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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단근 Aug 26. 2024

겨울과 이별해야만 봄이 온다

서류 더미를 파쇄기에 갈아 넣는다. 

윙~하면서 사정없이 밀어 넣을 때 ‘끝났어’라는 안도가 몰려왔다.

의자에 앉아서 마지막 타이핑을 하려는 순간 최종본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 갔더라!’ 이곳저곳을 뒤져도 발이 달려 도망간 녀석을 찾을 수 없다. 

파쇄기 함에서 갈기갈기 찢긴 문서를 찾은 후 헤어진 이가 떠올랐다. 

    

인연이 끝난 이는 행과 열이 헝클어진 용지와 같다.

이미 버려야 할 휴지가 되었는데 그래도 되돌아보는 건 그동안 들인 노력과 아련한 추억 때문이다.

포기할 수 없는 익숙함 때문에 끝난 인연을 놓아주지 못하고 있다.

나를 품어줄 더 큰 종이를 고르면 문제가 풀릴 것 같아, 이별 뒤에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이를 만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종이는 종이일 뿐이다.

구원은 연필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연필로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 낙서장이 될 수도 있고, 명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별이 힘든 건 두려움이다.

나 때문에 헤어짐이 시작되었지 않았을까.

나 홀로 남겨지지 않을까.

‘나 혼자서 헤쳐 나갈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

두려움의 끝에는 내가 상대방을 완전히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 것은 아닐까.

완전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으나, 불안한 건 당신의 사랑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헤어짐이 두렵다고 떠나간 버스에 매달리면 자신이 다치기 쉽다.

당신은 노선이 맞지 않는 차편을 탔고, 올바른 목적지를 가려고 중도에 하차했을 뿐이다.

참고 기다리면 다음번에 당신과 맞는 인연이 올 것이다.

중간에 내린 버스가 결이 맞으면 어떤 형태라도 회귀할 것이다. 

     

사랑은 운명의 장난으로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다.

이때는 충분히 좌절하자.

자아가 없어질 만큼 쪼개지고, 가루가 되도록 까여야 상처를 보듬을 수 있다.

인간은 상처받는 것이 취미였다.

취미가 아픔을 극복할 수 있는 특기로 바뀌려면 충분히 무르익은 절망이 필요하다.

     

때론 헤어짐에 솔직할 필요가 있다.

아쉬워하는 마음의 뒷면에 꿈틀거리는 욕망을 보라.

서로 맞지 않으면서도 오래 참았다.

연인과 판에 박힌 생활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구에 충실하도록 좋은 끝맺음이 필요하다.

머리와 가슴은 다르므로 아쉬운 순간이 다가올 것이다.

깔끔한 결별이 힘든 건 상대방에게 모질게 굴지 못하는 당신의 선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급하게 마무리하면 마음이 넘어질 수 있으므로 날을 정해 서서히 이별 졸업식을 거행하라.

애정이 깃든 물건을 정리하는 행사를 열어 미련을 놓아주자.

세월이 약이 되지 못하거든 추억의 장소를 가서 애도하라.

한때 좋았던 공간은 당신이 상상했던 모습과 다르다. 

    

아픈 이별은 쉬이 잊어야 한다.

슬픈 이별은 파묻어야 한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없다.

옛사랑을 놓아주어야 새로운 이를 좋아할 수 있다.

겨울과 이별해야만 봄이 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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