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이 거의 임박할 때까지 출근을 해서, 나의 육아는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됨과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 감사하게도 남편의 회사는 그 당시 이른바 ‘풀재택’ 근무 형태여서, 신생아 육아를 함께할 수 있었다. 임신 기간부터 가장 헬이라는 돌까지의 육아 기간 동안 남편이 주 5일, 적어도 3일 정도 재택근무를 할 수 있었어서(현재까지도 재택근무를 유지하고 있다. 남편 회사 좋은 회사!) 우리 가족은 코로나로 인한 재택근무의 엄청난 수혜자가 되었다.
주변에서 우리 아기를 ‘유니콘’이라고 할 정도로 순한 기질의 아기이기도 했고, 부지런한 남편이 항상 육아와 집안일을 분담해주기도 했고, 양가가 모두 가까운 편이라 반찬이나 집안일, 아기 돌보는 것 등 전반적으로 많은 도움을 쉽게 받기도 했어서 나의 휴직 라이프는 정말 천국, 헤븐, 극락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아기에게 온전히 나의 시간과 정신과 체력을 무한대로 쏟아부을 수 있다는 것이 그저 행복했다.
잠과 밥을 택하라면 고민의 여지도 없이 잠을 택하는 사람인 나는 학창 시절에도 잠이 너무 많아 친구들이 ‘넌 잠 못 자게 되면 진짜 죽겠구나’ 했었는데, 출산하고 나니 진짜로 친구들이 잠을 못 잘 텐데 아직 살아있냐는 걱정 섞인 안부를 물어왔다. 지금은 조금 미화된 기억이겠지만, 잠을 못 자도 너무나 행복하고 편했고 여유로웠다. 위의 여러 이유 때문도 있었지만, ‘학교를 떠났다는 것’도 엄청나게 중요한 이유였다.
휴직이 비교적 길고 자유로운 교사들도 아이가 하나인 경우에 출산하고 1년만 휴직하고 복직하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처음부터 2년으로 신청했다. 학교를 벗어나고 싶었다. 내 아이, 내 가족에게 긴 시간 몰두하고 싶었다. 딱히 힘들거나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적도 없었는데 학교를 벗어나고 싶었던 강한 열망, 그것이 내가 교직을 떠나게 된 시발점이었던 것 같다.
아이가 돌이 되었을 무렵, 친구들이 휴직 1년 정도 하면 지겹지 않느냐, 출근하고 싶어지지 않느냐 하고 많이들 물었다. 한결같이 내 대답은 “전혀.”였다. 그러면서 항상 덧붙인 말은 “학교에서 남의 새끼 보면서 감정 소모하는 것보다 내 새끼 보면서 행복한 게 훨씬 좋아. 휴직 안 끝났으면 좋겠다.”였다.
정말 그랬다. 육아가 수월한 것도 있었고, 해보니 내 성향과 아주 잘 맞는 것도 있었지만, 학교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나와보니 그간 교실 안에서 내가 얼마나 정신없고 부정적인 감정으로 충만한 일상을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비록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온몸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육아 휴직 기간에는 마음속에 나를 힘들게 하는 사건이 없었고, 자려고 누웠을 때에도 자꾸 생각나서 인상 쓰게 하는 불쾌한 감정이 없었다.
출근을 할 때보다 잠은 더 못 자고, 대화할 사람도 없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우울함이 느껴질 때도 가끔 있었지만, 아기와 단둘이 있으면 온 세상에 꼭 우리 둘 뿐인 것 같아 눈물 나게 행복했고, 매일 밤 이 시절이 영원했으면 하고 기도했다. 우리 부모님들도 이렇게 키우셨구나 하는 생각에 매일 새로운 감동을 경험하며 우리 엄마가 나에게 해줬듯이 정말로 정성을 쏟으며 아기를 키웠다. 불편할 만한 요소가 없는지 미리 파악하고, 신선하고 깨끗한 식재료를 사다가 정성껏 이유식을 만들어 먹였다.
