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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이주 Sep 22. 2024

놀아야 한다

냉소보단 폭소를

운명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여러 유리한 조건들을 활용하는 것도 놀이이며, 최고의 열성을 집중시키는 것도 놀이이다. 가혹한 우연을 일으키는 것도 놀이이고, 위험을 무릅쓰는 대담함과 빈틈없이 계산하는 신중함을 발휘하는 것도 놀이이며, 그러한 여러 두뇌활동을 조합하는 능력을 동원하는 것도 놀이이다. (⋯) 놀이는 인간을, 말하자면 열광 상태로 몰고가는데, 이 열광 상태가 그를 클라이맥스를 거쳐 용기나 인내력으로 기적과도 같이 극한에 도달하여 대성공을 거둔 뒤 무기력한 허탈 상태에 놓이게 한다. 초탈함은 찬양할 만하다. 주사위를 한 번 던지거나 카드를 한 번 펼쳐서 모든 것을 잃고서도 웃으면서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그 초탈함.「놀이와 인」로제 카이와


일터에 가까워지면 도착시간에 맞춰 어플로 커피를 주문한다. 주로 이천 원이 넘지 않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다. 과로가 예정된 날에는 스타벅스 바닐라 플랫 화이트나 폴바셋의 락토프리 카페라테를 시킨다. 몸에 오천 원 넘는 카페인을 넣어주면 미리 오늘의 과로를 보상하는 기분이다. 400 ml 남짓한 액체로 입도 즐겁고 각성 효과도 얻는 적당한 사치다.


맞다. 나는 커피 중독이다. 중독은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병적 상태’를 말한다. 이제는 많이 줄여 한두 잔 정도지만 여전히 하루도 빼놓지 않는다. 커피에서 도망치기 어렵다면 삶의 즐거움을 더하기 위한 루틴의 트리거로 이용하기로 했다. 궤변 같지만 효과는 좋다. 식당에 가면 의식처럼 크린타월 비닐을 찢어 손을 닦으며 음식이 들어갈 위장의 길을 살포시 열어 주듯이, 잠들기 전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고 가지런히 머리맡에 두며 하루를 마감하듯이, 커피는 노동을 시작하기 위한 일종의 명령어다. 한 모금을 마시고 일터의 문을 열며 파이팅.


문제는 노화가 시작된 어른이 성장기 아이들과 보내다 보면 체력이 금방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번에는 달달한 오후의 커피가 필요하다.


쉬는 시간입니다. 분명 쉬라고 했는데 어쩐지 수업 시간보다 힘들게 육체를 흔드는 아이들을 빠져나와 믹스커피가 놓인 곳으로 간다. 종이컵에 물을 반 정도 채우고 믹스 커피 봉투를 가늘게 만들어 휘젓는다. 한 모금에 눈이 맑아지고 두 모금에 귀가 뚫린다. 이제야 똑같은 커피를 뜯고 있는 다른 반 선생님이 보인다. 우리는 느른한 서로의 얼굴과 손에 들린 설탕 커피를 번갈아보며 웃음이 터진다. 너의 중독을 내가 아니면 누가 알겠어.


십분 지났습니다. 모두 자리에 앉아 주세요. 달달한 설탕이 묻은 소리가 기운차다. 눈감술 술래 수진이는 아직 한 명도 잡지 못해서 아쉽다. 좀비처럼 뻗은 팔을 내리고 눈을 떠서 기운찬 소리의 정체를 본다. 종이컵도 보고 내 책상에 놓인 오전의 커피도 본다. *눈감술은 눈 감고 하는 술래잡기다. 보통 실눈을 뜬 채 한다.


“선생님. 오늘 커피를 몇 잔 째 먹는 거예요? 선생님 이따가 퇴근해서 또 먹을 거죠?”


자리에 앉은 아이들의 시선이 몇 모금 안 남은 종이컵을 향하고 말을 쌓는다.


“우리 엄마도 맨날 커피 마셔.”

“우리 아빠는 엄청 큰 텀블러에 넣어 다녀.”

