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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 Oct 22. 2023

복직과 현실

  2년 이상 휴직을 하면 복직 연수를 이수해야 한다. 실시간 원격과 동영상 강의를 듣는 비대면 연수, 그리고 집합 연수로 기획된 복직 연수가 시작되었다. 뉴스에서는 연이은 교사 관련 안타깝고 슬픈 소식들이 전해지고, 분위기가 참 우울했다. 이런 상황에 이제는 정말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구나, 탄식이 절로 나왔다. 복직이 한 달 남짓 남았는데, 발령교와 담당 학년, 업무 통지를 언제쯤 받게 되는지조차 알 수 없어 막막하고, 어떤 것부터 준비해야 할지를 몰랐다.


  교사들은 매년 일정 시간 연수를 이수해야 한다. 학급경영이나 교실 놀이, 수업 기술 등과 관련해 도움이 되는 주옥같은 연수들이 정말 많지만, 간혹 꼭 들어야 한다며 독촉을 받는 필수 이수 연수 중에는 아무도 내용은 듣지 않고 클릭만 해서 페이지만 넘기는 연수들도 많다. 내 필요와 관심에 의해 골라서 듣는 연수가 아니라 필수로 이수하라고 해서 듣는 연수는 대부분 지루했고, 실제 현장에 현실적으로 도움이 많이 된다고 느낀 적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2년 이상 휴직자는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한다는 복직 연수는, 딱히 기대가 되지는 않았지만 어떤 내용을 다루길래 필수인지 궁금하기는 했다.


  원격 연수를 듣는데, 첫 강의가 초등 교육 정책과 관련된 연수였다. 연수생들은 지금 사회적으로 교사의 인권이 사라져 문제가 떠들썩하게 생기고 있는데 ‘학습자 중심’, ‘행복한 학습자’, ‘상호존중’ 따위의 표현이 반복되는 교육방향에 대한 전달식 연수가 오래 현장을 떠났다가 복직하는 교사들에게 실제로 도움이 되고 필요한 내용이라고 진정 교육청은 생각하는 것인지, 이 시국에 이런 내용을 굳이 시간 맞춰 앉아서 들어야 하는지, 차라리 PPT를 먼저 각자 읽고 자유 토론식으로 진행을 하는 것이 낫겠다는 등 많은 불만을 제기했다.

  이후 나머지 연수 과목 중에는 분명 도움이 되는 내용들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복직을 앞두고 막연하고 두렵고 걱정이 많은 상태에서 이 연수가 크게 유익하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고, 다른 연수생들도 그런 것 같았다.


  원격 연수 기간이 지나고 몇 년 전 1급 정교사 자격연수를 들을 때 마지막으로 가 보았던 연수원으로 집합 연수를 들으러 가게 되었다. 출근을 하듯이 아침부터 준비해서 나가는 게 출산하고 처음이라 기분이 이상하고 어색했다. 아이도 “엄마, 어디가?” 하며 낯설어했고, 가는 길에 보이는 풍경들이 조금 생경했다.


  한 교장 선생님의 연수가 있었다. 교사들의 행복을 위해 많은 것을 노력하시는 분이었다. 신규 교사에게는 몇 년간 어려운 업무와 학년을 주지 않는 것, 아무리 중요한 교직원 회의나 학교 일이 있어도 조퇴나 병가 등을 사용하는 교사에게 사유를 묻지 않고 승인해 주는 것, 학부모의 민원을 관리자로서 적극 담당하고 처리하는 것 등. 많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고,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저 학교 선생님들은 정말 복 받았고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녁에 남편과 얘기하던 중 ‘유니콘’ 같은 교장님으로부터 오늘 들은 감명받은 연수에 대해 말했다. 그랬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남편이 하는 말은 “... 그게 유니콘이야..? 그게 당연해야 하는 거 아니야?”였다.


