 스트레스를 받던 때라 적당한 화풀이 상대가 필요했다.
술을 먹은 날, 녀석의 앞발을 잡고 강제로 춤을 추도록 만들었다.
아이는 “아빠! 그러지 마세요”라고 말리기 일쑤였다.
불편한 동거생활이 얼마나 지났을까?
퇴근하고 오니 고양이의 눈은 누렇게 달아올랐고, 눈꺼풀은 연신 감기고 있었다.
비릿한 냄새와 함께 방전된 자동차 배터리처럼 가냘프게 숨을 쉬었다.
안사람은 곧 죽는다며 자연스럽게 보내주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녀석이 덜컹 죽을까 봐 겁이 나서, 동물병원으로 데려갔다.
병실에서 하룻밤을 지냈으나, 수의사는 수명이 다했다며 다시 데려가라고 했다.
체온이 식어가는 백이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몇 번 헐떡이더니 이내 정적이 흘렀다.
예고된 이별을 아는지 집사람과 아이는 훌쩍였으나, 나는 통곡했다.
“엉~엉”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내 얼굴을 타고 흘렀다.
다 큰 어른의 울음소리에 모녀는 되려 놀라는 표정이었다.
시중에 떠도는 이야기에 따르면 “남자는 태어날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라를 잃었을 때 세 번만 운다”라고 말했다.
‘누가 그런 허튼소리를 했지’라면서 내 감정에 충실해 목 놓아 울었다.
나는 왜 그렇게 슬펐을까?
녀석은 싸구려 사료에도 행복했고, 멸치 한 마리에도 감사해하면서 편히 천국으로 갔다.
반대로 나는 ‘백이가 쉽게 죽지 않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겠지’라고 안심했다.
그리고 맛있는 간식도 한 번 못 사주고 괴롭혔던 것이 후회되었다.
죽어가는 애완동물은 구석에 숨는 경향이 있다.
그 동물처럼 인간은 슬픔을 감추려고 감정을 꽁꽁 싸맸다.
슬픔이 와도 수도꼭지를 잠그듯 억누를수록 우울은 앙금으로 굳는다.
건강할 때는 쉽게 감정의 배관이 터지지 않지만, 번 아웃이 찾아오면 수도관 전체가 터져 손 쓸 수 없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가?
램지재단의 빌 프레이 박사는 “감정에 북받쳐 우는 눈물은 나쁜 물질을 배출하므로 여성의 85%, 남성의 73%가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라고 밝혔다.
예를 들면 다이애나 왕비가 교통사고로 숨지자, 영국 국민은 눈물바다에 빠졌다.
놀랍게도 그해 영국의 정신병 환자는 절반으로 감소했다.
슬픔은 웃는 얼굴 속에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슬픔이 역병처럼 창궐한 날이 오면 차라리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라.
그곳에서 감정에 충실한 눈물을 흘릴수록 상처 난 영혼을 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