남편은 고맙게도 언제나 나의 기분 전환용 외출을 적극 장려했지만, 결혼식처럼 꼭 가야 하는 일이 아니라면 혼자 외출도 거의 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혼자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산책하는 것이 나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는데 이제는 혼자 나가는 것보다, 친구를 만나는 것보다 아기랑 있는 것이 더 좋았다. 항상 밝은 표정과 목소리로 아기를 대하려고 했고, 있는 힘껏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아기는 건강했고, 잘 다치지 않았고, 잘 웃었고, 발달도 빨랐다. 육아를 하는 과정에서 무언가 나를 걱정하게 하거나 힘들게 하는 일들이 거의 없었다. 마음이 너무나 편안했다.
아기가 두 돌이 조금 안 되었을 무렵, 복직을 6개월 남기고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했다. 2년 동안 말 그대로 초 밀착 육아를 했던 나에게 드디어 자유시간이 생기다니! 이 6개월은 정말 나의 힐링을 위해 소중하고 귀하게 쓰리라 다짐했다. 일단 육아를 하는 사람들은 혼자 있는 시간이 매우 간절해진다. 먼저 혼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시작하기로 했다. 집에서 혼자 브런치도 만들어 먹고, 맛집에 가서 혼밥을 해보기도 했다. 햇볕이 좋은 날 혼자 나가 걷기도 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롯이 혼자 즐길 수 있는 두세 시간이 정말이지 꿀 같았다. 남편은 그때도 일주일에 며칠은 재택근무를 해서, 종종 둘이서 점심에 외식을 하기도 하고, 같이 뒹굴거릴 때도 있었다.
남편은 방에서 근무를 하고 나는 거실에서 책이나 영상을 보고 있을 때, 문득 남편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너무나 평온하고 고요했다. 자기가 맡은 일을 시간 내에 끝내면 어떠한 갈등도 일어나지 않았다. 5분마다 싸움을 중재하고, 똑같은 문제로 지적받은 지 24시간이 채 되지 않았는데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어린 인간들에게 샤우팅을 하고, 쉬는 시간마다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 시끄러운 학교 교실에서 일하는 나의 모습과 극과 극에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남편에게 회사 일 중에 어떤 게 가장 스트레스인지 물은 적이 있었다. 남편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딱히 없다고 했다. 상식적이고 책임감과 열정 넘치는, 최소 1인분은 하는(사실 모두가 그 이상을 한다고 했다.) 동료들과, 각자 가진 능력과 아이디어를 활용해 어떤 성과를 이뤄내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고, 쾌적한 환경과 합리적이고 유연한 근무 제도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누릴 수 있는 점 등 딱히 좋지 않을 것이 없다고 했다. 일을 할 때 부정적인 생각이 드는 것을 굳이 굳이 꼽으라면 그냥 직장인이라면, 사람이라면 일 안 하고 놀면서 돈 벌고 싶기에 막연히 ‘아, 출근하기 싫다.’ 하는 생각이나, 통근 거리가 먼 것 정도?
그 대화는 후의 나의 선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몇 달간 혼자만의 자유를 실컷 누린 뒤, 천천히 친구들을 만났다. 교사인 친구들은 점심시간에 밖에 나올 수 없으니, 일반 직장인 친구들의 회사 근처에 찾아가서 밥을 먹었다. 하루는 친한 고등학교 친구를 만나러 광화문에 갔다. 친구와 이런저런 근황 얘기를 하면서, 나는 남편에게 했던 질문을 똑같이 친구에게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친구의 대답이 남편이 한 것과 거의 같았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광화문 포비 앞 벤치에 앉아 나눴던 그 대화는, 또 그래서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남편과 친구의 회사가 좋은 회사에 속하는 편인 것도 있었지만, 다소 충격적이었다. 학교에 있을 때는 다른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제대로 볼 일이 없으니 느낄 수 없었는데, 그저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던 학교 안의 삶과 학교 밖의 삶이 너무 다르다는 사실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밖에서는 교사들이 교실도 혼자 쓰고, 아이들을 상대하니 비교적 편하고, 아이들이 집에도 일찍 가니 그 뒤로는 소위 ‘꿀 빨지 않느냐’, ‘밖에 나와 봐라, 밖은 전쟁터다’ 하는 인식이 있는데, 한 발짝 멀리 떨어져서 보니, 그야말로 그 안이 전쟁터였고 밖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물론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직업과 회사가 있고, 훨씬 힘든 일이 더 많겠지만 적어도 나와 가까운, 나와 비슷하게 살아온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분명 뭔가 달랐다.
