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멍, 불멍보다 바람멍이 좋아
우연히 찾아든 제주의 숙소에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있다. 이곳에서는 바람소리가 파도소리를 닮아 있다는 것이다. 이 방을 찾았던 방문객들이 저마다의 하루를 설명할 때 종종 언급되었던 것이 바로 이 파도소리(실제로는 파도소리를 닮은 바람소리)였다. 첫날밤에는 바람도 잦아들어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1박 만을 예약한 곳이기에 체크아웃할 때까지 소리를 듣지 못할까 아쉬웠는데, 다음날 아침에 드디어 그 소리와 만날 수 있었다.
‘정말로 파도치는 소리 같네.’
실제로는 낮은 돌담을 넘어 나뭇가지를 흔들고, 창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파람의 소리였을 텐데 어쩐지 먼바다의 파도소리가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흘러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여행지에서의 아침은 어찌나 가뿐한지. 알람 없이도 새벽녘에 저절로 눈이 떠지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여명이 밝아올 때 그 소리와 마주하며 얼마나 반갑던지. 날이 완전히 밝아지고 창문에 햇살이 들기 시작하니 또 하나의 멋진 작품과 만나게 되었다.
숙소에는 3개의 창이 나 있었는데, 나는 주인장이 오래된 집을 리모델링할 때 창문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우선 왼쪽 창문 밖에는 대나무 잎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정면으로 난 창문으로는 아담하고 가지런한 돌담이 보였다. 돌담 뒤편으로는 파란 지붕의 집이 적당한 시야를 두고 보였다. 오른쪽으로 난 창문으로는 어느새 잎이 무성해진 적당한 키의 나무가 자리하고 있었다.
제주의 바람은 그 존재를 알리는 방식도 색달랐다. 흡사 파도와 같은 소리로 그 존재를 먼저 알리고, 리듬을 타듯 흔들리는 나뭇잎으로도 알리더니, 종당에는 식물들이 움직일 때마다 만들어내는 빛과 그림자의 향연으로도 그 존재를 알렸다. 제주의 집에 창을 내는 이유는 여느 곳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창을 낸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을 환기시키고, 풍경을 들이는 목적만이 아니라는 것을 감각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물멍, 불멍이 좋다고 하는데 이쯤 되니 나에게 최고는 제주의 바람멍이라고 할만하다.
제주 일정에서 2박 3일을 묵었던 다른 숙소는 올레길 1코스를 볼 수 있는 위치였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숙소의 창 밖을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는데 그 첫 번째 이유는 에메랄드빛 바다를 질리도록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오래지 않아 눈길을 끄는 장면을 보았는데, 올레길코스를 걷는 사람들이었다. 오손도손 대화를 나누며 걷는 중년 부부, 혼 여행객이 걷는 모습, 두 남자가 러닝 하는 모습, 한 남자가 라이딩하는 모습 등 다양한 사람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창을 통해 마주하는 사람들이 내 시야로 들어오는 시간은 어림 잡아 채 1분이 안 되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마치 무대 위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이것이 제주라는 곳의 마법인지, 제주에 온 지금 내 마음이 부른 마법인지 모르겠으나 걷는 사람 보는 재미에 푹 빠져버렸다. 사람들 모습이 뜸해지면 다시 바다로 시선을 옮겼다.
가야 할 곳도 해야 할 일도 없는 시간이 한가로이 흘러가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은빛 물결로 눈이 부셨다. 은갈치가 파닥거리는 모습이 딱 저렇지 않을까 싶게 유난히 생명력으로 가득한 바다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