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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난 Mar 27. 2023

이른 퇴직자의 기쁨

별게 다 기쁘고 난리-

마지막 퇴근 이후 석 달이 지났다.


1년의 고민 끝에 의원면직을 하긴 했지만 '안정적인 정년보장, 공무원 연금 수급'이라는 절대적인 장점을 가진 공무원을 그만두면서 약간의 두려움은 있었다.


그만둔 게 후회되면 어쩌지?



그때는 퇴직 후 내가 후회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후회를 한다고 해도 간절히 그만두고 싶던 마음을 접을 수 없었다.

그만두고 난 후, 다행스럽게도(?) 단 한순간도 그만둔 게 후회되지 않았다.


석 달간 제일 많이 한 생각은, '출근도 안 하는데 왜 이렇게 바쁘지?'였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고 매일매일 정신이 없어서 정신 차리고 보니 벌써 그만둔 지도 3달째인 상황.


1,2월은 아이 방학이라서 온전히 아이와 시간을 보냈다.


어린이집에 다닐 땐 뭘 모르니 그냥 엄마가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면 가는 건가 보다, 데리러 오면 집에 오는 건가보다 했던 아이는 초등학생이 되자 학기와 방학을 기가 막히게 구분하기 시작했다.


"엄마, 나는 왜 방학인데 학교를 가야 돼? 나도 방학땐 집에 있고 싶어."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돌봄교실에 가야 한다고 아이를 어르고 달래서 보내곤 했는데 이번 방학은 아이가 원했던 대로 '집에서' 보낼 수 있었다. 아이와 함께 원 없이.

늦잠도 맘껏 잤다. 옆동네 도서관으로 원정을 가기도 하고, 전시회도 가고, 평일 낮에 패밀리레스토랑에 다녀왔다. 뒹굴뒹굴 집에서 놀다가 눈이 오면 완전무장하고 뛰쳐나가서 눈사람도 만들고 썰매도 탔다.(썰매를 끌었다;;;)


엄마들이 '애들 방학이 너무 힘들다. 빨리 개학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알게 됐다. 나는 그간의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이번엔 감사해하며 아이의 방학을 함께했지만 몇 주 못 가서 '이 정도면 그냥 출근하는 게 낫겠는데?'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솔직히 일하는 것보다 아이 키우는 게 힘들고, 워킹맘이 더 힘든 건 일과 육아를 병행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1,2월은 학교 행정실의 업무성수기 기간이기 때문에 항상 정신없이 콩 볶듯이 매일을 보냈고 아이의 겨울방학이라고 여유롭게 휴가를 쓰기는 어려웠었다. 이번 겨울엔 맘 편히 여행도 다니고 스키장도 몇 차례 다녀왔다. 긴급하게 걸려오는 전화가 없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할 일인가 싶었다.


3월이 되고 아이가 개학을 하면서 나는 두 팔 벌려 만세를 불렀다.

'드디어! 내가 꿈꾸던 자유~!!'


도서관과 지역평생교육센터에서 하는 강연을 신청해서 수업을 들었는데 성적을 위한 공부, 취업을 위한 공부, 공시공부, 직무 관련 연수 말고 '내가 관심 있는 수업을 결과에 대한 부담 없이' 듣는 것이 얼마나 만족스럽던지...


일상스케치 드로잉 수업을 들으며 고등학교 이후로 처음 미술도구를 사용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너무 재미있다. 수행평가 아닌 그림 그리기는 20년 만의 처음인 듯싶기도 하고 그림 그리는 행위자체에서 느껴지는 마음의 이완과 치유가 있다.


독서토론리더양성과정 수업을 수강하며 지금까지 내가 좋아하는 취미였던 독서의 영역이 여러 방향으로 확장되는 것을 느꼈고 이래서 배움이 중요하고 편견을 깨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동안 책은 내가 좋아하는 걸 읽는 거지, 무슨 일부러 의도적으로 책을 정해서 같이 읽고 토론을 하냐고 생각했었다. 나는 책을 편독하는 편이다.)


1월부터 영어공부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매일 꾸준히 하고 있다. 괜찮은 영어회화 어플을 결제해서 쓰니 돈 아까워서라도 꾸준히 하게 된다. 내 영어공부의 목적은 간단한 의사소통 및 원서 읽기이다. 50살 정도엔 해외여행 가서 어려움 없이 의사소통을 하고 싶고, 좋은 책은 번역서 말고 원서로 읽고 싶다는 바람이 있어서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영어공부를 하고 싶었다. 시작하고 보니 전혀 늦기는커녕 딱 시기적절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고 도서관을 애정한다.

