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루하루 일상은 활기차게 돌아갔다. 오로지 나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회사를 찾아오는 바이어가 생겨나기 시작하자 나의 한국에서의 직장생활은 더없이 순탄했다.아니 이런 경우를 승승장구한다고 말을 해야 하나.
가뜩이나 가진 것이라고는 자신감밖에 없던 나의 자존감에 더한 날개를 더해 주었다.
공식적인 퇴근 시간은 7시였지만 그 시간이 지켜지는 날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오더가 들어간 물량이 나오는 날이 되어 딜리버리를 할 시간이 되면 사무실은 분주하게 바빠진다. 예정에 없던 불량제품이 들어있으면 그걸 다른 제품으로 교환을 해 줘야 했다. 바이어의 모든 불만은 오더를 받은 나에게로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비행기 시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물건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예민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딜리버리 할 당일 날 공장의 사정으로 제대로 물건이 나오지 않는 날이면 모든 불평의 안 좋은 소리는 나에게 돌아왔고, 그들을 어르는 것도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서 나는 오너보다 더 바이어의 입장에서 그들을 대변하고 품질을 확인해 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날도 캄차트카 반도에서 온 바이어의 물건이 제시간에 나오질 않았다. 나는 그냥 들어가 버리면 그만이었지만 손님을 데리고 올 줄이나 알았지 제품의 품질이나 그 밖의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친구 덕에 내가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물건이 오기 전까지 속이 타 들어간다. 계속되는 바이어의 전화는 온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고 나는 또 오너에게 또는 공장 사장님에게 이리저리 전화를 돌린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나의 일상이다.
새벽 4시가 거의 돼서야 주문한 물량이 도착했다. 기다림에 지친 바이어들을 찾아가니 처음에는 그들도 심기가 좋지는 않았지만 거듭되는 나의 사과에 그들의 마음은 누그러지고 나중에는 오히려 나를 고마워했다. 책임지고 그 시간에 딜리버리 해 준 그들에게는 어찌 보면 그 세계에서 비일비재하던 일들에 반해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나둘씩 그들은 나의 사람이 되어갔다.
거침없는 나의 성격이었지만 오너들은 나의 그런 성격을 감당하기 힘들어하면서도 한 편으론 든든해했다.
누군가의 소개로 나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다.
워와 아저씨!!! 크라스나 야르스크의 거상이었다.
그 당시 러시아 시장에서는 이런 거상들을 상대로 엄청난 로비가 들어가곤 했는데 이 아저씨 스스로 나에게 찾아온 경우다. 한눈에 봐도 점잖고 사람 좋게 생긴 러시아 보통의 배 나온 아저씨였다.
러시아 시장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한 번 다녀가고 나면 한 달 회사 경제가 달라질 정도였다.
대부분의 러시아 거상들은 한 군데가 아닌 여러 군데 자신의 거래처로 확보하고 있었는데 그중의 나의 회사도 그의 거래처로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누구를 통해서 나를 알게 되었냐고 했더니 통역을 같이 했던 제냐의 회사에서 일하는 레나가 나를 소개해줬다고 했다.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사람이 나를 소개해주는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들을 모르지만 그들은 나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런 일은 앞으로도 계속 일어났다.
이런 거상을 만나면 접대가 큰 문제였다. 술 좋아하고 사람들 좋아하는 러시아 사람들 특유의 기질 때문에 그 당시에는 오더가 성사되고 나면 그다음은 저녁으로 이어지는 술자리가 비공식적으로 만연하던 시절이었다.
공과 사가 확실한 사업방법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정에 의한 비즈니스 방식이었다. 장단점은 분명히 있었다.
워와는 처음부터 우리 회사에서 그렇게 큰 오더를 하지는 않았다. 소위 말하는 간 보기였다.
워와는 내가 러시아 시장인 그곳에서 나의 사업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내 사람이 되어 준 사람이었다.
자기 같은 거상들은 러시아 마피아 상대로 표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아파트에도 러시아 마피아들이 도청장치를 달아 놓고 있다는 소리도 했었다. 무섭지 않냐고 물어보니 삶은 삶이지 않냐고 어찌할 도리가 없지 않냐고 삶이 이어지는 그 순간까지그저 살아가는 거라는 철학적인 말로 나를 감동시켰다.
그 당시 러시아 상인들 중에 이르쿠츠크 출신의 여자 거상이 공항에서 집으로 오던 중 마피아의 총격에 피살되는 사건도 빈번하게 일어났었다.
내가 회사를 옮길 때마다 나의 뒤를 따라오던 사람이었는데 이런 거상들은 옷의 디자인에도 관여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디자인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 문제가 간단할 것도 같지만 가죽의 단가가 워낙 비싸서 무모하게 시도하기를 공장주들은 꺼려하기도 했다. 성공하면 좋지만 생각보다 판매가 되지 않으면 공장주들의 위험은 어마 하기 때문이었다.
젊쟎고 말이 별로 없었던 워와 아저씨는 나와는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그저 간단한 저녁식사로 때우고 그저 이런저런 이야기 하는 걸 좋아했는데 그것도 주로 사무실 안에서 이루어졌다. 다른 이들과는 다른 내가 신기했는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냉정하고 차가워 보이는 나와 워와는 시크한 손님과 시크한 파트너였다.
어느 한 날 차를 타고 같이 갈 경우가 생겼을 때, 워와는 나에게 이 조금 한 나라가 대단하다는 식의 조금은 빈정 상하게 말을 했다. 자신의 나라보다 훨씬 작은 내 나라에 대해 말하며 은근히 러시아가 대국인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기분 상한 나는 그렇게 대단한 지구의 반인 너네 나라에서 이 자그마한 나라에 와서 그 많은 물건들을 사 가는 건 어떻게 생각하냐고..... 말문이 막힌 워와는 내가 귀여웠는지 예의 아저씨 같은 웃음으로 받아친다.
그에겐 나는 더 이상 작은 나라의 조그마한 여자가 아니었다.대국의 사람 좋은 거상과 소국의 까칠한 여자는 그렇게 좋은 파트너가 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