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운다는 건 사람이 되어가는 것
"아이고, 엄마가 힘들겠네."
두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 보는 이들마다 그랬다. 아들만 둘. 두 살 터울인 사내아이들을 키운다는 건 누가 봐도 힘든 일이었나 보다. 사람들의 위로 섞인 말은 아들 둘 엄마의 삶이 힘겹다는 걸 인정해 주는 듯했다. 몸매를 향한 관심이 하늘을 찌르던 이십 대 꽃띠였을 때보다 더 말라 갔으니까. 당시 나는 인생 최저 몸무게를 기록 중이었다.
두 아들이 거침없이 헤집고 다닐 거라는 통념과 달리, 아이들은 얌전한 편이었다. 그다지 부산스럽지 않았다. 다만, 알록달록 책과 장난감이 늘 거실 바닥을 뒤덮었고 아이들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온종일 뛰어다녔다. 아우는 형을 따라다녔고 형도 아우를 친구 삼아 신나게 놀았다. 아이들이 남자여서가 아니라 그저 그럴 나이였다.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아이 둘이 집에서 생활한다는 건 예상할 수 없는 혼란이 일상을 지배한다는 뜻이었다. 내겐 이를 '팩트'로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던 것일 뿐. '빨강 머리 앤'에 나오는 말처럼 '아이는 어른들 눈에 보이게 있으되 소리는 내면 안 된다'는 게 내 바람이었다.
새벽 출근해 저녁 퇴근하고 저녁 식사 후 아이들과 보내다 지쳐 잠들면 다시 새 날이 시작됐다. 잠들기 전 두 아들 사이에 누워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아이들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엄마, 또 졸아요? 엄마!!!" 미치도록 졸렸다. 깨우는 아이들에게 버럭 화를 낸 것도 부지기수였다. 애들이 뭔 죄라고.
두 아이를 원활히 돌보기 위해 시댁 근처로 이사를 했다. 아파트는 좁고 낡았다. 점점 키가 자라는 아이들은 못나게 튀어나온 아일랜드 식탁에 머리를 박기 일쑤였다. 엄마 껌딱지인 첫째는 나와 안방에서, 둘째는 거실에서 남편과 잤다. 네 식구가 함께 자기에 안방은 턱없이 작았다. 겨울이면 에어컨 설치를 위해 뚫어놓은 구멍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왔다. 거실에서 잔 적이 없는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둘째가 왜 그리 겨울이면 감기를 달고 살았는지.
내가 출근하는 사이, 혼자 두 아이를 감당하느라 시어머니 얼굴은 나날이 흙빛으로 변해갔다.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후 내가 퇴근하기 전까지 아이들을 봐줄 이모님을 모셨다. 한날은 파김치가 되어 집에 들어선 나에게 이모님이 말씀하셨다. “oo엄마, 손 씻고 얼른 아이부터 안아줘요. 종일 많이 울었어.”
아직 이모님께 정을 붙이지 못한 큰아이는 뭐가 그리 못마땅하고 힘들었는지 오후 내내 목청껏 울었다고 했다. 오죽하면 옆집 할머니가 찾아왔단다. “무슨 일 난 줄 알았나 봐요. 내가 애를 잡는다고 생각하나.” 안다, 이모님 탓이 아니라는 걸. 얼마나 난감하셨을까.
주말이라고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외식이라도 할라치면 온 집안이 쑥대밭이 됐다. 시어머니와 이모님, 그리고 나까지, 그 좁은 집에 살림하는 사람이 셋이나 됐다. 옷 하나를 찾으려면 옷장을 들쑤셔야 했다.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네 식구 모두 신경이 곤두섰다. 내 생애 가장 힘들었던, 암흑과 같던 시기였다. 매일 끝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았다. 당시 우리 가족을 보며 누군가 그랬을지 모른다. "엄마는 만날 짜증 내고 아빠는 소리 지르고 애들은 눈치 보고."
