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지마 요시미치는 <차별 감정의 철학>에서 말한다. 아이는 언어를 배우면서 사회적 가치관을 배우고, 쾌감과 불쾌감의 대상을 배운다고. 이렇다 할 언어 교육은 없지만 아이를 대할 때 가장 의식하는 일은 무엇이든 함부로 판단하지 않기, 할 말은 분명하게, 먼저 피해는 주지 않기, 전적으로 수용하되 한걸음 떨어져서 그 일을 함께 바라보기. 그리하여 결국은 내가 이 세상에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님을 알려주는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갈고닦아 온 삶의 태도가 아이에게 연결되었을 때. 그리고 아이가 고스란히 엄마의 태도를 흡수하여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내 마음은 환한 동시에 서늘했다. 아이를 대충 대했던 눈빛, 말투, 행동 그중 무언가를 더 닮지는 않았을까. 나도 모르게 나왔을 내가 싫어하는 '나'도 아이는 성실하게 봤을 텐데. 그림자조차 엄마라고 따라오는 이 존재를 나는 어떻게 대하고 있나.
아이가 던지는 말 한마디에 멈춰 서서 나의 뒷모습을 점검한다.
지난봄, 여섯 살 수는 처음으로 '친구들이 나랑 놀아주지 않아요'라는 말을 꺼냈다. 불이 다 꺼진 뒤 잠자리에 누워서였다. 수와 윤 그리고 나, 우리 셋은 매일 밤마다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이고 대화를 나누다가 잠드는데, 이때의 대화는 속마음을 나누는 특별한 의식에 가깝다. 어떤 날은 노래로 어떤 날은 포옹으로 어떤 날은 웃음으로 또 어떤 날은 눈물로 하루의 문을 닫는다. 그러는 사이 일상적인 재잘거림이 저 멀리 가라앉고 진짜 대화가 시작되는 거지. 하루종일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이다.
나에게도 아이들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그때가 절대적이어서, 수의 마음 깊숙이 숨어 있던 그 말을 들었을 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처음은 엄마의 처음이기도 하니까. 몇 초간 얼어붙은 얼굴을 (어두워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재빨리 숨긴 채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고민했다.
"친구들이 어떻게 놀아주지 않는데? 수는 왜 그렇게 느꼈어?"
"얘는 내가 놀자고 하는데 싫다고 그러고. 내 말도 안 듣고. 저는 혼자여서 슬퍼요."
"수가 놀자고 했는데 그 친구는 왜 싫다고 그랬어?"
"탐정놀이 하는데 세 명 다 찼다고요. 전 안 된대요. 날 안 좋아해요."
"그럼 다음에는 세 명이 다 차기 전에 수가 먼저 같이 하자고 해. 엄마가 들으니까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건데, 그 친구는 수를 안 좋아해서 거절한 게 아닐 거야. 놀아주지 않는다고 느껴서 슬플 수는 있지만 그럼 다른 놀이 하면 되잖아. 블록도 있고 그림을 그려도 되고."
"블록은 다른 친구들이 하고 있고, 걔네도 나를 안 껴줘요."
"수가 다섯 살엔 **반이었다가 지금은 **반이잖아. 반도 바뀌고 친구들도 달라져서 낯선 것만큼 친구들도 그럴 거야. 아직은 익숙한 친구들끼리만 놀 수도 있어. 수를 진짜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건 두고 봐야 하는 부분이고, **반도 익숙해지면 그런 마음 안 들걸? 그리고 늘 친구들이랑 같이 놀 수는 없어. 같이 안 놀면 또 뭐 어때. 엄마는 함께 즐겁게 노는 만큼 혼자 재미있게 놀 줄 아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살다 보면 혼자 뭔가를 해야 할 때가 꼭 오거든. 그러니까 지금은 속상할 수 있지만 수가 좋아하는 놀이가 뭔지 찾아보고, 그걸 해보는 거야."
엄마의 말을 다 이해할 리 없는 수는 금세 다른 대답을 했지만 나는 내심 안도했다. 일단 문자 그대로의 일은 없다는 것을 확인했고, 새 학기를 지나는 아이의 마음이 어떤지도 알게 됐으므로. 봄 내내 그랬던 아이가 여름에는 반에서 키우는 곤충 이야기만 주야장천 하더니 이 가을엔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대화를 제대로 이어갈 힘도 없어 '엄마, 너무 피곤해. 우리 그만 자자. 엄마는 자야겠어.' 하고 중얼거리던 어느 날, 수가 나를 푹 안았다. 그러고는 '엄마는 너무 많은 일을 하니까 내가 보살펴 줄 거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지 못한 문장에 솔직히 놀라고 말았다. '고마워' 겨우 입을 떼고는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다른 날 명상을 하던 중에 그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라 불쑥 눈물이 차올랐다.
아이는 아는 것이다. 평일 육아를 오롯이 담당하고 있는 엄마가 얼마나 애쓰는지. 머지않아 어떤 날엔 '엄마 수고했어요, 힘내세요' 하길래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수가 훌쩍 컸다는 걸, 수가 보여주는 연민의 언어로 알아차리는 이 계절. 나는 비로소 수의 내면이 한층 깊어졌음을 느낀다. 개인적으로 말과 언어는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말이 쌓이고 모여 내재화된 것이 언어라고 믿기 때문이다. 수에겐 이제 수만의 언어가 생겼구나. 그건 어디까지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건넨 말들을 쌓아 만든 세계일 테니, 고스란히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아유 예쁜 내 똥강아지들'이라고 하면 엄마를 보며 멍멍 진짜 강아지 흉내를 내는 아이들. 그럴 때면 당황스러워서 '아니 이건 그냥 너무 사랑스럽다는 비유적인 표현이야'라고 덧붙이지만… 부지불식간에 '나는 엄마를 너무 좋아하고 사랑하니까 엄마는 나의 똥강아지야!' 내 뒤통수를 때리는 수의 말이 연민의 언어가 아님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이 연민의 언어야말로 세계를 구하리라 믿는다.
그러니까 수의 세계를. 그 언어로 누군가를 이해하려다가 미워지면, 사랑하다가 상처받으면, 믿다가 원망하면. 그러다 밑바닥까지 굴러가 더 이상 살 용기조차 없어지면… 이 세상이 다 내 맘 같지 않다는 걸 깨닫는 만큼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기도 하니까. 먼 길을 헤매도 괜찮다. 스스로에게 연민의 언어를 허락할 수만 있다면. 수는 딱 그만큼 있는 그대로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겠지. 엄마가 그러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