평일 낮에 도서관에 앉아있으면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을 느낀다.

내 하루가 평화롭고 충만해진다. 집에선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많아서(해야 할 집안일이 어찌나 많은지) 책이 눈에 잘 안 들어오는데 도서관에선 집중하면 하루 이틀에 한 권은 읽을 수 있다.

틈틈이 글을 쓴다. 원래는 비공개로 혼자 보는 글을 많이 썼는데 브런치와 블로그를 하면서 공감과 댓글이 주는 기쁨이 알게 되어 요즘은 가급적 공개글을 쓴다. 댓글을 여러 번 읽고 글을 쓰며 유의할 것들을 생각해보고 있다.


매일 동네 뒷산에 오른다. 정상 찍고 내려오면 왕복 1시간이다. 내 호흡에 맞춰 천천히 올라갔다가 천천히 내려오면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한다. 나이 먹었는지 나무의 새순과 꽃봉오리가 너무 이뻐서 사진 찍기 바쁘다. 어머니들의 카톡 프로필이 왜 다 꽃인지 알게 되는 나이가 되었나 보다.


면직하면서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방학이라 다 미뤄왔던 터라 아이의 개학과 함께 백수엄마의 화려한 외출이 시작되었다. 브런치 카페 도장 깨기 하는 기분이다.


나의 이른 퇴직의 수혜자가 한 명 더 있었으니 바로 아들.

그동안 엄마의 퇴근 스케줄에 맞춰 돌봄교실과 학원을 뺑뺑이 하던 아들은 자유시간을 얻었고 그 자유시간에 놀이터에 입성했다.

우리 아들은 초4가 되도록 혼자 놀이터에서 놀아본 적이 없었다.

내 퇴근시간까지는 돌봄교실에 있거나 학원을 다녀와서 나와 만나면 바로 집에 와서 저녁시간을 보냈다.

친구와 노는 것은 돌봄교실에서나 가끔 집에 초대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랬던 아들은 요즘 수업이 끝나면 곧장 놀이터에 가서 친구들과 논다. 놀다가 방과후수업을 가기도 하고 수업이 없는 날은 해질 때까지 놀기도 한다. 그동안 내가 용돈을 주지 않아서(용돈을 줄 필요가 없었다. 혼자 돈 쓸 일이 없었으니.) 혼자 돈을 쓴 경험이 없었는데 지난주 처음으로 동네 알뜰장에서 소떡소떡을 친구와 사 먹었고, 그 이후에는 매일 슈퍼와 편의점에서 간식거리 플렉스를 하고 있다.

조금 자제시켜야 할 것도 같은데 아직은 엄마도 아이도 놀이터라이프에 신나서 적응 중이라(아이는 친구랑 놀아서 좋고, 엄마는 자유시간이 늘어서 좋고) 당분간은 이 생활이 이어질 것 같다.


백수가 되면서 매달 꼬박 들어오던 월급을 잃었고, 시간을 얻었다.

예전엔 막연히 평일 낮에 여행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백수가 되었어도 아이의 학교 때문에 마냥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여행을 가지 않아도 나의 일상이 편안하고 충만함을 자주 느낀다.

누구를 미워하고 업무에 화가 나고 불합리에 분노하지 않아도 하루를 보낼 수 있어서 감사하다.


의원면직을 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다시 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면직을 제일 망설였던 이유 중 하나도 그만두고 뭐 하면서 먹고살지에 대한 걱정이었는데 그만두고 나니 도전해보고 싶은 일도 계속 생기고 하고 싶은 일, 경험하고 싶은 일들이 자꾸 늘어간다.

원래는 생각만 많고 실행력이 부족한 편인데 요즘은 우선 시작해 본다.


쉴 새 없이 머리를 쪼아대던 편두통이 사라지고 순간순간 심장이 벌렁벌렁 터질 것 같던 증상도 없어졌다.

많이 쉬고, 많이 걷고, 많이 웃으며 그렇게 하루를 살고 있다.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너무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가며 꾸역꾸역 참으며 살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살면서 한번쯤은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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