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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이주 Dec 31. 2023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우린 모두, 아이였다

천재란 의지에 따라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샤를 보들레르


기말고사 마지막 날, 이른 오후의 하굣길은 바람마저 후련했다. 고등학교에서 집으로 가려면 다니던 초등학교를 지나야 했다. 자율 아닌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집에 갈 때는 10시가 넘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은 시컴했고 교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하지만 점심도 먹지 않고 일찍 끝나는 시험기간에는 평소와 다른 생경한 풍경을 만났다. 움직임이 가득한 교문 안에서 초등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방이 커서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어린아이들에게 시선이 갔다. 공부하느라 애썼으니 네가 좋아하는 귀여운 존재를 실컷 보렴, 누군가 나에게 몽글한 보상을 하는 듯했다. 내가 그만한 나이에는 더 어렸던 유치원 아이들을 귀여워했다. 균형 잡기 힘든 삼등신 몸의 비율을 껴안으며 ‘너희들 크면 줄 서서 급식 먹어야 해’ 놀렸다.


아이를 좋아한다. 사람의 얼굴도 완벽한 균형에서 살짝 틀어져야 매력적이듯 미완성된 작은 인간을 애정한다. 길에서 마주치면 나의 광대가 승천하고 고개를 비틀며 애정하느라 눈을 떼지 못한다. ‘안긴의 유일한 의망은 아이’라고 자조 섞인 농담도 한다. 자연스레 그들의 세상을 탐구하게 됐다. 지난날 아이였지만 자연의 시간에 따라 어른이 된 어른아이가 호기심 가득 담아 아이를 관찰하고 삶을 배운다.


토요일 저녁, 느리게 음식을 만들고 정성껏 밥상을 차리며 쫓기듯 채운 평일의 속도를 늦춘다. 양손에 종량제 봉투 가득 채워 집에 가는 길. 빠삐코 하나 입에 물고 놀이터 벤치에 앉아 가만히 멍 때려본다. 직장인에게 단 몇 시간 허락된 느린 시간. 아이들이 뛰어논다. 어른의 세상보다 중력이 약한 듯 움직임이 가볍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 빨간색 바지를 입은 아이의 까랑까랑한 목소리에 나머지 아이들이 오선지 음계같이 따라붙는다. 시설거리는 형형색색 옷들이 싱그럽다. 회사와 지하철, 나의 일상에는 없는 색이다. 술래가 ‘다’를 외치며 소리의 울림을 끝내자 동글 둥글 음표들은 일제히 동작을 멈춘다. 술래와 시선을 마주친다. 웃음을 참는 입꼬리, 말똥말똥한 눈 마주침, 그 사이 흐르는 유쾌한 긴장감. 나는 이토록 기분 좋은 긴장감을 언제 느껴 보았나 헤아린다.


한편에는 새벽에 내린 빗물이 초록색 우레탄에 고여 웅덩이가 생겼다. 물 위로 아슬아슬하게 엉덩이가 스쳐간다. 하늘에서 동시에 만나면 안 되는 운명인 것처럼 그네 두 개가 엇갈리며 아날로그 메트로놈처럼 박자를 만든다. 한 아이가 그네에서 몸을 빠르게 꺼내 땅에 착지한다. 바닥에 떨어진 노란색 나이키 운동화에서 자신감이 겉돈다. 옆에 앉은 친구도 몸을 앞으로 내밀며 공중에 맡겨 보려 하지만 두려움에 움찔한다. 운동화를 신은 아이가 나이키 광고 주인공처럼 말한다. ‘별 거 없어. 팔부터 꺼내고 뛰어내려, 할 수 있지?’ 그네 위에 앉은 아이는 그네 속도를 늦추더니 ‘고마워. 그런데 아빠랑 연습하면 돼’ 말하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뜬다.


놀이터 한가운데는 6학년 무리가 있다. 꼬장꼬장하고 여유 있다. 고학년에게 놀이터란 저학년과는 다른 공간처럼 보인다. 책상에 앉아 분출하지 못한 에너지를 푸는 곳이 아니다. 다이소나 아트박스, 피시방을 가기 전에 모인 만남의 광장이다. 남자아이들은 바퀴가 큰 어른 자전거에 올라 타있거나 발과 손으로 능숙하게 축구공을 다룬다. 한 아이는 지난달 출시한 아이폰을 들고 있다. 꽉 쥔 손끝은 친구들의 부러움에 만족스럽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익숙한 풍경에 나의 어린 시절도 재생된다.


나도 아이였다. 몸은 작았지만 감정의 결은 우주만큼 넓었다. 사람을 좋아하고 미워했으며 상처받고 복수를 다짐하기도 했다. 용서하고 반성했으며 배우고 가르쳤다. 여느 어른처럼. 어느덧 진짜 어른이라 불리는 나이가 됐지만 달라진 게 없어 얼떨떨하다. 가끔 세상을 더 알게 된 듯 착각에 빠지지만 이상하게도 가야 할 길은 더 뚜렷해지긴커녕 흐릿하다. 경험과 지식의 총량이 지혜와 비례하지만은 않는다. 되려 아이들의 슬기로운 판단에 놀랄 때가 많다. 희미한 경계에서 부유하는 나에게 아이들이 곧 강형욱이고 오은영이다. 내가 매일 만나는 아이들은 어른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꿀팁을 선사한다. 올바르게 친구를 사귀는 법, 먼저 사과하는 법, 상처받은 감정을 살피고 회복하는 법, 진심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법. 어른의 성장에도 ‘아이’가 필요하다.

어른의 말과 행동도 그들의 삶에 영향을 준다. 햇빛과 물이 되어 아이들에게 무섭게 스며드는 광경을 목도한다. 강한 햇볕은 싹을 바싹 마르게 하고 시원한 물은 뿌리까지 촉촉하게 만든다. 내가 아이들에게 삶의 힌트를 얻는 만큼 되돌려주고 있을지 가늠하다 보면 덜컥 겁이 난다. 우린 마치 하나라도 고장 나면 망가지는 생태계처럼 유기적이다.


아이였던 나와 어른이 된 내가 만나 성장하는 순간을 공유하고자 한다. 나의 기록을 읽는 모두 아이였던 그날을 떠올리며 어른으로 살아갈 힘을 얻는 감사한 일이 벌어지길 바란다.



* 커버 이미지 : https://www.instagram.com/gonggan_tamg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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