  맞다. 정상적인 직장이라면 그게 너무나 당연해야지. 공조직이라는 곳은, 교직 사회라는 곳은, 학교라는 곳은 정말이지 뭔가 이상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잘못되었다고 다수가 느끼는 것들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야 하고, 그 속에 스며들게 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잘못된 걸 고치려고 목소리를 내고 노력하는 사람만 더 마음고생 하거나, 욕을 먹거나, 일을 더 많이 하게 될 뿐이다.

  남편의 말이 또 나에게 새로운 생각거리를 던져 주었다.



  나는 과분하게 좋았던 첫 학교 다음으로 가게 된 두 번째 학교를 소위 말해 ‘튕겨서’ 가게 되었다. 당연히 주소지 주변으로 첫 학교 근처의 학교에 발령이 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필 그 해 내 주소지 근처 전보 대상자가 과원이라 가까운 다른 구로 넘어가게 되어 너무 당황스러웠다. 걸어서 도어투도어 20분이면 충분했던 출퇴근 거리가 걸어가면 1시간, 대중교통으로는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40분~50분 정도 걸렸다.(그 당시 나는 운전면허가 없었다.)


  또 학교의 전반적인 것들이 첫 학교보다 좋지는 않았다. 특히 급식실이 없어 교실에서 급식을 먹었는데, 쾌적하게 급식실에서 급식을 해오던 나는 교실 급식이 개인적으로 너무 싫었다. 배식을 하며 바닥에 국물을 줄줄 흘리고, 완전히 깨끗하게 닦이지 않았는데 그곳에서 또 놀이를 하고, 공부를 하고.. 매년 그런 것이 반복되었을 테지. “선생님, 제 수학책에 마른 멸치가 붙어있어요!”라는 말이 나오는 교실 급식이 나는 너무 싫었다. 자꾸만 첫 학교와 모든 것을 비교하게 되었다.

  나의 신규 때의 열정과 뽕도 사라져 더 새 학교에 정이 붙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제는 육아와 일을 병행하게 되니 출퇴근 거리와 시간이 중요해져서,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으로 다시 튕길 수 있을까 하고 일부러 신학기가 아닌 때에 복직을 했다.



  복직교가 발표되었다. 첫 학교 근처의 학교였다. 성공이다! 지금 집에서도 걸어 다니기엔 약간 멀지만, 이제는 운전을 할 수 있어서 차로 15분 정도 걸리기에 아주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친근한 동네라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연락을 받고 학교에 가 보니 상황은 심각했다.


  나는 혼자 그 학교에 복직하는 것이 아니었다. 각각의 모종의 이유로 담임 교체가 된 반이 여러 반이 있었다. 당연히 담임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모두 고학년 담임이었다.

  싸늘했다. 뭔가 이상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 보았다. 같이 복직하게 된 선생님들과 불안한 마음을 나누며 복직을 하게 되었고, 현실은 뉴스에서 보던 것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자세한 내용은 다 쓸 수가 없지만, 학급 붕괴로 인한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많이 있었다고 들었다. 새로운 사건에 대해 하나씩 알게 될 때마다 우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런 일이 진짜 가능해요?’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누구의 완전한 귀책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평범하지만은 않은 그런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이유가 뭐였든 잘못된 언행을 한 학생들은 달라진 것 하나 없이, 어떤 처벌이나 제재 없이 그대로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고, 담임교사만 교체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교사 집회에 참여하신 어떤 선생님께서 “우리가 부품입니까!”하고 외치는 모습을 보았었는데, 정말로 지금도 현장은 부품처럼 문제 학급의 교사만 교체되면(그것이 교사의 자의든, 학교 측의 타의든) 그만일 뿐이었다.


