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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다 Jan 03. 2020

08. 수면장애가 나에게 미친 영향 - 3

수면장애와 학습의 어려움

중학생 때부터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양변기에 앉으면서 생각했다.

변기 앞 세면대에 머리를 박으면 어떻게 하지? 

일 보다가 잠들면 크게 다칠까?

이런 것이 걱정되는 사람이 나 말고도 있을까?



기절하듯 잠든다는 것을 아무리 설명해도 공감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한 방어를 할 사이 없이 잠든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했다. 잠이 오면 책상 위에 엎드리거나 침대에 누워 자면 되지 않냐고. 왜 변기에서 잠이 들 거라고 생각하냐고.


학창 시절 수업 시간은 수면 시간과 같았다. 대놓고 자는 것이 아니라 손등에 핏줄이 터지게 꼬집으며 견뎌보아도 기절하듯 쓰러지는 것이었다. 견디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았다.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헤드뱅잉형인데 용케 넘어지지는 않는다고 했다. 같은 반이었던 한 친구는 대학 입학 후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자신이 잠이 올 때면 옆을 쳐다보고 잠을 쫓았다고 했다. 내가 나란히 앉은 애들 앞뒤로 이리저리 머리를 흔들며 자고 있는 모습이 너무 웃겼다고 했다.

어떨 때는 1교시에 잠들어 청소시간에 깨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도시락을 싸서 다녔고, 그래서 쉬는 시간에 먹어버리고 점심시간에 공부하기도 했기에 친구들이 의심 없이 깨우지 않은 탓이었다. 한 번에 3~4시간을 자는 일이 잦았다. 워낙 잦아서 그런지, 깨어있을 때에는 범생이로 살아서 그런지 선생님들께서 크게 야단을 치지 않으셨다.

이 증상은 가끔 수업 중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이마를 책상 위에 박는 것으로 나타났다. 잠 오는 순간이 없으니 팔을 받칠 시간이 없어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나마 중고등학교는 학급 친구들만 이 현상을 목격하니 덜 부끄러웠으나 대학을 들어가서는 달랐다. 일반 물리를 수강할 때 강당이 매우 컸다. 하루는 수강 중 갑자기 "꽝" 소리를 내며 나무 책상에 부딪혀서 모두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날따라 맨 뒤에 앉아있던 나는 누가 그랬냐는 듯 같이 두리번거리는 척했다. 이런 현상은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된 후 연수를 받는 중에도 가끔 나타났다. 40대가 되면서는 연수 중 잠이 오는 증상이 많이 줄었다.


분명 스트레스와 연관이 있어 보였다. 과학, 정치경제, 한문, 예체능 시간만 잠들지 않았으며, 수학, 국어 시간에는 비몽사몽 하였고, 나머지 모든 교과 시간에는 다 잠들었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과학 관련 책을 좋아했는데 그래서인지 모두 다 잠드는 물리 시간에는 혼자 깨어서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하고 필기 틀리신 곳을 알려드리는 놀라운 일도 했었다. 하지만 대부분 교과는 인사 후 곧 잠들었다. 고1 때는 담임인 수학 선생님께서 보시기 너무나 안타까웠는지 "그냥 자도 돼." 말씀까지 해주셨다. 영어는 정말 열심히 필기하고 싶었는데 노트에는 항상 지렁이가 기어갔다. 아침 자습 시간에 영어 듣기를 하면 늘 잠이 들었다. 이 습관 같은 잠들기는 수능 시험에서도 힘을 발휘했다. 3교시 영어 시간이었다. 순간적으로 잠이 들어 듣기 2문제를 놓쳤다. 일반 문제들도 풀다 깨다를 반복해야 했다. 그해 수능은 영어가 어려웠다. 모두 성적이 낮았기에 상대적으로 이득을 보게 되었다. 4년제 대학 나온 사람 치고 영어 어휘가 엄청나게 모자라 입학 후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공부하다 보면 어느새 졸고 있었다. 하교 후 집이나 독서실에 가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오후 10시가 넘어가면 책상 위에서 공부가 힘들었다. 거의 매일 마지막 시계를 본 지 1~3시간이 지나서 잠이 깨어보면 팔을 받치지도 못하고 잠든 바람에 안경 안쪽에 나의 감긴 눈 자국이 얼룩으로 남아있었다. 안경 코받침은 납작해져 있고 콧등은 코받침에 눌려서 아팠다. 안경은 찌그러져서 초점이 맞지 않아 다리와 코받침을 펴서 조절을 해야 했다. 거의 매일 이런 일이 반복된 덕에 안경 수리 능력이 꽤 좋았다.


임용 준비를 하던 시절에는 매일 대학 도서관에 갔다. 공부를 하려면 잠을 깨어야 했으므로 자판기 커피를 자주 마셨다. 집중 시간이 짧을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은 커피가 마시고 싶으면 나에게 왔다. 나 외의 친구들은 집중 시간이 길었고, 공부 주기를 방해받을 수 있었으나, 나는 커피를 매일 5잔 이상 마셔도 밤에 잘 잘 수 있었고, 자주 쉬었기 때문이었다. 잠이 무시로 쏟아져서 자주 일어나 걸으며 휴식을 취해야 했다. 나의 도서관 필수 준비물은 두툼한 휴대용 티슈 봉지였다. 요즘은 환경을 위해 종이 곽으로 나오는 것 같은데 당시에는 가로 15, 세로 10, 높이 1~2 센티미터 정도의 비닐에 든 휴대용 티슈를 팔았다. 잠이 쏟아질 때 손등 위에 이마를 대고 자면 이마가 붉어졌다. 소매를 대고 자도 옷의 재봉이나 천자국이 그대로 이마에 찍혔다. 한 번 자면 기본 1~2시간은 잠드는 나에게 이마에 자국이 남지 않는 나만의 팁이 있었다. 손등 위에 휴대용 티슈 봉지를 두고 그 위에 티슈 한 장을 깔고 이마를 대고 자면 자국이 거의 남지 않았다. 자고 싶을 때 눈치 보지 않고 잘 수 있는 임용 준비 기간에 작성한 노트는 생애 처음으로 침 자국이 없었다.



나는 독립을 원했고, 독립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직업이 있어야 된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손이 둔해 아르바이트나 장사를 할 수 없었고, 눈치와 배짱도 없는 편이라 사업도 안될 것 같았다. 결국 취직이 답이고, 그러려면 대학을 가야 했고, 공부해서 성적을 받아야 했다. 깨어 있는 시간에는 되도록 공부를 열심히 했다. 물론 만화도 보고 낙서도 하고 딴짓도 꽤 했지만 그 정도의 휴식을 갖지 않고 공부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수학을 좋아했지만 잠은 나의 수학 실력을 결국 꺾었다. 영어는 바닥이었다.

결국 원하던 곳에 가지는 못했지만 매일같이 과학에 대해서 얘기하고, 과학책만 읽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직업인 과학 교사를 하게 되었다. 과학을 좋아하던 나로서는 선방한 셈이었다.

버티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나는 버텼다.

이기진 못했지만 지지도 않았다.



내가 클 때에는 수면클리닉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얼마 전에 지나가는 말처럼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저 잠이 그렇게 많을 때 왜 정신과 같은 곳에 데려가 보지 않으셨어요?"

"그런 생각을 못했지. 그냥 잠이 많은 줄 알았지."

하긴 그 당시에 병원을 갔었다면 생리통 때문에 병원 갔을 때처럼 아무 이상 없다는 말을 듣고 더 실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혹시 이런 증상이 있다면 수면 클리닉에 가보는 것을 강력히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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