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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이주 Jan 08. 2024

나랑 사귈래? 프로젝트

아이들의 사랑표현

나는 상냥한 고양이와 함께 까치밥나무즙을 먹고 있어. 고양이네 집은 아름다운 자작나무 숲 속 덤불 아래에 있어. 내일은 늦잠을 잘 거야. 꿈속에 네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조금만 기다려, 나의 새야, 내가 곧 갈게, 너의 곰이.
「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 고티에 다비드



황금색 보자기에 싸인 묵은 8mm 테이프를 발견했다. 운동장에서 타임캡슐을 밟은 기분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디지털 파일로 변환하고 재생했더니 시절의 순간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십 세기가 막을 내리고 온 세상이 새로운 밀레니엄을 준비하던 1999년.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내 생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설렘이나 부끄러움 같은 간질간질한 마음을 느끼게 된 것이다. 같은 반 황태연은 천천히 말하고 할 말이 없으면 미소를 잘 짓는 아이였다. 태연과 눈을 마주치면 작은 애벌레가 좌심방 우심방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듯했다. 하지만 좋아해도 숨길 자유는 있다. 나도 형용하기 어려운 정체 모를 이 마음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름 명연기를 펼쳤는데 친구들은 다 알았다. 내가 틈만 나면 종이에 구멍을 내려는 태양 빛처럼 태연이의 뒤통수를 응시했으니까. 한 줄기 빛은 반을 환하게 만들 만큼 밝았다.


겨울방학을 앞두고 내 생일이 다가왔다. 엄마는 미륵사지 석탑처럼 김밥을 쌓았고 사골을 끓이는 깊은 냄비에 떡볶이를 조렸다. 오빠는 동네 제과점에서 케이크와 쿠키를 사 왔다. 제사 지낼 때 꺼내는 정사각형 나무 상을 거실 가운데 놓고 닦았다. 친구들은 해피 버쓰데이 투유에 맞춰 박수를 치고 색연필, 종이 인형, 스티커, 이 삼천 원짜리 선물을 건넸다. 키즈카페나 마땅한 어린이 파티 시설이 없던 그 시절에는 어린이 입맛에 맞춘 엄마표 요리와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린 vhs비디오로 파티는 완성되었다. 친구들은 내 생일에 나와 태연을 커플로 만들 셈이었다. 우리 집으로 오늘 길에 태연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사게 했다. 장미꽃을 건넬 때는 나와 포옹까지 시켰다.


용돈을 모아 소니 캠코더를 산 오빠 친구는 구석에 서서 우리를 찍었다. 오빠가 농구화를 빌려 주기로 하고 온 것이었다. 99년 겨울의 어느 날이 담긴 8mm 테이프는 내 어릴 적 물건들과 뒤섞여 보자기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 그리고 이십여 년 후 다시 재생됐다. 볕이 들지 않는 장롱만큼이나 깊은 해마 저장소의 기억도 버튼을 누른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친구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 하니 착한 마음으로 장미를 산 태연이의 멍한 표정과 장미를 받고도 좋아한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내가 있었다. 나는 천 원짜리 장미 한 송이를 겨우내 화병에 꽂아 두었다. 꽃잎이 바삭하게 시들어 가고 5학년 반배정에서 태연이와 다른 반이 되면서 나는 서러운 눈물도 흘렸다. 그런데도 쿵쾅대는 심장 bpm의 정체가 이상한 기분이라고 착각했다.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단어와 연결 짓지 못했다. 사랑은 어른이라 불리는 나이가 되어야 흘러나오는 호르몬이고 사귄다는 약속은 운전면허증처럼 어른이란 자격이 부여되면 따는 자격증인 줄 알았다.


“선생님, 저는 아직도 모쏠이에요” 올해 두 자릿수 나이가 된 3학년 민수가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푸념한다. 아이들이 거침없이 ‘사귄다’는 말을 꺼낼 때마다 제법 당황스럽다. 개구리가 된 나는 올챙이 적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런데 요즘 올챙이들은 어쩜 이리 당차고 거침없을까. 사귄다는 행동이 무엇인지 알고 부러워하는 걸까. 나도 아직 그 관계의 의미를 정확히 정의 내리지 못하고 방황하면서도 괜스레 어른의 눈으로 거만한 생각을 해본다.


“저는 오늘부터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너 나랑 사귈래 프로젝트입니다!” 나와 민수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수연이가 외쳤다. 교실에 있던 우리는 눈이 땡그래져 수연이를 쳐다봤다. 수연은 이어 말했다. “민수야, 나도 모쏠이잖아? 그래서 어젯밤 엄마랑 아빠랑 ‘이수연은 왜 남자 친구가 없는가’ 주제로 긴급회의를 열었어. 없으면 찾아서 만들면 된다고 결론이 났지. 그래서 오늘부터 적극적으로 찾을 거야.”


