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빵빵해졌다.
슬쩍 말없이 검정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일한다고 잠시 타이밍을 놓쳤더니 가슴이 아프다.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가장 안쪽 칸으로 들어가 유축기를 꺼낸다.
‘쓰으 솩’ ‘쓰으 솩’.
모터가 작은 탓인지 펌핑 소리가 요란하다. 민망하다. 옆 칸에 누구 없겠지? 화장실에서 뭐 하나 싶을 게다. 아이가 먹을 모유를 짜 내고 있다는 걸 알면 무슨 생각이 들까? 누군가 화장실에서 가슴을 드러내고 젖을 짜는 중이라는 걸 상상이나 하려나. 가만 생각하니 기가 막히다. 돌도 안 지난 아들이 먹을 모유를 화장실에서 짜야한다. 오랫동안 자리 비운다고 선배가 뭐라고 하지는 않을까 마음 졸여 가면서.
모유 먹이는 여기자
언론사에서 기자로, 그것도 '여기자'로 사는 건 녹록지 않았다. 십여 년 전이니 지금은 괜찮아졌을지도 모르겠다. 입사한 지 일여 년 만에 결혼을 했고, 허니문 베이비가 생겼다. 수습 딱지 겨우 뗀 부서 막내가 아이를 가졌다고 했을 때, 선배들은 감사하게도 축하해줬다. 데스크에게 말하는 건 부끄러웠다.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중년 남성과 일대일로 한다는 건, 당시 내게 어려운 일이었다.
배가 불러오면서 편한 점은 분명 있었다.
공식적으로 술을 마다할 수 있었다는 것. 언론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술을 거부할 예외조항 따윈 없는 조직이다. 선배들은 폭탄주를 내 앞에 들이대다가도 ‘아, 맞다’ 하며 거뒀다. 잠시 미안한 기색을 띄면서. 그리고 꼭 한 마디 덧붙이곤 했다. "뱃속부터 술을 가르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조기교육."
둘째 아이 젖을 먹일 무렵, 외근 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저 유축할 만한 곳이 있을까요?” 홍보 담당 임원에게 첫인사와 함께 물었다. 중년 남성이었다. 또 민망했다. 허나, 엄마는 강하고 아줌마는 뻔뻔해야 했다.
임원 얼굴에 난감함이 스치더니 눈이 커졌다. “아니, 기자님 모유를 먹이세요? 대단하십니다!” 눈앞에 선 여기자의 선심을 얻기 위해 하는 말은 아니었다. “마련해드려야죠. 기다리십시오.”
홍보실 옆 작은 방송실을 이용하라 했다. 방음시설이 된 그곳에서 문을 잠그고 사용하라는 그는 내게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아직 그런 공간은 없어서요.”
회사 화장실에서도 유축을 했는데 그만하면 감지덕지했다. “직원들에게 카메라 방향은 돌려놓으라 했습니다. 전원은 분명 꺼 있지만 혹여 불안하실까 봐요. 그래도 모르니 방송 끝나면 티슈 한 장 덮어 놓을 겁니다.”
날 고용한 회사도 이리 해 주진 않았다. 마음이 저릿할 정도로 고마웠다. “제 아내는 아이들 키우면서 모유를 먹인 적이 없어요. 이제껏 제가 본 여기자들 중에 처음이에요. 정말 훌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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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엄마여서, 애 딸린 엄마 기자여서
예상치 않은 과찬이었다.
난 그저 일하는 엄마여서 아이에게 늘 미안했다. 출산휴가 3개월을 쓰고 바로 출근했다. 돌도 되지 않은 아이는 이른 아침 시어머니 품에 안겨 택시를 타고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당시 내가 아이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최선은 ‘모유’였다. 모유는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는 비결이자 만병통치약이라는 절대적인 신념이 내겐 있었다. 세상 수만 가지에 달하는 육아 방법 중 내가 전적으로 동의하고 절대적으로 믿는 의학적 사실이었다. 집에서 하루 종일 아이를 안아주지도 못하는데 평생 살아갈 힘, 면역력만큼은 잘 챙겨주고 싶었다. 사실, 그것밖에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감사하게도 모유가 충분히 나왔다. 내가 번거롭고 귀찮다고 잘 나오는 젖을 끊기는 아까웠다. 조금만 애쓰면 될 일이었다.