  나아가 더 우리에게 무력감을 느끼게 해 준 사실은, 복직 후 우리의 안부를 묻는 주변 지인들에게 상황을 전하면 ‘우리 학교도 지금 난리야. 우리 옆 반 선생님도 명퇴하셔서 신규가 왔어. 우리 동학년 선생님도 몇 분 휴직하셨어.’ 등의 대답이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 학교가 심각한 것도 맞지만, 비단 이 학교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현장에 돌아오니 많은 것이 바뀌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사회적으로 교사 관련 이슈가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었고, 그래도 그런 노력들로 현장이 조금씩 좋은 쪽으로 변하지 않겠느냐는 위로와 응원을 받고 복직을 했는데,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고, 앞으로도 쉽게 변하지 않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나마 달라진 게 있다면, 교사들이 전에는 좋지 않은 일을 당해도 사명감으로 꾸역꾸역 참고 학년은 마쳐서 올려 보내고 휴직을 했다면 이제는 교직 사회의 정서가 힘들면 참지 않고 본인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것으로 바뀌어서 휴직과 명퇴가 엄청나게 늘고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진상은 자기가 진상인 것을 모른다’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원래 상식이 통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더 조심하고, 진상들은 여전히 똑같아서 누군가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내가 맡은 학급의 학생들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학급의 질서와 규칙이 없었을 뿐, 고학년 담임에 그래도 자신이 있었던 나에게 크게 어려운 난이도는 아니었다. 단지 3월처럼 학급의 모든 시스템을 처음부터 하나하나 새로 세팅해야 했다. 할 일은 너무나도 많았고, 이제는 일과 육아를 같이 해야 하니 일할 시간은 너무나도 부족했다. 학생과 학부모로 인해 힘든 것은 없었지만 부족한 시간과 체력이 힘들었다.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아이 등원 준비를 해두고, 7시 반에 우는 아이를 간신히 뒤로 한 채 집에서 나와 출근을 했다. 육아시간을 쓰고 일찍 퇴근해서 아이 하원 준비를 해야 하니 학교에 있는 동안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마시고 화장실 한 번 제대로 못 가고 미친 듯이 일을 했다. 결혼 전에는 육아시간을 쓰고 일찍 집에 가시는 분들이 그냥 부러웠는데, 절대 부러울 것이 아니었다.


  퇴근 전에도, 퇴근 후에도 1분도 쉴 틈이 없었다. 아이를 데리러 가기 전에 돼지우리 같은 집을 대충 정리하고 청소기라도 한 번 돌리고, 저녁을 간단하게라도 준비해 두고(만들거나 치울 시간이 없으니 거의 사 먹이게 되었다.), 아이와 하원하고 놀이터에 가서 놀아주고, 저녁을 먹이고, 치우고, 씻기고, 재우면 10시가 넘었다. 아침에 씻고 머리를 말릴 시간이 부족하니 밤늦게 씻고 젖은 머리로 수업자료를 준비하고, 미처 못 끝낸 업무를 마무리했다. 아이가 아직 어려 밤에 자다가 몇 번 깨곤 했는데, 깊게 푹 자지 못한 채 다음 날 똑같은 하루가 또 시작되고, 매일 그 생활이 반복되었다.


  휴직 중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아침에 등원 준비와 등원은 내가 했었는데, 이제는 내가 일찍 출근을 해야 하니 남편이 아침 시간을 전적으로 담당하게 되었고, 남편도 나의 복직 전보다 할 일이 늘어 피곤하고 힘들어했다. 오전에 아이를 등원시키고 나서야 출근을 할 수 있었으니, 근무 시간을 채우려 밤에 늦게까지 일을 해야 하는 날도 많아졌다.


  피곤하니 아이와 놀아줄 때에도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 느껴졌다. 넋이 나가있고, 업무와 관련된 연락을 계속 주고받고, 하품을 하고, 건성으로 대답을 하는 엄마로 변해버린 나 자신이 싫어졌다. 맞벌이의 삶은 듣던 대로 전쟁이로구나 싶었다. 퇴근을 일찍 할 수 있어도 이런데, 다른 직장인 워킹맘들이 존경스러워졌다. 나 하나 복직했을 뿐인데 가족 모두가 전보다 힘들어졌다.


  같이 복직했던 선생님 한 분께서도, 첫째가 어릴 때 복직을 했다가 집안이 초토화되고 모두가 힘들어져서 몇 달 만에 다시 휴직을 했더니 가족 모두가 다시 평온하고 행복해졌다며, 지금 얼마나 힘들지 너무 잘 안다며 나를 격려해 주셨다.         


