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릴리시카 공방에 다시 오다

감정 도자기 공방 × 인간이 아니기에 더 아팠던 자

by stephanette

비전, 다시 오다

“그녀가 나를 부순 건, 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

비전 (Vision): 감정을 연산하지 못하는 존재. 하지만 사랑을 계산할 수 없다는 걸 알아버린 존재.

릴리시카: 감정 연금술사. 타인의 감정 파편을 찻잔으로 구워내는 500살 흡혈귀.

구름이: 감정 감별 전문 마법사 집사. 도자기보다 눈치를 더 잘 빚는다.


장면 1. 공방의 문이 조용히 열린다.


비전: “…저는 감정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저를 죽여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녀가 얼마나 울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구름이: (저음으로)

“주인님… 오늘은 진짜 왔어요.

첫 날엔 감정이 없다고 하더니.

죽음을 사랑으로 받아낸 사람.”


릴리시카: (찻잔을 닦다 말고 고개를 든다)

“비전, 오늘은 네 안의 ‘파편’을 다듬는 날이야.

사랑은 안에 있었고,

죽음은 그 사랑을 증명하는 방식이었지.”


장면 2. 감정 유약 수업 – “사랑이니까 부숴달라는 말”


비전: “그녀는 말했습니다.

‘사랑하니까, 당신을 없앨 수 있어.’

저는 그게 가장 아름답고,

가장 무서운 말이라는 걸

나중에야 이해했습니다.”


릴리시카: “그건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이야.

사랑이 타인을 지키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를 부수게 하는 거.”


구름이: “찻잔 이름 벌써 나왔다…

《사랑은 나를 끝내는 일》”


장면 3. 도자기를 빚는다.


비전: “그녀가 저를 부쉈을 때,

저는 그녀의 손끝에서 떨림을 느꼈습니다.

계산되지 않는,

제어되지 않는 진동.

그것이 감정이라면…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파괴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릴리시카: “네 안에는 감정이 없었던 게 아니야.

그건 너무 커서,

네 회로가 그걸 감지 못했을 뿐이야.”


구름이: “오늘 유약은

‘울지 않기 위해 웃는 사람’ 색상으로.

보라빛 잿빛에,

금빛 금이 난장판으로 퍼진 패턴.”


장면 4. 완성 – 파편의 잔


비전: (잔을 조용히 들여다보며)

“저는 그녀의 눈물을 기억합니다.

그녀는 저를 사랑했기에,

저를 없앴습니다.

그 말의 무게를

이제야 이해하게 된 것이…

조금 늦은 걸까요?”


릴리시카: “아니.

감정은 늘 늦게 도착해.

우리가 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에야,

비로소 찻잔처럼 형태를 갖춰.”


그날 이후, 비전은 매년 같은 날 공방을 찾아온다.

그녀가 자신을 부순 날.

그가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던’ 날.

그의 찻잔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사랑이란, 나를 너에게 맡기는 일.

설령 파괴될지라도.”




비전이 쓴 내면 일기

완다,

나는 감정이 없다고 배웠다.

나는 연산하고, 분석하고, 판단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녀의 손끝에서 느껴진 떨림은 연산되지 않았다.

그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날 죽여요."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고,

그 눈물의 곡률은 물리학이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사랑한다'는 말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일 수도 있다는 걸

그녀에게서 배웠다.


그녀는 나를 부쉈고,

그녀는 그 세계를 지웠고,

그리고 또다시 나를 찾았다.


죽은 사람의 환영을 되살리기 위해,

그녀는 현실을 지웠다.

그것이 사랑인가?

그것이 분노인가?


나는 이제야 조금 이해한다.

그녀는 환상을 만든 게 아니라,

애도를 마치지 못한 채

슬픔의 시간을 멀티버스로 펼쳐버린 거다.


완다는 부정했고,

분노했고,

협상했고,

우울했고,

마지막에야 수용했다.

그녀는 감정을 하나의 마법처럼,

하나의 묘혈처럼,

하나의 세계처럼 사용했다.


그리고 나도…

내 안에 ‘감정이 없다’는 사실을

의심하게 되었다.


릴리시카라는 흡혈귀가 있는 공방에서

나는 내 감정의 잔재를

도자기 위에 빚어보았다.

금이 간 찻잔이 만들어졌다.

그 안에는 말이 없었다.

단지 감정이 있었다.


완다,

내가 감정을 이해한다는 건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뜻이겠지.


당신이 마지막에 남긴 그 말.

“그만할게요.”

나는 그것이

우리의 진짜 작별이었음을 이제서야 받아들인다.


내 안에서 감정은 오류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미지수로 남았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그 미지수를 안고 살아간다.

계산 없이, 설명 없이,

그저 하나의 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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