매일 유축기와 보냉 가방을 들고 다녔다. “그거 뭐냐? 007 가방도 아니고.” 검정 가방을 들고 다닐 때마다 주변에서 물었다. “선배, 도시락 싸서 다니세요?” 맞다, 도시락. 내가 먹을 게 아니어서 그렇지.
미안하기는 회사에도 마찬가지였다.
특종 기자로 알려지고 싶었다. 데스크가 원할 때마다 시기적절하게 단독 기사 빵빵 날려주는 기특한 기자가 되고 싶었다. 아이를 키운다는 핑계 속에 살고 싶지 않았다. 저녁 약속, 회식 자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려 애썼다. 물론 선배들 성에는 차지 않았을 터다. 모유 수유하느라 술 마시지 못하고 잔병치레가 심한 아이를 이유로 일찍 퇴근해도 되냐고 묻는 후배가 마냥 예뻤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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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출장 계획이 잡혔다.
일주일 가량 되는 유럽 출장이었다. 젖먹이가 집에 있어 못 가겠다 말하기 싫었다. 2인용 전기밥솥만 한 유축기, 휴대용 유축기, 젖병을 챙겨 들고 비행기를 탔다. 기내용 캐리어 하나 가득했다. 유럽 어느 공항에서 짐 검사를 하는데 직원이 '이게 뭐냐?'라고 물었다. 아, 갑자기 영어로 적절한 표현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유축. 뭐라 하지? 두 손을 가슴 위치에 들고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별 거 있나. '큭' 옆에 있던 일행의 웃음이 샜다.
아이가 옆에 없다고 젖이 갑자기 마를 리가 없었다. 가장 난감한 건 전세버스로 장거리 이동을 할 때였다. 참다 참다 도무지 안 되겠다 싶어서 조용히 뒷자리로 가 조심스레 유축을 했다. 동행한 타 언론사의 남자 선배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젖먹이를 둔 애 엄마라는 걸. 그들은 애아빠여서 그나마 이해하겠다 싶었지만 결혼하지 않은 총각 동료도 있었다. ‘쓰으 솩, 쓰으 솩’ 유축기 소리가 버스 안의 고요를 깼다. 지금도 가끔 그때 상황이 떠오르곤 한다. 그 소리를 들은 남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심히 민망해진다.
남의 회사에 여직원 휴게실 만들어주다
몇 년 후, 내가 출입 기자로 머물었던 회사에 여직원을 위한 휴게실이 생겼다. 젖먹이를 둔 워킹맘을 위한 유축 공간도 마련됐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난 이미 출입처가 바뀌어 떠난 후였다. “기자님 덕이예요. 회장님이 기자님 얘기를 어찌 들으시고 회사 여직원들을 위해 만드셨어요.” 아, 이렇게 내가 남의 회사 여직원 복지에 기여할 줄이야.
사람과 사회에 관심이 많았다.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부조리한 사회에 소금이 되고 싶었다. 특종 기사로 사회문제를 이슈화하고 인사이트 있게 해법까지 제시하고 싶었다. 허나, 나의 바람과는 달리 난 여의도에서 가장 밥 잘 먹는 여기자로 통했다. 이른 아침 출근, 늦은 퇴근, 거기에 엄마를 오매불망 기다린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 챙기는 내가 모유수유까지 했으니 아무리 많이 먹어도 살이 쭉쭉 빠졌다. 최고의 다이어트였다.
지금 돌아보면 유난스러웠다. 가끔, '내가 왜 그랬을까' 생각한다. 모유 좀 덜 먹이고 회식자리에 마음껏 어울렸으면 어땠을까. 그럼 내가 특종기자로 이름 꽤나 날렸을까. 데스크 사랑을 독차지했을까. 모를 일이다. 다만, 십여 년 전 내 깜냥으로 할 수 있는 만큼 했을 뿐이다. 일하는 엄마여서 미안한 마음을 내 방식대로 표현했을 뿐이다. 기자이기 전에 아이들의 엄마니까. 그건 나 밖에 못 하는 역할이니까.
올해 열네 살이 된 큰 아들은 어릴 때 그리도 자주 아파 마음 고생시키더니 언제부터인가 병원도 가지 않는다. 몸무게가 늘지 않아 속상했던 둘째는 운동선수 체격이 됐다. 모유 덕이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