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이라는 이름의 무게

독한PD 에세이

by 독한PD

2019.12.18


나는 지금 방송 프로그램 편집 작업 중이다.


잠시 이어폰을 귀에서 뗀다. 키보드를 탁탁 치는 소리와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가 서로 리듬을 타며 랩을 한다.


지금 시각 새벽 2시.

고요한 사무실 안 PD 3명이 각각의 모니터를 뚫을듯한 기세로 쳐다보고 있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드는 것일까? 12년째 방송 제작 일을 해왔다. 편집하며 촬영된 촬영 파일을 수백 번씩 보느라 눈이 쉽게 건조해진다. 안구건조증이다.

그래서 인공 눈물은 필수다. 감정의 눈물이 아닌 인위적인 눈물을 얼마나 많이 흘려야 이번 작업이 끝이 날까?

'커피'도 편집할 때는 내 유일한 짝꿍이다. 다른 PD들은 '담배'라는 짝꿍도 있지만 난 건강을 위해 그 녀석과 과감하게 절교했다. 오래도록 이 일을 하고 싶어서다. 그래서 편집할 때는 '커피'라는 친구가 있어야 그나마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편집은 영상으로 스토리를 만드는 작업이다. 단순하게 영상을 자르고 붙이는 것이 아니라 '구성'과 '영상 문법'이라는 장치를 이용해 무에서 유로 창작을 하는 작업이다.


PD의 애환은 홀로 편집 작업을 하는 '고독한 시간'에 있다. 수일을 밤을 새우며 창작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 어느 책에서 프로그램 한 편이 나오기까지 많은 PD들은 산고의 고통을 느낀다고 했다. 그렇게 고통으로 완성된 방송본은 내 '새끼'만큼이나 소중한 것이다.며칠씩 잠 못 자고 편집하다 화장실에서 내 모습을 거울로 볼 때면 안쓰러움은 물론 어떨 때는 불쌍해보인다.


PD는 아이템 기획부터 촬영 편집 후반작업 그리고 방송에 나갈 때 까지 전부 관여한다. 그래서일까? 프로그램 말미에 나오는 스텝 스크롤에 가장 마지막에 이름이 나간다.


'연출'이라는 이름으로.



마지막에 이름이 나간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 프로그램이 TV로 방송에 나갈 때까지 책임지는 사람이며 그 힘든 과정의 무게를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생해서 제작한 프로그램이 TV로 방송이 나갈 때 힘들었던 시간들은 전부 눈 녹듯이 사라진다. 내가 제작한 방송으로 많은 사람들이 본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큰 보람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내가 참여한 프로그램은 꼭 TV로 온에어로 시청하고 그 순간을 마음껏 즐긴다. 이렇게 끊을 수 없는 '방송의 맛' 때문에 지금까지도 프로그램 제작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밑에 글은 내 페이스북에 2014년에 <EBS 글로벌 프로젝트 나눔> 프로그램 몽골 편을 제작하며 느낀 감정을 적어놓은 글이다.



[고생고생해서 만든 방송이 내일 전파를 탑니다.

저에게 새로운 프로그램으로써

첫 방송이기에 주인공 모녀가 더욱더 애정이 갑니다.

어려운 현장이었지만, 내 감정을 TV라는 매체로 공유하기에 이 보람으로 방송일을 하지 않나 봅니다.

비록 저 먼 땅에서 어렵게 삶을 이어가지만,

방송을 통해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삶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았으면 합니다.]


당시 몽골에서 <쓰레기 마을에 사는 엄마와 딸>편을 제작을 했었고 내가 담은 영상이 편집이 되고 한 편의 스토리가 되어 EBS에 방송이 됐다.



나는 내가 제작한 프로그램이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고 시청자들과도 많은 소통을 하고 싶다. 내가 겪었던 촬영 비하인드스토리도 들려주고 싶고 한 편의 방송이 어떻게 제작되는지도 알려주고 싶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있었기에 나는 예전에 내가 제작했던 프로그램 방송파일들을 외장 하드에 차곡차곡 모아두고 있다. 언젠가 많은 사람들에게 이 방송본들을 낡고 오래된 일기장처럼 꺼내 보여주며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강연이나 강의를 통해 들려줄 것이다.


앞으로도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힘든 순간들이 많겠지만, 나는 이 과정을 누구보다 더 사랑해보려고 한다. 12년 동안 쭉 이어졌던 내 삶이 아니던가? 내가 사랑해주지 않으면 누가 사랑해주겠는가? 평범한 하루가 쌓여 특별한 삶이 된다는 걸 아는 사람은 '기록'의 힘을 안다. 그렇기에 나 역시도 바쁜 일상 속에서도 블로그든 유튜브든 기록을 하려는 이유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오늘 하루의 이야기.

'연출'이라는 이름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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