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솔직하다.
성년 고릴라는 자기 가족을 방어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싸운다. 밀렵꾼이 동물원에 매매할 목적으로 고릴라 새끼 한 마리를 빼내려 할 때 성년 가족을 몰살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by 다이앤 포시
「유인원과의 산책」 사이 몽고메리
아이들이 교실 빠져나가면 공기가 몬존하게 가라앉는다. 의식처럼 칠판을 지우고 책상을 정렬하며 숨을 고른다. 배가 고프다. 깨끗해진 칠판에 피자 조각을 그렸다. 끝이 둥근 삼각형 모양. 현우는 교실 문을 열자마자 이상한 도형을 발견하고 그것의 정체를 묻는다. "내가 살던 나라의 지도야."
허기가 지면 점잖기 어려운 법이다. 아이들과 나 사이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거짓말도 재밌으면 봐준다는 룰. 이미 내 이름은 유로비스타쥴리방기뿅뿅이고 나이는 436살로 통한다. 역사책을 좋아하는 현우는 2000년에서 대략 400년을 빼서 나의 출생시기를 조선시대로 추정하고 어땠는지 설명해 달라 한다. 그럼 나는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고 둘러댄다. 다시,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았냐고 물으면, 나는 요정이라고 대답한다. 아이든 어른이든 재밌으면 집요해지고 거짓말은 점점 커진다. 탐정 놀이를 반복하며 알리바이가 꽤 쌓였다. 이제 아이들은 믿어주는 척한다. 어른 세계의 무료함을 달래려는 나를 받아준다.
입만 열면 거짓말하는 아프리카 출신 요정이 오늘은 세 줄을 그어 놓고 지도란다. 현우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피자 조각 안에 페퍼로니와 올리브처럼 보이는 동그라미 네다섯 개 그린다.
"선생님은 여기 페퍼로니 마을에서 살았을 거예요. 맞죠?"
순발력을 발휘해 보라며 나를 시험한다. 방금 교실에 들어온 선미는 가방도 벗지 않고 현우 옆에 서서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본다. 아이들은 거짓말쟁이를 만나면 단합해 물리치고 정의를 실현한다.
"오, 꽤 비슷하게 그렸네? 나는 저 세 번째 올리브 마을에서 살았어." 귀여운 도넛 모양을 가리켰다.
"그럼 이 페퍼로니마을은요?"
"거긴 중심지. 역도 있고 마트도 있지. 올리브 마을에서 걸어서 하루가 걸려."
우리의 티티카카를 가만히 보던 선미가 말한다.
”나도 동그라미 마을에 살고 싶어요. 동그라미는 왠지 평화로워 보여요.”
동그랗다는 것과 평화. 나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고 구글 어스(google earth)를 띄웠다.
“자, 여러분. 지금부터 직선과 곡선을 찾아봐요.”
아이들은 어렵지 않게 이집트와 리비아 같은 아프리카의 국경선과 미국의 주, 한반도의 38선을 찾아냈다.
"여기는 마치 자를 대고 그은 것 같네. 실제로는 엄청 클 텐데, 어떻게 저렇게 반듯하게 나눠졌지?"
현우는 바로 두 단어의 관계성을 눈치챈다. 현우 말이 맞다. 자연스럽게 생긴 경계는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는 구글 어스 속 지구를 한참이나 봤다. 직선과 곡선을 가진 지역들을 찾아 분류하고 차이를 추론했다. 직선 두 개와 곡선 한 개로 이루어진 피자 조각은 공간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탄생시켰다.
공간은 솔직하다. 경험하고 사유 한만큼 채워진다. 6학년 친구들과 행성을 만든 적 있다. 아이들은 학년이 올라가면서 자기의 방, 집을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지구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어딘가에서는 나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산타가 전 세계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알아챈다. 아이들은 볼 수 없지만 우리가 존재하는 우주를 어떻게 인식할까. 아이들이 만든 행성은 어떨까. 무엇으로 가득하고 누굴 위해 존재할까. 나는 아이들이 만든 우주를 보고 싶었다. 공간은 솔직하고 사유하는 대로 만들어지니까.