나만 아이를 키우는 게 아닐진대, 왜 이리 힘에 부칠까. 늘 고민스러웠다. 돌아보면 그저 바빴고 정신없었고 피곤했다. 집이 엉망이었다고 회사일을 만족스럽게 해 낸 것도 아니었다. 매일 ‘떼거리’용 기사를 만들기 위해 발버둥 치며 하루하루를 지탱해 갔다. 저녁 시간을 자유롭게 낼 수 없었기에 어떻게든 취재원을 더 만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거나하게 취해 새벽이슬을 맞으면 기자와 취재원이 금방 ‘형님’, ‘동생’이 되는 언론 생태계에 적응하는 건 나로선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도 실력 있는 기자라 평가받고 싶은 오기도 있었다.
주변에 워킹맘은 많았다. 그들은 당당했고 아름다웠다. 그녀들의 집안 상황과 마음속 깊은 고민까진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평화로웠다. 다만, 나와 차이라면 그녀들에게는 순도 100%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 그녀들의 스케줄에 맞춰 언제든 움직여줄 수 있는 24시간 도우미 이모님들. 물론 이게 전부가 아니었을 거다. 하지만 당시 나에겐 다른 어떤 것보다 그녀들의 완벽한 이모님이 눈에 들어왔다. '슈퍼우먼' 그녀들에게 마음에 쏙 드는 이모님이 늘 상주해 있다는 사실이 그저 부러웠다.
아이가 음식을 먹다 흘렸을 때, 엄마가 아이에게 “괜찮아. 다른 거 먹으렴”이라며 관대한 태도를 보인다면 그 집은 분명 이모님이 아이를 키우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엄마들 사이에서 회자됐었다. 동일한 상황에서 엄마가 “또 흘리면 어떻게 해? 조심하랬지!”라며 아이에게 호통 치면 엄마가 전적으로 육아를 전담하는 집이라고 했다. 아이의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식탁을 닦고 아이 옷에 묻은 양념을 지우느라 바쁜 엄마. 웃픈 이야기였다.
나는 후자였다. 물론 혼자 오롯이 아이 양육을 담당하는 엄마들이 다 그렇진 않다. 내가 그랬던 거지.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는 냄비같은 성품을 가진 탓에 작은 일에도 아이들에게 버럭 했던 엄마. 아이들을 참고 품어주지 못하면서 체력 또한 저질이라 피곤하고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엄마. 내가 어찌나 '힘들다', '아프다'는 말을 자주 했던지 큰 아이는 어린이집 선생님들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 엄마는 매일 온몸이 다 아파요."
아이를 키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 맞다. 하지만 세상 모든 엄마들이 묵묵히 해 낸 일이다. 그저 모든 일이 계획한 대로 착착 이뤄지기 바라는 내가 엄마 역할을 한다는 게 힘들었을 뿐이었다. 매 순간 동시다발적으로 사건이 일어났다. 출근해선 일을 처리해야 했고 집에선 우는 아이를 달래야 했으며 냉장고에 채워 넣을 식재료와 때마다 입힐 아이들 옷도 장만해야 했다. 한 가지 일만 집중할 줄 알았던 나는 진정한 멀티 플레이어가 되어야 했다.
부모님이 주시는 밥 먹으며 걱정 없이 공부만 했던 내가 엄마가 된다는 게 무엇인지, 엄마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른 채, 그제야 비로소 인생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때론 맵고 쓴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저 인생이 달달한 것만 아니라는 사실을 두 아들을 키우며 깨달아갔다.
누군가 그랬다. 삶에 통달한 이는 일과 휴식, 몸과 마음, 배움과 놀이에 구분을 두지 않는다고. 그저 매 순간 탁월함과 감사함을 추구할 뿐이라고. 내 눈에 완벽했던 그녀들에게는 삶의 균형을 이루는 능력이 있었을 게다. 나만큼 내 아이를 사랑해 주고 나보다 더 아이를 살뜰히 잘 챙기는 이모님이 전부가 아니었다. 내게 필요한 건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매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감사하는 태도였다.
문득, 내 손 안에서 꼼지락거리던 아이의 고사리 손이 떠오른다. “엄마는 이 느낌을 평생 기억하고 싶어. 울 아들 손이 더는 안 컸으면 좋겠다.” 매일이 전투였던 그때, 왜 기쁘고 행복했던 적이 없었겠는가. '힘들었다'라고 뭉뚱그려서는 안 될 만큼 아이들의 손은 보들보들했고 오물조물 예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