  그렇게 피곤에 쩔고 주중에 온전히 나만을 위한, 밀린 몇 백개의 카톡을 정독하거나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의 영상 한 편을 오롯이 볼 만한 자유시간이라고는 없는 눈물겨운 워킹맘 생활을 하는 나에게 가장 현타를 느끼게 하는 것은, 내가 예전부터 그토록 회의감을 느꼈던 쓸데없는 행정 업무였다.

  대표적인 것이 그저 ‘집행’을 위한 예산 책정과 사용이다. 예산이 잡혀 있고, 연말까지 깔끔하게 다 써야 하니 불필요한 곳에 예산을 쓰게 되고, 예산을 쓰기 위해 너무나 비효율적이고 하찮은 업무 과정이 수반되었다.  

  머리에서 물이 뚝뚝 흐르는 채 밤늦게 컴퓨터 앞에 앉아 내일이면 다시 수정될 의미 없는 엑셀 파일 작업을 하며, ‘내가 지금 이걸 왜 하고 앉아있지?’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너무 강하게 들었다.


  수업 준비도 마찬가지였다. 수업 준비를 하지 않고 버벅거리거나 대충 맨손 수업을 하면, 아이들은 귀신같이 알고 점점 간을 보고 무시를 한다. ‘재미없어요. 하기 싫어요. 이거 꼭 해야 돼요?‘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아이들도 있다. 고학년은 특히나 더 그렇기 때문에, 모든 수업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것이 내가 고학년을 잡는 방법 중 하나였어서 수업 준비에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이 초반에는 엄청났다.

  그런데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예전과 달라진 건지, 이 학교 학생들이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친구들 말을 들어보면 다들 그렇다고 하던데) 복직하고 만난 아이들은 수업 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학원 문제집을 푸느라 정신이 없었고, 어떤 학습 목표 도달을 위해 준비한 영상 자료를 보고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른, 필터링이 없이 쓸데없고 가끔은 예의 없기도 한 말들을 눈치 없이 내뱉곤 했다.


  수업 준비를 하기가 점점 싫어졌다. 이런 수업 태도를 지닌 학생들에게는 교사가 정성껏 준비하는 밀도 높은 수업이 아깝다고 느껴졌다. 이렇게 쉴 시간 잘 시간 줄여가며 수업을 준비하면 뭐 하나, 준비한다고 딱히 엄청 열심히 잘 듣는 것도 아닌데. 차라리 활동지나 몇 장씩 인쇄해서 전달식 수업 후 각자 활동지를 푸는 것이 서로에게 더 좋으려나 싶었다.


  그냥 모든 게 점점 하기 싫어지고 시간이 아까웠다. 나는 지금 내 인생에서 최고로 바쁘고 열심히 힘을 내서 살고 있는데, 일도 육아도 내 개인의 일상도 만족스러운 것이 없었다. 이 시간과 이 에너지를 내가 좋아하고, 관심 있고, 투자하기 아깝지 않은 곳에 투자하면 뭐라도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 이제는 역할이 여러 개가 된 나의 열정이 전과 같지 않은 것도 있었겠지만, 휴직 중에 고민했던 부분들과 맞닥뜨린 현실이 맞아떨어져 가며 점점 더 이곳을 벗어날 이유를 찾게 되었다.


  게다가 여전히 정수기 하나 없어 생수도 직접 배달해 마셔야 하고, 커피도 커피포트도 커피 머신도 없어 커피 한 잔도 직접 준비해야만 마실 수 있는, 아주 오래된 구식 전화기로 학부모와 통화를 하고, 매일 소음과 먼지 구덩이 속에서 일하는 근무 환경도 참 변하지 않는구나 싶었다.


  복직하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학교는 훨씬 좋고 아름다운 곳일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전혀 하지 않았지만, 마주한 현실은 나에게 그만둘 용기를 있는 힘껏 불어넣어 준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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