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말이 유익균이 되어야 하는 이유
언어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중요한 것이란다. 언어는 누구에게나 필요하지.
생각하는 데도, 글 쓰는 데도, 꿈을 꾸는 데도, 뭔가를 바라거나 기도하는 데도 쓰이지.
「프린들 주세요」 앤드루 클레먼츠
고백하자면 나는 고상하고 격조 있는 사람은 아니다. 옛 친구들을 만나면 가끔은 비속어가 재채기마냥 튀어나온다. 교복과 체육복을 이상하게 섞어 입은 여고생이 등장하고 언어습관도 그 시절로 후퇴해 버린다. 그래도 매년, 아니 매 계절마다 다짐한다. "나잇값 해야지. 예쁘게 말하자."
지난 주말, 이십 년 세월을 주거니 받거니 채운 친구들과 연말 모임을 가졌다. 삼각지 3번 출구 간판 없는 식당. 음식빛깔이 선명하고 흐르는 음악도 정성스러웠지만 가격은 비호감이었다. 음식을 적당히 허기진 배와 아이폰 앨범에 나눠 채우고 맛도 음악도 자극적이지만 가격은 착한 역전할매로 자리를 옮겼다. 야자시간 감독 선생님 몰래 동방신기 녹화방송을 보다 걸려서 호되게 혼난 여름밤이 소환된다. 고데기로 사자머리를 따라 하다 이마가 데고 춤을 추다 넘어진 순간들은 이제는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우리의 관계를 그대로 묶어두는 끈이 되어준다. 선망하던 연예인의 이미지가 변해 버린 세월만큼 우리의 모습도 달라져 있었다. 그림이 전부였던 지혜는 공무원이 되었고 인생에 결혼은 없다던 민영은 애가 셋이다. 뻔하지 않은 우리의 행보는 인생이 계획대로만 되지 않을 거라는 담임선생님의 말을 증명했다. 열등감에 휩싸이거나 자신감을 잃고 헤맬 때마다 선생님은 인자한 말투와 어울리지 않게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말보단 현실적이고 냉정한 말을 해주었다. 요즘이라면 '선생님 혹시 T에요?'라는 말을 자주 들을 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밉지 않은 매력적인 팩폭은 감정이 난간에 부딪힐 때면 선생님을 찾게 해 주었고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미래의 불확실성이 되려 묘한 희망을 얻게 했다.
야자시간에 몰래 닭꼬치 시켜 먹은 이야기, 살이 쪄서 교복이 터진 이야기, 사골처럼 우려먹어도 사골처럼 질리지 않는 이야기들. 편한 사람 사이에서 나른한 공기에 취하다 보니 꾸밈없는 웃음이 터져 나오고 어느덧 나의 언어도 날 것이 된다. 늘어난 얼굴주름과 어울리지 않는 강조 접두사가 튀어나온다. 나는 고양이 두 마리와 산다. 동물과 친구가 되니 말하고 듣고 보고 쓰는 언어에도 변화가 생겼다. 대표적으로 '개'를 부정적인 의미를 강조할 때 앞에 붙이는 게 거슬렸다. 귀엽고 무해한 개를 저급하게 아무 데나 붙이는 게 용납이 안 됐다. 게다가 게다가 비속어의 어원 대부분은 특정 대상을 비하하는 표현임을 알고 나니 더 불쾌해졌다. 하지만 이 친구들과 웃다 보면 '개'가 튀어나왔다.
말은 무섭다. 언어는 관습이다. 몸에 새겨진다는 것이다. 한 주가 끝나가는 금요일 점심시간, 직장 동료들과 점심을 먹었다. 금요일 점심은 일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약속한 듯 사적인 수다를 떨었다. 동료들의 지난 주말은 즐거운 이야기로 가득했다. A는 줄 서서 맛집을 기다리다 지쳐 옆 가게로 들어갔는데 인생맛집을 찾았다고 했다. B는 헌팅포차에서 연이어 거절당해 홧김에 성형외과 상담을 예약했다고 했다. 주말 내내 고양이를 옆구리에 끼고 귤이나 까먹던 나는 동료들의 일화가 참 재밌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긴장이 풀렸다. 직장은 다 함께 야자시간을 땡땡이치던 죽마고우와의 술자리가 아니라 사회생활의 일부라는 것을 순간 잊었다. 나는 정성을 다해 동료에게 리액션을 하던 중 힘차게 외쳤다. "개 웃겨요 정말! 어떻게 그럴 수가 있…하하하!"