그 시기에 얼굴 한 번 보자며 연락하는 교사 친구들은, 하나같이 꽤 힘들어 보였다. 코로나가 끝나고 다시 정상적인 학사운영이 시작되자 무언가 많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했다. 역대급으로 힘든 학기라고들 했다. 한 반에 이상한 아이와 학부모가 다들 여럿 있다고 했고, 수업이 진행이 안 되는데 점점 생활지도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지고 있어서 손발이 잘린 느낌이라고들 했다. 간혹 뉴스나 교사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사건의 당사자가 알고 보니 지인이라서 놀란 적도 있었다. 연락의 마무리 멘트는 다들 “너 복직하면 적응 안 될걸? 많이 즐겨 둬.”였다.
보통 교사들끼리 모이면 얼굴 보자마자 성토대회를 한다. 세상에 안 힘든 일이 당연히 없겠지만, 교사라는 직업은 방학과 이른 퇴근 시간에 가려진, 정신없이 숨 막히게 흘러가는 하루 일과를 직접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고충이 너무나 많다.
일단 각 반의 요주 인물들(학생, 학부모)이 어제오늘 또 몇 건을 했는지, 요즘 추진하는 업무 과정에서 어떤 불필요하고 납득이 되지 않는 언사와 행위가 있었는지, 1인분, 하다못해 0.9인분이라도 해 주면 좋으련만 꼭 그렇지 못한 동료(한 학교에 여러 명, 아니 요즘은 한 학년에 무조건 한 명은 있는-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도 잘릴 걱정이 없으니 그렇겠지?)가 오늘은 어떤 예상치 못한 행위로 나에게 추가 부담을 주었는지, “이거 완전 뉴스감 아니야?”, “요즘 세상에?”라는 말로 시작하는 관리자의 행태까지.
거의 불행 배틀 수준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토는 집에 갈 때까지 끊기지 않는다. 학교 안에서 동학년 회의나 부서 회의를 할 때에도, 교대 동기나 예전 학교 동료들을 만날 때에도 대화의 양상과 내용은 많이 다르지 않다. 학교 밖의 사람들과 대화할 때에는, 그들의 일에 대해 이렇게까지 다양하고 많은 길고 긴 불만을 들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직 기간 동안, 학교를 벗어나 있으면서 교사로 일하고 있을 때보다 다양한 곳에 가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재택근무하는 남편이 근무하는 모습도 오랫동안 봐 왔고, 다른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며 얘기를 나눴다. 또 엄마가 되어 육아나 교육에 관련된 새로운 분야를 다양한 방식으로 접하게 되었다. 문화센터, 요즘 핫한 영유아교육 시장의 다양한 콘텐츠와 프로그램들, 교구들, 맘 인플루언서들의 활동과 수익 창출 등.
교사라는 직업이 공교육의 테두리 안에 있다는 것 자체로 엄청난 어드밴티지가 있다는 것은 분명했지만, 지금은 시대가 변한 것 같았다. 무언가 전문적인 한 가지만 열심히 연구하고 노력하고 투자해서 기깔나게 잘해도 널리 인정받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는 세상인데, 시간은 교직에서만 멈춰 있는 것 같았다.
