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이주 Jan 09. 2024

어른이 우화를 봐야 하는 이유

땅으로 내려오면 보이는 것들

오랑우탄은 웅크린 채 구석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고함을 지르고 유리문을 탕탕 두드려도 가만히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동물들도 꿈을 꿀까?
「동물원」 앤서니 브라운



우화를 좋아한다. 문장으로 놓이면 뻔해 보이는 의미도 이야기로 전하면 마음에 다르게 새겨진다. 느리지만 고집스러운 거북이가 토끼를 제치는 역전스토리는 '성실하면 이룬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다. 스토리텔링이 곧 역사인 호모 나렌스다. 이야기의 교훈이 현실 가능한 지 확인하고 픽션의 한계를 지적하거나 시대에 맞게 다른 결말을 상상하기도 한다. 사실 거북이처럼 묵묵하고 성실하기만 한 캐릭터를 멘토로 삼기에는 능력이 타고난 토끼가 때마침 낮잠에 든 우연성을 무시하기 어렵다.


나는 일종의 극장용 우화 MCU(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 시리즈를 즐긴다. 비현실적 초능력자의 고민과 갈등이 역으로 현실과 닮은 점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유난히 몰입해서 챙겨 보는 시리즈는 엑스맨이다. 엑스맨의 육체는 평범한 인간이 감당 못할 상처를 견뎌내지만 그 대가는 고독이다. 악당을 처리하는 킬러의 삶의 이면은 쓸쓸함이 가득하다. <엑스맨:퍼스트클래스>는 텔레파시로 인간의 마음을 조종하는 프로페서 X와 금속을 제어하는 매그니토가 세계 곳곳에서 차별받는 돌연변이를 모아 학교를 세우는 내용이다. 두 지도자는 돌연변이와 평범한 사람의 공생 가능성을 두고 갈등한다. 두 가치관의 충돌은 되려 다양성이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소수자들의 연대가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고 그 사회가 서서히 분열하는 과정을 여실히 재현한다. 화려한 시각적 볼거리로 포장한 영화는 엑스맨 칼날만큼 매서운 메시지를 전한다. 나는 엑스맨을 챙겨 보면서 본격적으로 초능력자 이야기를 우화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왼)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 (오)

지난해 개봉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는 외계인, 지구인, 말하는 동물들이 주인공이다. 은하계 어딘가에서 악당을 물리치며 가족이 되는 가디언즈다. 3편은 가디언즈의 센터, 라쿤 '로켓'을 잔혹하게 생체실험한 하이 에볼루셔너리 구축 기지에 잠입해 실험생명체를 구하는 내용이다. 이 오락영화가 나에게 깨달음을 안긴 순간은 영화 말미였다. 가디언즈는 잠입에 성공하고 감금당한 지적생명체를 모두 빼내 도망치려고 한다. 로켓은 가디언즈 친구들에게 부탁한다. 하찮아 보이는 작은 생명까지 전부 가디언즈 함선에 태우자고. 포유류인지 양서류인지 무척추동물인지도 알 수 없는 괴기한 생명 모두를. 결국 로켓과 가디언즈는 한 마리도 빼놓지 않고 탈출시킨다.


나는 반려동물과 한집에 살면서 나름 인간이 아닌 생명체를 대한 태도가 성장했다고 자부했다. 동물과 교감하며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 변했고 예전의 나와 닮은 사람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움에 가르침을 일삼으며 교활한 뿌듯함도 느꼈다. 그런데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괴기한 라쿤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더 소중하거나 덜 소중한 생명은 없다" 생명을 네 기준대로 범주화해서 위계를 나누지 말라고 말이다.  


수요일마다 만나는 3학년 지우는 동물애호가다. 반려동물을 키우거나 시골에 산 경험도 없지만 종이만 있으면 동물을 그린다. 목이 긴 기린, 코끼리 가족, 지구 어딘가에서 마을을 이루고 있을 것 같은 유니콘까지. 말이 없다가도 대화주제가 동물이 되면 조잘조잘 동물을 향한 애정을 표현한다. "동물은 더럽고 멍청해. 인간과 살 수 없어" 누군가가 동물을 무시하는 말이라도 하면 어깨를 들썩이며 분을 참지 못한다. 어느 날 지우가 결연한 표정으로 비둘기이야기를 꺼냈다. "길을 걷다가 비둘기를 만나도 저리 가라고 소리 지르면 안 돼요" 교실에 새가 날아간 것처럼 모두 조용해졌다. 지우는 말을 이어 나갔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비둘기가 무서워서 소리를 꽤액 질러 쫓아냈어. 하지만 왜 비둘기는 도망치지 않고 내가 가는 길을 막을까 궁금해서 유심히 지켜봤어. 계속 보다 보니 비둘기도 강아지, 곰돌이처럼 기분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것 같았어. 강아지가 산책을 하고 인간이 뛰는 것처럼 비둘기도 그냥 땅이 있어서 걷고 하늘이 있어서 나는 것뿐이었어. 그런데 우리가 불편하다고 소리를 지르면 비둘기는 슬플 거야."


나는 일상에서 공고해진 편견을 부수고자 우화를 봤다. 현실의 삶에서 떨어졌다가 현실의 삶으로 돌아오면 눈눈이 맑아지며 개운해졌다. 하지만 지우는 일상에서 답을 줍고 검산하며 시야를 넓이고 있었다. 스스로 미워하는 마음을 관찰하고 그 마음을 의심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해학과 풍자로 생각할 거리를 주는 우화를 매주 읽어야 하는 건 아이들이 아닌 어른일지도 모른다.

지우가 그린 동물들

건물을 지으면 시간이 쌓일수록 높아진다.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꼭대기가 땅에서 멀어진다는 뜻이다. 건물이 높아질수록 아래가 훤히 보이는 듯 하지만 되려 발 딛고 사는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기 어렵다. 동네의 작은 소식은 잘 들리지 않는다. 내가 지우보다 오래 산 만큼 쌓은 삶의 건물은 높다. 하지만 층수가 더 높아서, 더 많이 보여서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내가 지우보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문장을 훨씬 많이 만났을 것이다. 오래 살았으니까. 하지만 당연한 의미를 자꾸 지워내고 돌고 돌아 다시 이야기에서 찾아낸다. 어른이 내가 지면에 쓰인 당연한 진리에서 멀어지는 동안 아이 지우는 자기감정에 충실히 집중해서 근원을 되새김질해 낸다. 내가 아이들에게 삶을 배우는 이유다.


의식적으로 땅으로 내려오는 노력을 해야겠다. 나의 하강을 도와줘서 고마워요.

엑스맨, 라쿤, 그리고 멋진 아이 지우.




* 커버 이미지 :

https://www.instagram.com/gonggan_tamgoo/

https://www.disneyplus.com/ko-kr/movies/x-men-linizio/15ELm1fiAfKq

이전 03화 나랑 사귈래? 프로젝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