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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런콩 Dec 03. 2024

소금에 얽힌 전설

카페인을 든든히 섭취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밤 10시까지 일정이 있을 예정이니 체력을 비축해 두어야 했다. “오늘은 최소한의 에너지만 쓸 예정이야.” 제주에 가 있는 후배에게 사내 커뮤니케이터로 말을 걸었다. 청주 공항에 안개가 자욱이 끼는 바람에 제주에서 청주로 가는 비행기가 출발도 못 했는데 속 긁는 소리를 했다. (나를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선배라고 생각했을까.) 후배가 바빠서 답을 안 해주니 나의 레이더radar는 신입사원을 향했다. 어여쁜 그녀는 적잖이 시달렸다. 일하랴, 선배 말에 대꾸해 주랴 손이 모자랐을 것이다. 나는 여기저기에 타자를 치느라 칼로리를 소모했다. 교대 즈음엔 당이 당겨서 아샷추(에스프레소가 들어간 아이스티)를 들이켰다. 그래도 떨어야 할 수다는 남아 있었는지 동기 차를 얻어 타 김포공항에 도착하는 내내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래도 하지 말아야 할 말은 참았다. 우리 사무실엔 금기어가 있다. 오늘은 노말normal이네, 아무 일도 없다 같은 말들. 행여나 입 밖으로 꺼냈다간 부정이라도 타게 될까 봐 다들 쉬쉬한다. 한동안은 소금을 먹었다. 근무자들끼리 말돈 소금이 효과가 좋다, 아니다 히말라야 핑크 솔트가 직방이다라는 둥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우리는 액운을 쫓듯 그 짠 걸 삼켰다. 서로에게 뿌릴 순 없으니 말이다. 나중엔 맘씨 좋은 차장님이 일본에서 소금이 들어간 사탕을 사 오셨다. “몸에 안 좋으니 차라리 이걸 먹어”라며. 우리의 미신행위는 진짜로 통했다. 소금을 한 꼬집 집어먹고 날씨가 갑자기 좋아진다든가, 못 내리던 항공기가 내린다든가 한 것이다. “봐봐, 소금 먹어서 그래.” 비정상이 될 뻔한 상황은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이 나고 우리는 그제야 조금 웃을 수 있었다.     


소금은 ‘사다리’도 피할 수 있게 해 준다. 주말이 되면 사무실에서 커피나 점심 내기를 한다. (매번 하는 건 아니다. 절. 대.로.) 우리가 고안해 낸 방법은 몇 개가 있다. 가장 전통적인 건 숫자가 쓰여있는 나무 막대기를 뽑는 것이다. 근무석 맨 앞 커다란 화면에 네이버 사다리 게임을 띄운다. 보통은 1~2만 원, 3만 원도 가끔 있다. 위 칸에는 나무 막대의 숫자를, 아래 칸에는 ’럭키‘와 금액을 적절히 섞어 넣는다. 숫자를 하나하나 클릭할 때마다 사람들 호응 소리가 이어진다. 아, 오 하는 탄성과 탄식. 요즘엔 핀볼 게임에 빠져 있다. 자리마다 정해진 색깔의 공이 순서대로 골대를 향한다. 걸리는 번호를 앞쪽으로 몰면 금방 결과가 나와 시시하다. 그렇다고 다 뒷번호로 정해도 재미가 떨어진다. 언젠가 선배가 꽤 긴 기간 내기에서 살아남은 적이 있다. “생각해 보니 나 소금 먹었어.” 에, 설마라고 반응하긴 했지만 진짠가? 싶기도 했다. 소금의 힘이 이렇게나 강력하다.   

  

가끔은 지금이 영원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런 게 행복인가? 싶기도 하다.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것의 실재를 마주할 때처럼 조금은 두렵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소소한 일상이 나에겐 버겁게 즐겁다. EC(European Commission,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사실상 합병을 승인하고 이제 DOJ(Department of Justice, 미 법무부)만 남았다. 국내 두 대형 항공사의 합병 절차가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에 우리 조직은 가리가리 찢길 위기를 맞이했다. 내가 사랑하는 모두가 이 시간을 무사히 잘 넘기기를, 너무 큰 생채기를 내지 말기를.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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