정말 어떻게 해야 하나. 다행히 시선이 집중되지 않고 물 흐르듯 대화가 이어갔다. 하지만 뜨끔한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위로 닦는지 아래로 닦는지 모르게 양치를 하고 칫솔을 든 채 옥상으로 달려가 허공에 이불 킥을 했다. "그러니까 평소에 말을 예쁘게 하자. 제발" 금주, 금연만큼 어려운 금욕(辱)의 길.
앤드루 클레먼츠의 소설 <프린들 주세요>의 주인공, 닉은 사전에 프린들을 등재시킨 초등학생이다. 닉은 펜을 '펜'이라는 말 대신 '프린들(Frindle)'이라고 부르며 그레인저 선생님과 부딪힌다. 국어 선생님, 그레인저는 닉의 언어사용법에 반대하는 듯 하지만 결국 프린들이라는 말이 퍼져나가는 데 도움을 준다.
이 책은 닉의 관점에서 언어 규칙에 의구심을 가져보기도 하고 그레인저 선생님이 되어 규칙의 필요성도 찾다 보면 자연스레 언어의 특성을 이해하게 된다. 보통 열 살 아이들과 읽는다. 맞춤법도 제법 틀리지 않고 100쪽 넘는 책도 훌훌 읽기 때문이다. 유난히 소설을 좋아하는 민준이는 교실에 있는 온갖 사물에게 새로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의자는 치킨이 되었고 지우개는 핸드폰, 가방은 모자가 되어 버렸다. "닉 말이 맞아요. 왜 펜을 펜이라고 불러야 하죠? 의자가 의자여야 하는 법은 없잖아요?" 민준이는 닉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러자 수현이는 그레인저 선생님이 되었다. "사람마다 사물의 이름을 자기 마음대로 부르면 혼란스러워. 네 이름을 민똥, 민빵, 민청이! 이렇게 마음대로 바꿔 불러도 되겠어?"
나는 민준이와 수현이의 메소드 연기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살짝궁 설명을 더해 불을 지핀다. "언어는 소리와 의미의 관계를 사회적으로 약속했기에 개인 마음대로 바꿀 수 없어. 하지만 소리와 의미의 관계는 필연적이지 않아서 이름을 붙여주고 사용하면 그 이름을 같게 되기도 해." 백 분 토론 못지않은 열띤 논쟁이 이어진다. 즐겁게 관망하다 보면 아이들은 스스로 '언어란 무엇인가' 정의를 하기 시작한다. 과학을 좋아하는 의정이는 언어를 '세균'에 빗댄다. "언어는 세균 같아요. 세균은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하잖아요. 우리 몸, 학교, 버스, 이 세상 모든 곳에 세균이 있는 것처럼 언어도 모든 곳에 존재 있어요. 유산균처럼 좋은 세균이 있고 충치처럼 나쁜 세균이 있잖아요. 언어도 똑같아요. 유산균같이 도움이 되는 칭찬이 있고 충치같이 해로운 욕이 있지요." 의정의 설명을 더하자면 유산균을 챙겨 먹으면 변비도 사라지고 면역력이 올라가지만 충치의 세균을 떼기 위해서는 무시무시한 치과를 가야 한다는 것이다. 언어도 나쁜 언어를 사용하면 괴롭지만 좋은 언어를 사용하면 내게 이롭다는 것.
<프린들 주세요> 수업을 설계하며 꽤나 고민했다. 아이들이 이 책을 읽고 닉은 엉뚱하고 그레인저선생님은 엄격하다고 판단을 끝내기보다는 그들의 의도와 언어의 특징을 이해하길 바랐다. 고민이 무색하게도 아이들의 토론에서 내가 한 수 배웠다. 내가 비속어를 끊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른이 됐으니까, 미성숙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노력은 바깥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의정이는 내가 잊지 말아야 할 진짜 이유 짚어 주었다. 나의 언어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는 '안'을 위해서다. 말은 나의 일부가 된다. 의정의 말처럼 언어가 유익균이 되어야 내 몸이 건강할 수 있다. 해로운 말이 나를 아프게 하고 아름다운 말이 나를 건강하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렇다면 나는 유익균이 더 많아져 실수를 하더라도 관대하게 기다리는 여유가 생기고 세균에도 강한 밸런스 좋은 언어생태계가 될 것이다.
* 커버 이미지 :
https://www.instagram.com/gonggan_tamgoo/
https://www.yes24.com/Product/Goods/241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