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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이주 Aug 11. 2024

인생은 예술이다

“꼬마 아가씨! 아가씨도 날고 싶어요?” 소르바스가 지나가는 투로 묻자, 아포르뚜나다는 고양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마침내 대답했다. "그래, 좋아요! 내게 나는 법을 가르쳐주세요!” 순간 고양이들은 너무 기뻐서 환호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들은 고양이 특유의 인내심을 발휘해서 어린 갈매기가 날고 싶다는 의지를 직접 드러낼 때까지 끈덕지게 기다렸던 것이다. 왜냐하면 난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결정에 달린 문제라는 것을 고양이들은 조상들이 일러준 교훈을 통해 이미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요나 억지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였다.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 루이스 세풀베다



2021년, 현은 3학년이었다. 수줍음이 많고 말수는 적었다. 나는 현이 얼굴을 절반만 볼 수 있었다. 코로나가 극심해 각자 방에서 온라인으로 만날 때도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현은 우리와 다른 의미로 마스크에 의지했다. 하루에 감당할 수 있는 일일 할당량을 훌쩍 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마스크 덕분에 견디는 것이었다.  


함께 숨 쉬는 일이 공포라는 걸 알려준 역병이 지나갔다. 현은 6학년이 됐다. 나는 팔자주름이 깊어졌다. 우리는 이제 디지털로 만나지 않아도 안전하다. 교실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현. 수줍음과 착실함은 상관이 다. 모두 답답한 마스크를 시원하게 벗어 버렸지만 현은 꿋꿋하게 얼굴의 반을 가린다. 나는 더 꿋꿋하게 현을 살핀다. 삼 년 동안 마스크가 숨기지 못한 남은 얼굴을 관찰하는 데 선수가 됐기 때문이다.


수업은 선생이라는 엠씨가 진행하는 일종의 무대다. 어쨌거나 아이들은 어른의 계획으로 나에게 온다. 아이들에게 공부라는 단어가 주는 거부감은 두텁다. 모순적이게도 공부를 하려면 즐거워야 하고 즐거움은 경직이 풀리면서 시작된다. 어른들은 잘 믿지 않지만 흐트러져야 진짜 생각을 한다. 상체가 좌우로 움직이고 공허한 눈빛에 힘이 생기며 경청도 하고 반박도 한다. 나는 오늘의 출연자들이 편안한 환경에서 최고의 재주를 부리도록 좋은 엠씨가 되어야 한다. 아이들이 다음에 올 때는 스스로 시간을 내어 오는 마음이길 바라면서.


하지만 긴장은 쉬워도 이완은 어렵다. 모든 것이 그렇다. 현은 베테랑 진행자도 땀나게 하는 무표정 관객인 셈이다. 나는 핸드폰만 보는 현에게 실없는 농담을 던진다. 

“나 보고 싶어서 일찍 왔구나?” 

방정맞은 말투와 능청스러운 표정을 딱 잘라 거절한다.  
“아닌데요” 

절대 아니거든요. 선생님이 저를 보고 싶었던 거겠죠. 기다렸다는 듯 장난을 치는 아이들과는 딴판이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보았다. 싱긋, 미소에 밀려 마스크 위로 살며시 올라온 광대를. 디지털로 변환된 공간에서 소리도 내지 않던 관객이 유일하게 보여준 움직임을 나는 한눈에 알아차린다. 아이디와 비밀번호 입력 없이 만나니 더 선명하다. 포근하게 눈이 작아지고 기분 좋게 콧잔등도 구겨지는구나. 
 

하루는 현이 문을 열고 들어 오더니 책상을 지나쳐 나에게 성큼 온다. 걸음을 보니 다리가 꽤 길어졌다. 다리만큼 길어진 팔로 가방 깊숙한 곳에서 지퍼백을 꺼낸다. 
“선물이에요” 

하얀 눈알 두 개가 어설프게 달린 모루인형이다. 목에는 실버 하트 진주목걸이가, 팔에는 비즈반지가 껴있다. 그럴 일 없겠지만 내가 뛰기라도 한다면 우수수 떨어져 나갈 듯이 접착이 부실하다. 동대문에서 골라서 직접 만들었다고 했다. 이런 걸 감동이라고 했던가. 현이 내민 물건 하나에, 굳게 닫힌 문을 활짝 연 사춘기 자식의 부모가 되었다가, 오랜 짝사랑 끝에 고백을 난데없이 고백받은 사랑꾼이 되기도 한다. 아니다. 사계절 정성 들인 장독대의 장을 맛보는 장인의 기분이려나. 뭐가 됐든 보상과 보답 어딘가에서 울렁거림을 느낀다. 그리고 보니 현이 얼굴에 마스크가 없다. 미소 짓는 입꼬리가 상상한 것보다 다부지다. 현이는 팔다리만 길어진 게 아니었다.


아이들은 자란다. 자라니까 아이다. 물만 주면 하루 만에 빽빽해지는 콩나물시루처럼 자란다. 이차 성징으로 변하는 모습보다 마음이 자라며 여기저기 손을 댄 모습이 더 새삼스럽다. 마스크와 동시에 눈썹을 가리던 앞머리가 걷히니 이마가 건강하게 빛난다. 유행하는 링고티에 무릎 덮는 바지를 입고 나의 모루인형과 비슷한 키링이 메신저백에 주렁주렁 달렸다. 콘크리트 벽의 보호색처럼 입었던 무채색 옷들은 잠옷이 되었으려나. 이제 광대근육을 살피지 않아도 된다. 나는 아침에 일어났더니 말도 안 되게 훌쩍 자란 이 생물의 속도를 믿을 수 없어 신기하게 본다. 


