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이주 Jan 29. 2024

우사인 볼트가 되는 법

속도를 올리려면 몸을 뜨겁게 만드세요

아이들이 말썽을 부리는 통에 우리가 얼마나 자주 신경이 쓰였는지 몰라.
하지만 야곱이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면 아이들은 조용히 귀를 기울여.
그러면 그게 커다란 위안이 되었어. 모든 노인들을 즐겁고 평안하게 해 주었어.
「야곱, 너는 특별해 - 날지 못하는 어느 새에 관한 이야기」 가브리엘레 하이저


"겨울에 게으른 사주야"

명절은 재방송이었다. 아이들 몸이 한 뼘 커지고 어른들 어깨가 조금 작아질 뿐 매년 풍경이 비슷했다. 거실에는 삼촌, 이모부, 성인이 된 남자들이 둘러앉아 술을 먹었다. 정종과 소주병이 섞여 있었다. 부엌과 거실 사이 문턱에 엄마가 앉아 전을 부쳤다. 전을 뒤집으며 고단한 삶을 내뱉고 뒤집은 전을 꾹 누르며 토로를 주어 담았다. 자식들이 나쁜 짓 안하고 착하게 크면 그걸로 됐다면서. 숙모는 몸을 흔들며 포대기 속 아이를 달랬다. 손등에 분유를 한 방울 떨어 뜨려 온도를 확인하고 엄마 말에 맞장구쳤다. 이모들은 꼬치에 맛살, 단무지, 대파, 하나씩 꽂으면서 비슷한 희로애락을 하나씩 더했다. 오랜만에 만나 털어놓은 어른들 인생은 나란히 꿰어도 튀지 않는 오색전 같았다. 한쪽 방에서는 막내 숙모가 아가에게 젖을 물렸다. 초등학생이 된 우리들은 방바닥에 엎드려 아가의 손가락을 만져 보았다. 그러다 아가가 잠이 들면 우리는 다 같이 명절 특선 영화를 보았다.


"이 할미가 좀 들어가도 되나" 할머니는 유바바처럼 머리가 하얗고 숱이 많았다. 엄마의 작은엄마라고 했다. 아랫목에 손을 스윽 넣으면서 한 명도 빼지 않고 우리와 눈을 마주쳤다. 약간 돌출된 큰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아이고야 네가 영자 딸이구먼. 솔찬히 컸구나." 나는 거실에서 삼촌과 이모들이 할머니를 둘러싸고 앉아 물어본 말이 떠올랐다. 생일을 알려주고 미래를 알려 달라고 했다. 큰삼촌은 첫째 딸이 올해 원하는 대학을 합격할 수 있는지 물었고 막내이모는 이모부의 사업이 잘 풀릴 것 같냐고 물었다. 


"할머니, 나도 그거 해주세요." 할머니는 열 살도 안된 아이가 찾는 '그거'가 무엇인지 금방 알아 차렸다. "너 생일이 언제 드냐" 할머니는 아랫목에서 뜨끈하게 익힌 오른손을 빼더니 오목하게 모았다. 엄지로 네 손가락의 마디를 이리저리 툭툭 치며 중얼거리셨다. "뱀이, 겨울에, 그것도 동도 안 튼 새벽에 태어났네. 겨울에는 부지런하도록 노력해라. 그럼 잘 살 거야 아가야." 앞날을 물어보는 열 살의 손녀에게 할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뱀띠라는 것도, 뱀이 겨울잠을 자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 없었다. 이모와 삼촌처럼 나의 미래도 시원하게 맞춰주길 바랐다. 분명 할머니는 온화한 미소를 띄고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나의 속마음을 전부 아는 듯한 눈이었다. 무서워서 그냥 "네"라고 대답해버렸다.


할머니는 용했던 걸까. 나는 겨울만 되면 이불속에서 끙끙댄다. 수능이 치러지는 11월 중순을 시작으로 입춘이 올 때까지 몸을 움츠리고 느리게 산다. 약속도 잡지 않고 전기장판 속에서 비생산적인 일(시간을 갉아먹는 넷플릭스, 인스타, 유튜브 쓰리콤보)로 타임워프가 벌어지면 다정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겨울에는 부지런해지렴. 그러면 잘 살 거야"  


입춘이 지나면 기가 막히게 잠에서 깨어난 개구리처럼 몸이 활발해진다. 침대에 닿는 볕이 길어지고 옷이 가벼워지면 속도가 난다. 하지만 2024년 나의 목표는 '속도 올리기'다. 그래서 올해는 자연의 시간에 생체리듬이 바뀌길 기다리기 전에 내가 리듬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겨울에 지지 않는 게 핵심이다. 쉽게 지치지 않는 엔진과 오류 없는 네이게이션을 설정하기 위해 지난 연말부터 나만의 월동준비를 시작했다. 루틴을 만들기 위해 책을 읽고 시도하며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았다. 그리고 과속에도 무리 없게 운동을 시작했다. 방점 없는 시간의 흐름에서 1이란 숫자는 무의미하지만 그래도 1은 1이다. 1을 잘못 채우면 시작이 틀어지는 기분이다. 손가락 마디에 점친 운명에 끌려가지 않겠다며 비장하게 새해를 맞이했다.  