교육과정 분석과 구성부터 수업, 교구, 평가, 학급경영, 학부모와의 관계, 갈등 중재나 생활지도, 학년 업무와 부서 업무(그냥 ‘업무’로 뭉뚱그려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다양하고, 광범위하고, 너무 막중한 것들도, 자잘한 것들도 많은-예를 들면 교사가 물건도 일일이 가격 비교해서 사야 하고, 사업을 맡으면 업체선정위원회를 열어 심사도 해야 하고, 각종 강사를 채용하고 그들에게 월급도 줘야 한다. 교사는 가르치는 게 가장 주 업무인 것 같은데, 정작 가르침을 준비할 시간은 매우 부족하다.) 등 그 많은 일들을 통제가 점점 어려워지는 아이들 30여 명과 함께하면서 매일 해내야 하는데(심지어 부장을 맡거나, 학교 규모가 작다면 몇 제곱은 더 힘들어진다.) 그에 따르는 보상은 물가상승률과 그들이 가진 능력 및 성실성에 비해 턱없이 적고, 해가 갈수록 전문성과 보상이 커지기는커녕 주어진 그 많은 것들을 무사히 수행해 냈을 때 더 큰 일과 더 어려운 학급이 주어지는 ‘호구’가 될 뿐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토로하면, 마치 정해져 있는 듯 돌아오는 말은 '그래도 방학 있잖아. 부럽다.', '그래도 일찍 퇴근하잖아.' 류의 위로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말들 또는 그 유명한 만능 답변 '누칼협'일 뿐이다.
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지도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휴직을 해버렸고, 달콤함을 맛봤고,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내 기준에서’ 교사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목격했다. 반면, 교사가 이런 건 훨씬 낫지 싶은 건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물론 육아에 있어서는 비교불가로 좋은 직장이지만 다행히 우리는 남편의 회사가 육아에 친화적이고 유연하게 근무 시간을 조정할 수 있어서 그 부분에서는 포기도 감수할 만했다. 요즘은 사회적인 분위기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지고 있어 대부분의 기업들이 점점 선택근무제나 재택근무 등을 실시하면서 근무 시간을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고, 방학이 교사의 가장 큰 메리트이긴 했지만, 교사 일을 하다 보면 ‘방학 없어도 되니 제발 이런 것 좀 그만하고 싶다’ 거나 ‘방학 때 더 일하고 돈을 더 받고 싶다’라는 생각이 항상 들었으니 오히려 근무 환경이 쾌적하고 조직 문화가 개방적인 곳에서 일하는 것이 훨씬 행복할 것 같았다.
학교에서는 일을 하면서 '도대체 지금 이 일을 왜 하지?', '이 내용을 이렇게 오래 회의할 필요가 있나?', '이걸 왜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하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그렇지 않을 때보다 압도적으로 더 많았는데,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그에 따른 성취와 보상을 충분히 느끼고 얻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들이 사회에는 수없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학교는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만한 요소가 너무나 가득한 곳인 것 같았다.
휴직이 끝나갈수록,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 단 한순간도 학교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아직까지는 전업주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내 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자리가 학교가 아닌 다른 곳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점점 자리 잡았다.
요즘에 들어서는 점점 젊은 층에서 늘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교직 사회에서 사직이나 이직은 매우 드문 케이스다. 남편과 교사라는 직업의 미래에 대해, 나의 현재 마음에 대해 많은 대화를 했는데, 냉철하고 효율을 중시하는 성향의 남편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보다는 아니다 싶을 땐 미련 없이 그만두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했다. 광화문에서 만났던 친구도 내가 말한 불만이나 고민들이 그 일에서 얻는 게 있고 보람도 느끼면 감수할 수도 있는 부분인데, 교사는 이제 보람이나 성취, 보상 같은 것은 없고 정신만 갉아먹는 일이 된 것 같아 그런 생각이 든다면 그만두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했다.
교사를 그만둔다는 것을 상상만 해 보았지 실제로 실행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복직이 하루하루 가까워 올수록 마음이 점점 이상하게 진짜 저지르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