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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이주 Mar 04. 2024

키플링 가방을 드는 스무 살

진정한 잇-템

녀석을 미워하는 에너지를 한데 모으면 재미있는 일을 아주 많~이 할 수 있을 거야! 
「이게 정말 마음일까?」 요시타케 신스케


스무 살이 됐다. 염색도 하고 귀도 뚫었다. 눈썹도 다듬고 새 옷도 샀다. 고등학생처럼 보이기 싫었다. 취향은 없고 어른처럼 온 몸을 손보던 시절. 엄마가 백화점에서 못 보던 메이커(옛날엔 메이커라고 했다)가 생겼다며 오랑우탄 달린 키플링 손가방을 사왔다. 유행이라고 했다. 별 생각없이 들고 대학교 친구들의 술자리에 갔다. 


멋 좀 내던 매끈한 남자애가 내 가방을 보더니 오랑우탄의 손가락을 입에 꽂았다. 그리곤 기분 나쁘게 웃었다. "우리 나이에 누가 키플링을 드냐?" 나는 부정도 긍정도 못한 채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는 그놈이 있는 곳에 그걸 들고 가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날부터 키플링은 '나를 촌스럽게 만든 것'이었다. 어떤 가방이 '요즘' '우리 나이에' 어울리는 가방인지 고민하며 친구들 손에 들린 가방을 훔쳐보고 백화점을 들락거렸다. 나 다운 것이 타인의 시선에 물 들어가며 이십 대가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엄마 집에 갔다. 옷방 한켠 검은색 백팩이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또 키플링. 엄마는 여전히 가벼운 천 재질에, 주머니가 여러 개라 쓸만한, 게다가 백화점에 놓여 신뢰가 가는, 그 메이커가 마음에 드나 보다. 삼십대가 됐는지 우리나이를 강조하던 스무 살 그놈의 얼굴은 희미해졌지만 각인된 감정은 그대로 되살아났다. "뭐 이리머니가 많아..." 중얼중얼 가방을 만지작거리는데 청소기를 돌리던 엄마가 말했다. "쓸만해 보여서 샀어. 근데 멜 일이 없네. 아까우니까 네가 가져다 써." 


안 그래도 매일 노트북을 들고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가죽 가방은 지양하던 중이고 프라이탁은 벽돌같이 무거웠다. 쓸만해 보이면 가격이 비싸 고민하던 차. '우리 나이에 누가'라는 말은 선명하게 들렸지만, 일단 챙겼다. 사용할 이유가 충분한데 가져가지 않는다면 이젠 형체도 없는 타자의 말에 승복하는 게 아닌가. 

부끄러움으로 버려진 죄 없는 첫 번째 키플링 가방과 달리 두 번째 키플링가방은 주인 등에 찰싹 붙어 다녔다. 아무 옷에나 어울리는 검은색에 나름 방수도 돼서 제 값을 쏠쏠히 했다. 착실히 노트북과 책 몇권을 나르고 이년 정도 지나자 가방의 목적만 남았다. 가방의 상표는 보이지 않았다. 키플링인지 구찌인지 이마트 재활용백인지 관심 없었다. 그냥 필요해서 들게 되었다. 


오늘 세차게 비가 내렸다. 천지연폭포 같은 장대비를 뚫고 회사에 도착했다. 가방에 묻은 빗물을 털다 보니 여기저기 해진 흔적이 보였다. 이상한 쾌감이 었다. 볼펜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사용하고 버리는 시원함처럼 물건이 역할을 온전히 해낸 모양새가 만족스러웠다.  



쓰임새에 집중하니 눈치 볼 게 없다. 과시용 물건으로는 유행 지난 촌스러운 디자인이지만(무신사에 검색하면 나오지 않는다) 물건이 그 물건의 역할로서 기능했고 돈이 아깝지 않게 알뜰하게 사용한 내가, 되려 세련됐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났다. 어느새 그 매끈한 놈의 시선은 지워지고 나만 남은 기분이었다. 


해진 가방이 뭐라고, 부지런히 사용했을 뿐인데 스스로 세련된 사람이 되게 해 줄까. 나는 여전히 유행을 무시하고 남의 눈도 신경 안 쓸 만큼 멋진 사람은 아니다. 미니멀리즘 추구하는 인스타그래머를 팔로잉하고 삶을 훔쳐보기도 하지만 삶의 모습까지 팔로잉할 용기는 아직 없다. 오늘도 지그재그와 더블유컨셉을 들락 거리고 에프더블유 패션쇼를 구경하며 물건을 탐한다. 당장은 '요즘', '우리 나이에' 맞는 기준에서 완전히 해방되진 못 할 것이다. 그러니까 키플링 가방을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걸어 둬야겠다. 멋진 소비, 나 다운 소비가 무엇인지 잊을 때마다 떠올려 줄 잇템이므로.


* 커버 이미지 : 
https://www.kipling.co.kr/
https://www.instagram.com/seulggg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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