하지만 관성을 넘어서기가 쉬울 리 없다. 결과가 바지런한 마음을 따라오지 못하면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꾸준함이 기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조급해졌다. 등목 물 한 바가지에 시원해지길 바라듯 눈에 보이는 변화가 빨리 생겼으면 하는 이기심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포기할 핑계를 찾지 않고 미래를 의심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을까. '오늘은 집 도착하자마자 유산소 30분을 하는 거야!' 마음 먹지만 이내 달콤한 생각이 든다. '오늘은 수업이 많았잖아. 교촌 허니콤보로 먼저 마음을 달래고 내일부터..‘ 본능과 이성의 핑퐁이 이어지는데 아이들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입술이 뻘겋게 부운 아이들은 "안녕하세요"를 기합처럼 내지르며 정수기로 달려간다. 학교 끝나고 학원으로 오는 길에 놀이터에서 열심히 뛰어 논 듯하다. 오전 내 넘치는 에너지를 책상 크기에 욱여넣고 참았으니 교문을 나서면 무조건 뛰고 보는 게다. 학원 앞 편의점에서 허기를 달랜 아이들은 연거푸 물을 마셨다. 무엇을 먹었는지 물었더니 메뉴는 통일이었다. 불닭볶음면. 로제, 치즈, 까르보, 짜장, 맛도 다양한다. 그중에서도 핵불닭맛을 먹었다며 자랑하는 연준이는 아니나 다를까 입이 가장 빨갛다. 스코빌지수 10000이 넘는 핵 불닭볶음면은 자기만 먹을 수 있다며 맵부심을 부린다. "저는 물 없이도 먹어요. 신라면도 시시해요." 시시한 아이는 눈도 빨갛고 인중에 콧물이 흐른다. 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엄마에게 수없이 들었을 잔소리를 늘여 놓는다. "배탈 날 수도 있으니 기본 맛을 먹는 게 어떨까?"


연준이는 반박했다. "자주 먹었더니 배탈 안 나요. 오히려 좋은 점이 많아요. 매운 걸 먹으면 스트레스가 풀리거든요. 우리 엄마도 엽떡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던데, 선생님도 어른이니까 엽떡 좋아하죠? 설마 맵찔이...?!" 의심하는 눈초리가 확신으로 바뀌며 얼굴에 여유가 생긴다. 어른이 꼭 매운 걸 먹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려는데 성욱이도 얼얼한 입을 열었다. "쓰읍- 매울수록 좋은 점 또 있어요" 이제 나에게 매운 음식이란 위장이 이기지 못해 먹고 싶어도 많이 못 먹는 나이의 반증이다. 아이들에게 좋은 점은 무엇일까.


육상선수 우사인 볼트

"우리를 우사인 볼트로 만들어주거든요. 저는 불닭볶음면만 먹으면 5분 걸리는 집을 1분 만에 도착해요. 빨리 물 마시려고 뛰거든요. 엄청 빨라져요" 입이 매우면 몸도 뜨거워지고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마셔야 하기 때문에 달린다는 것 싶어진다고 한다. 평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질 세라 귀여운 매콤무용담을 꺼내 놓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계단으로 뛰어간 지용이, 한 번에 물 1리터를 다 먹었다는 주원이. 아이들은 불닭볶음면을 바닥이 보이게 비운 사실과 달궈진 몸으로 한 일들이 꽤 자랑스러운 듯 보였다. 깨지 못한 기록을 깬 선수처럼 말이다.


속도를 내는 법은 원초적이었다. 강력한 동기부여나 치밀한 루틴도 아니었다. 몸을 뜨겁게 만드는 것이다. 생각이 따라잡기 어려울 만큼 몸을 달궈서 해내는 것이다. 계획과 실행에 매몰된 나는 즐거워서 그냥 하는 마음을 잊고 있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는 실망하고 자책하지 말고 쉬었다가 다시 달리면 되는 것이었다. 몸이 매운맛에 반응해 엔도르핀으로 쾌감을 느끼듯 몰입하는 즐거움으로 성취의 기쁨을 느끼며 가야 했다. 지속은 그냥 견디는 것이 아니었다. 땅속에서 따뜻하게 자는 느긋함도 즐기고 땅속을 헤집고 다니는 열정도 즐기면 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단지 불이 난 입속을 끄려고 달렸지만 나에게 좋은 팁을 주었다. 아이들이 물을 시원하게 들이키고 나에게 외치는 듯했다.

"달아올랐다면. 그냥 달리세요!"



* 커버 이미지 :

https://www.dailian.co.kr/news/view/387078


이전 06화 몰라서 재밌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