"행성의 모양, 크기, 물질 모두 마음대로 정해도 되나요?"
"당연하죠. 그렇게 만든 이유를 잘 설명해 주면 됩니다."
인류와 가까운 동식물, 인류를 살게 해주는 것들, 굳이 없어도 되는 것들이 오고 갔다. 그 결과, 작은 종이 위에 세 개의 행성이 탄생했다. '이 편한 행성', '그냥 귀엽잖아요 행성', 그리고 'MBTI행성'
'이 편한 행성'은 아파트 브랜드 '이 편한 세상'에서 이름을 따왔다. 인구 50억 명이 살며 지구보다 약간 작다. 평균 온도는 인간이 살기에 적당한 5-25도. 이 편한 행성의 창조자인 지호는 지구의 삶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다고 한다. 인구 증가와 기후 위기만 해결되면 지구는 여전히 우리가 살기에 가장 이상적인 행성이라는 것. 다만 공부시간을 줄이기 위하 하루를 20시간으로 줄였고 달을 좋아해서 위성을 3개로 늘렸다. 말 그대로 지구 2.0 행성을 만들었다.
"제가 만든 행성은 '그냥 귀엽잖아요 행성'입니다. 이곳은 지구보다 따뜻해서 바다 생명체가 많이 서식합니다. 저는 귀여운 바다 생명체가 사는 행성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저는 바다 생명체가 인간보다 훨씬 귀엽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행성에는 지구의 인구만큼 귀여운 생명체가 살아요. 그래서 바다가 넓고 땅은 좁아요.”
그 행성에 서식하는 재패니즈 스파이더 크랩은 다리가 과도하기 길어진 대게 같았다. 노란색으로 염색한 콩벌레도 보였다. “으악, 징그러” 아이들은 소리 질렀다. “왜? 내 눈엔 너무 귀여워. 저 행성은 산책만 해도 기분이 좋을 거야. 나는 창조 자니까 드론처럼 하늘에서 바라볼 수 있겠지. 엄청난 풍경일 거야.” 우리는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기로 하며 다음 행성으로 넘어갔다.
지환이가 만든 ‘MBTI 행성’은 자연적 환경이 지구와 비슷했다. 하지만 적도가 세로라서 동쪽이 춥고 서쪽이 더운 지역이었다. 날씨 기호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것이다. 동쪽은 동물의 개체 수가 많고 주로 자연으로 이루어졌다. 서쪽은 반대로 도시가 발달되었다. MBTI 유형에 따라 작은 도시들이 나뉘었다. “저는 내향적이고 상처를 잘 받는 INFP에요. ENTJ랑 정말 안 맞거든요? 그런데 꼭 굳이 붙어살아야 하나요? 상극끼리 피해 살아도 되잖아요.” 비슷한 성격끼리 사는 것에 대한 반대 의견이 나왔지만 이번에도 취향을 존중하기 했다. 행성 정중앙 하트가 있었다.
“하트는 귀여워서 그린 거야?” '그냥 귀엽잖아요 행성'을 만든 아인이가 물었다.
“멸종동물 추모공원. 이 행성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야. 동물들은 우리 때문에 죄 없이 죽고 멸종되잖아. 추모할 공간이 있으면 좋겠어.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면 저기로 가는 거지. 저긴 매매금지야. 건물도 세울 수 없고. 911 추모공원처럼.”
나는 인간이라서 자연과 동물에게 느끼는 죄책감은 각자의 몫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꺼내야 하는 감정이 있다. 미안하다고 털어놓고 나눠야 하는 것이다. 슬픈 일임을 다 함께 인정하는 의식이 필요하다. 추모의 공간은 해결의 시작이 된다. 그래야 다음을 꿸 수 있다. 지환이는 추모 공간의 역할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대상을 자연으로 확장했다. 행성 가운데 하트 모양으로 차지할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지구에 필요한 공간은 무엇일까. 자본의 수단으로서 존재하는 땅이 아닌 생명이 살아가는 대지로서 지구를 바라본다면 지환이가 만든 하트 모양 추모공원은 아깝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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