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가서 책 고르기를 좋아한다.
아이들 등원시킨 뒤 다음 일정까지 남은 시간이 삼십 분이라면, 그 시간만큼은 온전히 헤매는 자유를 누리다가 돌아온다. 평소 어느 작가의 무슨 책을 딱 꼬집어 사는 대신 도서관에서만큼은 아무런 정보도 없이 끌리는 대로 책을 빌린다. 어쩔 땐 표지가 마음에 들고, 어쩔 땐 제목이 마음에 들고, 어쩔 땐 그냥 이거 읽어야겠다 싶은 마음. 그저 느낌뿐인 선택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 때가 더 많고, 무엇보다 내가 모르는 세계를, 어쩌면 내면에서 필요한 것을 무의식이 인도해 주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무언가. 그 책이 끌리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당장은 알 수 없을지 몰라도, 비록 사소한 책 한 권 일지라도 돌이켜 보면 그랬다. 어느 날 문득 그 '무언가'는 나의 고정된 세계를 미묘하게 흔들었다.
상반기에는 청소년 문학을 주로 읽었다. 무슨 일인지 한 코너 앞에 오래도록 서있었는데, 거기가 바로 청소년 문학을 모아둔 곳이었다. 아이들이 사춘기라면 모를까. 여섯 살 네 살 아이들을 키우며 오지도 않은 청소년기를 미리 탐색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오래전 나의 그 시기가 그리운 것도 아니었고, 평소 청소년 문학이라 일컫는 소설을 경계 없이 읽기는 했지만 그렇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곳에서 자주 서성였다. 왜 이러지. 문해력이 떨어졌나. 쉬운 것만 읽고 싶은 건가. 여러 생각이 오가는 와중에 끌리는 대로 매주 한두 권씩 읽기 시작했다.
그 시기의 나는 무기력함이 절정에 다다랐다. 몇 계절에 거쳐 알게 모르게 깊어진 늪이었다. 아이들이 있어 생활은 그럭저럭 굴러갔지만 나의 생활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씻는 것도,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나가는 것도,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소원해진 여름이었다. 꾸역꾸역. 네 글자 안에 담긴 삶이 무미건조하다 못해 의미를 잃었을 때. 그제야 비로소 이대로는 위험하다는 걸 깨달았다. 일상이 무너졌구나. 좋아하는 것들도 다 놓아버렸구나. 우울증에 수면 장애에 무기력증까지 병명을 붙이자면 다 갖다 붙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누구도 나의 상태를 알아채지 못하는 게 한편으로는 재미있다고 해야 할까. 속에선 쉴 새 없이 위험 경보를 울리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들 '전혀 몰랐다'며 입을 모았다. 누가 봐도 나는 여전히 밝고, 바쁘고, 수련도 열심히 다니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무렴 어떻게 본들 무슨 상관일까.
"여보, 나 심각해. 진짜 우울증인가 봐."
그 말을 겨우 꺼낸 뒤 방으로 들어가 누워버렸을 때 남편은 따라 들어와 뭐가 그렇게 힘든지 이야기해 보라고 했다. 일 년 가까이 널뛰는 감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다. 따뜻한 돌 같은 사람. '그냥 다 힘들고 슬퍼. 글 쓰는 것도 그렇고 애들 보는 것도 그렇고…….'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남편이 가만히 눈물을 닦아주는데, 아이들이 다른 방에서 웃으며 노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 나는… 내가 왜 사는지 모르겠어."
겨우 나온 그 말에 나는 내심 놀라고 말았다. 어쩌면 그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었을까.
"왜 그렇게 생각해. 여보는 존재만으로도 아이들한테 얼마나 특별한데. 글 안 써도 돼.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뒷걸음질 쳐도 돼. 뭘 꼭 해서가 아니라 그냥 여보는 여보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잖아."
어쩌면 그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을까.
뒷걸음질 쳐도 된다는 말이 멈출 줄 모르는, 아니, 멈추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던지. 얼마나 고맙던지. 글 안 써도 돼.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뒷걸음질 쳐도 돼. 사실 내가 나한테 얼마나 하고 싶었던 말이었나. 그 말은 나를 무너뜨리는 대신 오히려 일으켜 세웠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서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수련을 쉬면서 아팠던 허리 치료를 받았다. 무조건 나가서 걷고 빨리 걷기가 익숙해질 때쯤 달리기를 했다. 돌아오면 뭐라도 먹고 샤워를 했다. 밑바닥으로 내려가 몸과 마음을 새롭게 돌보았다. 좋아하는 무언가를 해나가는 것보다 일상을 잘 가꾸는 것이야말로 살면서 가장 중요한 일이구나. 나는 더 이상 그 모든 시간을 자책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누카가 마오의 소설 <달리기의 맛>을 만난 건 더더욱 우연이 아니었다. 이 책을 읽기 위해 나도 모를 공간과 시간을 서성였구나 싶었으니. 촉망받는 마라톤 선수였던 소마는 치명적인 부상으로 달리기를 그만둔다. 정확하게는 달리기를 그만 두기까지의 과정과 심리를 덤덤한 듯 예리하게 그려낸다. 소마에겐 함께 육상부에 들어간 동생 하루마가 있다. 동생보다 앞서 달리는데 익숙했던 소마는 언제부턴가 하루마에게 추월당하지 않을까 두려움이 생긴다. 부상은 그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기 좋은 구실이 되어주었고, 소마는 우연히 미야코 뿐인 실습실로 들어가 요리에 몰두한다.
미야코의 무심한 성격으로 인해 오히려 해방감을 느끼는 소마. '달리기로부터, 동생에게 지는 것으로부터도 도망쳐도 된다고 생각해. 그런 것이 나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소마의 머리를 양배추 쥐듯이 잡고는 덤덤한 진심을 건네던 미야코. 아스파라거스 볶음과 로스트비프를 만들면서, 소마는 마음 깊은 곳에서 외면하던 것들을 비로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동생 하루마나 육상반 친구 스케가와는 결국 소마의 기록을 뛰어넘지만 소마는 예전만큼 두렵지 않다.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낸다는 건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는 걸 배웠던 시간이니까. 나를 흔들어 깨우던 사소한 그러나 반짝거리던 ‘무언가’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이 여름과 그 책이 나에게 남긴 건 두려움을 넘어서는 용기다. 뒷걸음질 쳐도 돼. 이젠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가 나에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말해도 삶은 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면의 둑이 무너지지 않게 단단한 모래주머니 하나 더 얹어주는 느낌이 든달까. 그러니까 자주 말해주고 싶다.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도망쳐도 된다고. 꼭 그거 아니어도 된다고. 우리는 이미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