때마침 조금 지각한 재원이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야, 이재원. 너, 나랑 사귈래? 아님 말고. 다른 애한테 또 물어보면 돼” 아무것도 모른 채 갑작스러운 고백을 들은 재원이가 얼굴이 시뻘게지고 말을 더듬거렸다. “뭐.. 뭐야! 내가 너랑 왜 사귀냐! 세.. 세상이 망하게 되면 그때 생각해 볼게” 재원은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했다. 그러자 수연이는 일이 쉽게 풀린 다는 듯 환히 웃었다. “지금이 딱이네! 코로나로 세상이 망해가잖아. 오늘부터 1일?” 수연이 뒤에서 태양같이 큰 후광이 비쳤다. 나보다 키는 20cm나 작지만 자신감의 크기는 몇 미터가 커 보였다. 감정이란 생에 축적된 시간과 비례하는 어수룩한 것이 아니었다. 1999년의 나는 ‘아이’라 서툰 게 아니라 ‘어른’이 되어도 여전한 그냥 내 모습이었다. 돌아보니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이십 대가 되어서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소심한 태도였다.

아이들의 옷에서 사랑(LOVE)이 많다.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하는 태도는 수연이뿐만 아니다. 나는 아이들과 공감각적 표현놀이를 자주 한다.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교과서에서 한번쯤은 봤을 문학시험 단골문제다. 미각, 후각, 시각, 청각, 후각 중 두 개 이상을 사용하는 문학적 표현이다. 시를 그리 좋아하진 않았지만 심상을 해석하는 문제는 언제나 환영이었다. 종소리가 푸르다니? 초생달이 시리다니? 얼음을 깨물 때나 이가 시린 줄 알았는데 파란 달을 보고도 시릴 수 있구나! 모호해서 정확한 게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아이들과 자주 하는 단골 놀이가 됐다. 말이 안 되는 말을 묘하게 말이 되는 말로 감동을 주는 재주는 '아이'들을 따라 올 작가가 없다.


놀이기구 타는 기분을 소리로 표현하면?


"할아버지가 사는 시골에 가서 오토바이를 탄 적 있어요. 할아버지 뒤에 탔는데 차 탈 때와 달랐어요.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다 들렸어요. 그래서 놀이기구를 타면 오토바이 소리가 떠올라요"

"동굴 소리가 나요. 고수 동굴에 갔는데 말이 웅~하고 울렸어요. 저는 놀이기구를 타면 귀가 먹먹하거든요"


아이들은 그 감정에 가장 어울리는 경험을 찾기 위해 집중한다. 선택한 경험이 제일 적당한 지 판단하고 자신이 느낀 그대로 친구들이 상상하도록 말해본다. 상상의 힘이 커지고 표현의 근육이 단단해지는 놀이다. 나는 아이들의 표현을 듣고 싶은 사심을 가득 담아 마지막 질문을 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감정은 무엇인가요? 공감각으로 표현해 봐요. 뭐든 좋아요


지오가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내 사랑의 향기가 좋아요"

사랑의 향기라니. 그건 무엇일까? 얼마 전에 집들이 선물로 받은 조말론 바질 앤 라임향일까, 나만 알고 싶은 작은 카페의 커피 향일까, 나의 고양이 발바닥 꼬순내일까. 순식간에 나의 최애 향들을 떠올렸지만 지오의 대답에 모두 비켜나갔다.


"내 여자친구를 사랑해요. 저는 그 애를 '나의 사랑'이라고 불러요. 그러니까 나의 사랑을 떠올리면 '나의 사랑'의 향이 떠올라요. 그 향기가 좋아요"


'나의 사랑'의 향이면서 나의 '사랑'의 향도 될 수 있는 중의적인 표현이었다. 친구들은 오글거린다며 야유를 보냈지만 지오는 굴하지 않고 거침없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확신에 찬 입술로 꺼냈다. 나는 내 사랑을 이렇게 달콤하게 표현해 본 적이 있었나. 상처받을까 두려워 방어적인 태도로 상대를 살피거나 낭만보다는 현실을 쫓으며 나를 채찍질했던 기억이 더 많다. 사랑하는 이의 숨소리에 귀 기울이고 향에 집중하며 온전히 내 마음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나.


오늘도 배웠다. 열 살 수연이의 프로젝트와 아홉 살 지오의 확신찬 사랑 덕분에 내면을 외면하지 않고 표현하는 건강함을 얻었다.

                    



* 커버 이미지 : https://www.instagram.com/gonggan_tamgoo/ 
https://smartstore.naver.com/kidaribook/products/4094858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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