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모든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커피를 마신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커피를 내린다. 먼저 수돗물을 끓인다. 물이 다 끓으면 그 물을 잔에 따라 둔다. 잔을 데워두기 위해서다. 필터도 적셔준다. 남은 물은 버려주고 이번엔 생수를 끓인다. 생수가 다 끓으면 커피가루에 천천히 물을 부어준다. 일요일엔 커피가 제대로 부풀어 오른다. 목요일쯤 되면 거의 부풀지 않는다. 그래도 커피는 필요하다. 커피를 내리느라 지각을 하는 날도 있지만 까짓것 감수하면 그만이란 생각이다. 인생은 어차피 다 선택 아닌가.
점심엔 밥을 먹고 단골 카페에 간다. 카페 직원은 내 번호 뒷자리를 외우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엄마랑 애인 말고도 휴대폰 번호 뒷자리를 외워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복된 삶인지. 항상 <오늘의 커피>를 아이스로 시킨다. 오늘의 커피는 내 생각엔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메뉴명이다. 도시인의 삶을 영화로 만든다면 제목의 자리를 꿰차기에 부족함이 없는 단어. 오늘은 얼마나 향기로울까요. 오늘은 얼마나 몸에 해로울까요. 오늘은 얼마나 피곤할까요. 오늘은 얼마나 정신을 차려야 할까요. 오늘은 얼마나... 우리는 이 모든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커피를 마신다. 점심시간에 마시는 커피가 주로 묻는 질문은 이것이다. 이제 좀 살겠나요?
저녁엔 회사의 커피머신에도 기회를 줘 보기로 한다. 회사의 커피머신에 들어가는 원두는 유명한 카페에서 3일마다 큐레이션 해서 보내준다. 그런데도 지독하게 맛이 없다. 이 커피에 담긴 의도가 일과 관련되어 있어서일까. 하긴, 회사에선 잠을 자도 영 찌뿌둥하다. 그런데 지금 커피를 마시면 잠은 언제 자게 되는 건가. 아니, 집은 언제 가게 되는 건가. 혹시 회사에서 자게 되는 건가.
저녁에 회사에서 커피를 먹다 보면 커피에 대한 오래된 비유, <사약>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사약의 사는 죽을 사가 아니라 사할 사, 그래서 사약은 ‘임금이 주는 약’이라는 뜻이 된다. 먹는다고 바로 죽는 것도 아니어서 죽을 때까지 몇 사발씩 먹어야 했다고. 저녁마다 회사 탕비실에서 커피를 타먹는다. 하루 종일 커피만 주구장창 마신다.
-일러스트레이티드 에세이 <때려치지 않는 사소한 이유>는 매주 월, 수, 금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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