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달새가 연상되는 이름 ‘종달리’ 종달초등학교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골 마을의 작은 정류장에는 먼저 온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다. 내가 펼쳤던 우산을 접고 아주머니 옆으로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주머니께서 말을 걸어왔다.
“올레길 걷고 와요?”
“아뇨. 저는 동네 책방 구경 왔다가 가는 길이에요. 올레길 오셨어요?”
이렇게 시작된 대화는 제주의 올레길 코스, 혼자 떠나는 여행의 좋은 점, 가보면 좋을 맛집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길은 지도앱 보고 찾아다니시는 거예요?”
제주 올레길 코스를 대부분 주파했다는 아주머니에게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신기했다.
“아뇨. 종이 지도 보고 다녀요.”
“헷갈리지 않으세요?”
“아뇨. 찾아다니는데 전혀 지장이 없어요.”
스마트폰이 나온 이후로 종이 지도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어느새 휴대폰 없이 길을 찾아다니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길 찾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알고 보니 아주머니는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고 잠시 비를 피해 정류장에 앉아 계신 거였다. 그리고 대화가 막바지로 흐르자 이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방향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행 다닐 때마다 우리 딸이 숙소를 예약해 주는데, 방향이 조금 헷갈리네요.”하며 멋쩍게 웃으셨다. 지도앱을 켜고 걸으면 방향 헷갈릴 일이 없지만 종이 지도를 보고 걸으면 얼마간의 시행착오를 예상하고 걸을 터였다. 아마도 아주머니는 방향감각을 잃고 지나온 길을 되돌아서 숙소를 찾아갔을지도 모르겠다.
이 날 갑작스럽게 비가 내리지 않았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또 하나의 인연이 있었다. 제주 여행의 마지막날인 이날 아침까지만 해도 ‘책방투어’는 확정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숙소 책상 한편에 곱게 놓여있던 노트 더미를 발견하고 그 내밀한 곳을 들여다본 후에 마지막 일정이 결정되었다. 여기서 그냥 노트가 아니고 노트 더미라고 표현한 이유는 어림잡아 열 권 이상의 노트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도 펴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펴보지는 않았을 비밀노트.
이 숙소에 와서 생각보다 작은 책상에 놀라며 이곳 저것을 탐험하듯 둘러보다가 노트를 발견한 거였다. 그곳에서 이 방에 다녀갔던 사람들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언제부터 이 노트가 단순한 방명록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노트 몇 권을 펼쳐보고 난 후 한 명의 방문객이 그 존재를 방명록이 아닌 ‘비밀 일기장’으로 명명하였기에 단순한 감상 이상의 것을 기록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밀 일기장 속에는 한 사람의 역사가 고스란히 적혀 있기도 했고, 이별의 아픔, 상실의 슬픔, 여행의 설렘, 혼자만의 시간의 평온함이 있었다. 어떤 방문객은 이 ‘비밀 일기장’을 보기 위해서 그 많고 많은 숙소 중에 이곳을 선택했다고도 고백하기도 했다. 수많은 방문객들의 흔적을 읽어 내려가면서 이곳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편안함은 이들의 사연과 얼굴도 이름도 모를 이들이 건네는 따듯한 말들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누구에게 읽힐지 모르지만 그들에게 건네기 위해 ‘일부러 수고하는 마음’ 덕분에 마음이 넉넉해지는 거였다.
문득 이틀 전 찾았던 비자림에서 해설사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빗물이 비자림의 곶자왈(곶은 숲을 말하고, 자왈은 바위를 말한단다)을 통과해서 삼다수가 만들어지는데, 무려 10~20년이 걸린다고 한다. 우리가 마시는 오늘의 삼다수는 10~20년 전 비자림을 통과한 물이라는 거다. ‘비밀 일기장’을 통한 우리들의 만남이, 그리고 일기장 속의 말들이 삼다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방문객이 보낸 메시지를 내가 읽고 있듯이, 오늘 내가 남긴 말들을 내일의 또 다른 방문객이 읽어 내려갈 것이다.
비 예보가 없었다면, 비밀일기장에서 근처에 책방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나는 오늘 이 정류장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정류장에서 아주머니와 작별 인사를 하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에 물살을 가르며 미끄러지듯 공항으로 달려갔다.
“오늘은 결항이 많을 거예요. 딜레이도 많을 거고요”
이 말을 듣는데 걱정보다는 알 수 없는 기대감이 올라왔다.
‘아 결항이 돼도 좋겠다’
결항이 되면 이곳에서 하룻밤을 더 보낼 수 있을 거이고, 하루 더 여행을 이어갈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