반응을 기다리던 현이 무대 마이크를 낚아채 나에게 건넨다. 조급함이 수줍음의 자리를 뺏었나 보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물론이지. 갖고 싶었던 거야. 항상 걸고 다닐 거야”


모루 인형 다음엔 말장난도 건넨다. 감기 기운이 있는 다른 아이에게 무리하지 말라고 토닥였더니, 현은 내 옷깃을 잡고 작게 속삭인다. 

“저도 오늘 졸린데 조금만 써도 돼요?” 
몇 년 만에 시원하게 드러난 눈코입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이러나저러나 시간은 흐른다. 덕분에 자라나는 아이를 보는 영광도 얻는다. 아이는 자라고 어른은 늙는다. 아이의 팔다리가 길어지는 만큼 어른의 속도 깊어져야 하는데 깊이는커녕 흔들거린다. 나는 엄마가 나를 낳던 나이가 됐다. 털 달린 비인간가족도 생겼다. 고독이 인생의 벗이라는 사실도 인정하게 됐고 자기 주도적으로 결정하고 책임도 지겠노라 비장하게 군다. 착실하게 오늘을 채우면 후회 없이 미래를 맞이하겠지. 늠름하게 살다 보면 인간 동물이 가족이 될 수도 있고 혼자서 살아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오랜 시간 사회에서 주입된 가족의 표본이 떠오른다. 미래는 정답이 없는 줄 알았는데 선택지가 서너 개 부상하면 갑자기 두렵고 어른 놀이를 하기 싫어진다. 자유와 고독이 분간이 안된다. ‘이’ 사회에서 ‘그’ 나이에 능당 해야 할 일을 외면하는 건 아닐까. 진짜 이렇게 늙어가도 되는 걸까. 자기 주도가 아닌 사회 주도적 인간이 된다. 다시 철부지다.  


철부지를 숨기고 다시 진행자가 된다. 주제는 마침 ‘가족’이다. 조손가족, 입양가족, 1인가족, 반려동물가족, 다문화가족… 어른들은 다양성을 가르친다. 아이들은 당연히 가족인데 왜 배워야 하냐고 묻는다. 예상 못한 질문을 예상한 듯한 민성이가 나 대신 말한다. 
“옛날 사람들은 남자랑 여자랑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가족만 가족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생각할까 봐 걱정돼서 알려주는 거야.” 
어른들은 가끔 괜한 걸 걱정한다. 이제 '가족'을 주제로 글을 쓴다. 현은 또 제일 먼저 글을 완성해서 가져온다. 수줍음과 착실함은 역시 관련이 없다. 

제목: 가족이란 서로 칠해가는 것 

… 옛날부터 가족의 범위는 혈연이 기준이었다. 하지만 혈연보다 중요한 건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이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라도 학대를 받으며 자란 사람들은 “그들은 가족도 아니에요”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모가 되기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부족함 없이 키워야지” 하며 준비한다. 그러니 가족은 서로 빈 곳을 채워주고 칠해주는 관계다. …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 예술로 치면 물감 같은 재료가 가족의 구성원이고 그렇게 도화지를 채워서 만들어진 그림이 가족인 것이다. 그럼 1인 가족은? 채워 줄 재료가 없다면 그 빈자리를 이겨내 새로운 예술을 만들면 된다. 소변기로 작품을 만든 뒤샹이나 메릴린 먼로를 복사해서 작품을 만든 앤디 워홀처럼 말이다. … 


뚫어져라 관찰한 건 나뿐만이 아닌 건가. 현은 이미 철부지 어른을 본 걸까. '인생을 예술로 생각하세요.' 어른의 어리석음에 던져 준 명쾌한 해답에 웃음이 난다. 수현은 아리송하다. 생각할수록 후련해서 박장대소를 터뜨렸기 때문이다. 

“어디가 웃겨요. 지난 시간에 <질문하는 서양미술사> 읽었잖아요. 그게 떠올라서 쓴 거예요.”


응, 나도 알아 현아. 나도 읽었잖아. 그런데 나는 왜 이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현은 시대가 변하고 가족의 범위가 확장하는 모습이 미술사조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절대적 아름다움이 없다면 우리는 가진 재료로 예술처럼 살아내면 되는 것이다. 물감과 도화지 없이 작품을 만든 세상이 온 것처럼 가족의 모습에 맞게 삶의 방식을 만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형식을 비틀면 결핍은 더 이상 결핍이 아니게 된다. 


예술은 감상이 아니라 적용이다. 삶과 섞이며 비로소 시작된다. 나는 수업 시간에 ‘분류, 비교, 대조, 유추’와 같은 범주어를 자주 설명한다. 현상을 유연하게 이해하고 생각을 만드는 도구로 사용하길 바라 서다. 또 문학의 중요성도 설파한다. 허구가 실제의 삶에 주는 힘을 느끼길 바라 서다. 그러던 내가 정작 내 삶을 예술로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경직된 태도는 나에게서 시작되고 있었다. 비유와 상징의 미학을 종이 안에 가둔 건 나였다. 


여전히 미래를 모른다. 하지만 어린이의 뒤꽁무니를 쫓으며 배운다. 재료 몇 개 없다고 작품을 못 만들 일은 없다. 나는 내 삶에 어떤 예술가일까. 


계속해서 매주 무대를 만든다. 능숙한 진행자 덕에 아이들은 쩌렁쩌렁 떠들며 자란다. 자라는 아이들 속에서 나는 어려진다. 불안을 잠재우고 힘이 들어간 어깨를 턴다. 수현은 건네는 방법을 배우고 나는 나대로 사는 방법을 배운다. 인생은 예술이라는 뻔한 말을 서로에게 바친다. 그렇게 이곳은 배움의 장이 된다. 튼튼해진다. 


 

* 커버 이미지 : 

https://www.instagram.com/seulggg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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