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 년 전에 직장 동료들과 24절기가 양력인가 음력인가 하는 것에 대해 논쟁이 붙었고, 마침내는 틀리는 사람이 저녁밥을 사는 것으로 하는 내기를 했었다.
24절기는 중국의 역법에서 유래하여 전해진 것이니 달의 운행을 기준으로 하는 음력이겠거니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24절기는 태양의 황도 상 위치에 따라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양력이라고 봐야 한다.
음력을 기준으로 정해지는 설날과 추석은 양력의 캘린더로 보면 매년 날짜가 달라져서 혹시나 토요일이나 일요일과 겹치는지 안 겹치는지를 따져보게 되는데, 24절기는 해마다 대부분 같은 날짜에 반복적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이런 점을 생각해서 눈치껏 양력을 주장했고 그 덕에 내기에서 이길 수는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24절기를 음력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었다.
24절기의 하나인 '소설(小雪)'은 입동(立冬)과 대설(大雪) 사이에 위치하여 첫눈이 내리는 시기로 설명된다. 첫눈이라는 낭만적인 이벤트와 함께 소개되는 절기라서 인지 왠지 운치가 있는 시기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매년 11월 22일(가끔은 11월 23일)이 되면 소설을 맞게 되고 첫눈이 내리는 것을 기대하게 되지만, 강원 산간이라면 모를까 서울지역에서 소설 즈음에 첫눈을 본 기억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때문에 눈을 기대하다가도 비가 오는 걸 보게 되는 경험이 꽤 많았는데, 그래도 겨울의 초입에 내리는 비가 전해주는 쓸쓸한 감성이 좋아서인지 11월의 비와 관련된 똑같은 제목의 노래가 여럿 있다.
특히 나의 청년과 중년 시절에 즐겨 듣던 밴드가 같은 제목의 노래를 불러준 것은 고맙게 느껴지기도 한다. ‘Guns N’ Roses’와 ‘잔나비’의 ‘November rain’이 바로 그 노래들인데, 두 노래 모두 그 계절의 쓸쓸하고 아련한 정서를 담아낸 나의 인생 애청곡이다.
스물네 개나 되는 절기 중에서 유독 소설에 대해 많은 추억을 갖고, 그날의 날짜를 외우는 이유는 11월 22일이 바로 나의 생일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일에 대한 들뜬 기대와 즐거움은 줄어들었지만, 태어난 날을 주변 사람들과 함께 축하하며 보낸다는 건 아직도 내가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고 있다는 증거 같아서 의미 있게 느껴지고는 한다.
소설이 다가오면 직장인들의 경우 또 다른 의미에서 마음 두근두근한 설렘 또는 긴장을 하게 되기도 한다. 아무래도 11월 하순은 한해의 성과를 평가하고 다음 해를 위한 조직을 새롭게 정비하는 시기로서 승진과 보임에 대한 결정도 함께 이뤄지는 시점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떠오르는 시기이기도 하다.
아직까지 경쟁이 심하지 않은 주니어들의 경우 잘 느끼지 못하고 연말의 들뜬 분위기에 휩쓸리기도 하지만 직장에서 리더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특히 자리가 없으면 퇴임을 해야 하는 임원이라면 연말의 어수선한 조직 분위기가 그리 달갑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즈음을 앞둔 시기에 회사 홍보팀에서 매일 아침 정리해서 공유하는 뉴스 스크랩을 보면 재밌는 홍보기사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특히 회사가 다른 기업과 뭔가 새로운 협력 MOU를 맺는다던가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다던가 하는 등의 자랑 섞인 기사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런 기사의 내용이 후속 보도로 이어지거나 실제의 성과로 확인되는 것은 거의 보기 힘든 경우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10월, 11월이라는 유독 특정된 시기에 회사들 마다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는 건 실제로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런 일들이 많이 생기는 것보다는 오히려 연말 인사와 조직개편을 앞두고 각 조직에서 경쟁적으로 성과를 어필하기 위해서 기사를 내달라고 요청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개별적인 부서들 뿐 아니라 회사 전체로 보더라도 주주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해서인지 이런 필사적인 홍보성 기사가 여러 회사들에서 나오게 된다.
경쟁회사들의 경우도 상황은 비슷해서 그들이 홍보하는 기사대로만 앞일이 진행된다면, 정말 다음 해에는 거의 모든 새로운 영역에서 엄청난 경쟁과 성취가 있을 것 같다고 느끼게 된다.
때문에 알만한 사람들은 이런 기사들을 접하게 되면 어느 정도 걸러서 이해하는 경우가 많고 오히려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에휴 OO회사는 저러다가 핵무기도 개발하겠어?"
"이번엔 누가누가 그럴듯하게 소설(小說)을 쓰는 건가 대체?"
소설(小雪) 즈음에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감상적(感傷的)인 마음이 되어,
소설(小說) 같은 기사들의 이면을 감상(鑑賞)하는 마음은..... 좀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