우리 엄마는, 우리 아빠는, 우리 할머니는, 우리 이모까지 등장한다.

나의 대답은 중요하지 않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공통점을 발견해서 기쁘다.


“선생님. 그거 중독이에요.”

나는 고개를 젖혀 남은 커피를 털어 넣고 뻔뻔하게 말한다.


“맞아.”

“으잉? 무슨 중독을 그렇게 당당하게 말해요?”

주로 평가의 대상이 되는 아이들은 판단의 주체가 될만한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줄곧 어른들에게 중독은 나쁜 것이라 들었는데 내가 예상한 반응대로 나오지 않자 당황한다.

“어른들도 완벽하지 않잖아.”


나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뻔뻔함에 놀란 아이들은 그동안 수집한 어른들의 중독을 고발하기 시작한다. 몇 모금에 사라지고 구릿하게 남은 달달함을 다시며 어른을 대표해 변명할 태세를 갖춘다.


어른들의 흔한 중독은 세 가지다.

술, 배 터지게 먹기, 스마트폰.


피곤하니까 한 잔, 안주가 좋아서 한 잔, 자식이 시험을 잘 봐서 한 잔. 그렇게 먹다 보면 거의 매일 먹는다는 거다. 어른이 중독을 인정하기 싫어서 대는 핑계는 다양하다. 수연이 아빠는 이유를 만들다 보니 창의력이 늘었다고 한다.


사람은 배를 채우려고 음식을 먹는다. 그런데 어른들은 맛에 중독이 되어서 음식을 먹는단다. 맛만 좋으면 배가 터지겠다고 고통스러워 하지만 멈추지 못한다. 그래서 배 터지게 먹기 중독.


아이들이 가장 침 튀기며 격분한 중독은 스마트폰이었다. 어른은 아이들에게 정해진 시간만 사용하도록 규칙을 정해 줄 만큼 스마트폰의 나쁜 점을 잘 안다. 시력이 어쩌고 뇌가 어쩌고 도파민이 어쩌고 똑똑하게 알고 있지만 틈만 나면 스마트폰을 보니까 아이들보다 심한 중독이라는 것.


현주 할아버지는 복권에 빠졌다. 신림에 로또 1등이 9명이 나온 유명한 복권가게가 있는데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줄을 선다. 할머니와 다투면서도 꼬박꼬박 사니까 사랑을 이길 만큼 강한 중독이란다. 민지 삼촌은 스포츠에 중독됐다. 주중에 야근을 하는데도 주말만 되면 졸린 눈으로 골프장에 간다. 휴일의 늦잠을 이길 만큼 중독됐다고 한다. 자동차 중독, 콜라 중독, 주식 중독, 백화점 중독, 그럴듯한 이유로 쏟아지는 중독을 듣다가 나는 종이컵의 둥글게 말린 입구를 치아로 다 펴냈다. 논리에 설득되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이들은 내가 어른을 대변하길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나도 유치한 반격을 하려다 마이크를 넘겨 버렸다. 아이들의 관찰을 더 듣는 것이 나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더 나을 거란 생각에.


“이제 너희가 중독된 걸 말해줘. 나도 솔직히 말했으니까.”


간결하게 빛나던 눈빛이 복잡해졌다. 세차게 열변하던 기세는 사라지고 진중해졌다.


“저는 콜라를 좋아해요. 하지만 엄마와 약속한 날에만 마시니까 이것도 중독은 아니네요. 전 참아 내니까요.” “우정 중독도 있나요? 친구랑 놀이터에서 자꾸 놀고 싶어요. 하지만 엄마가 정해준 시간이 되면 헤어지니까 저도 중독될 리가 없어요” “몰랑이 연필을 샀는데 또 사고 싶어요.” “저는 샤프 중독이에요. 선생님들이 못 쓰게 하는데 몰래 쓰거든요.”


삶에서 비장하게 원하는 것들이 터져 나왔다. 고당도, 조미료, 에너지드링크도 나왔다. 중독의 좋은 점도 찾아낸다. 몰랑이 덕에 스트레스가 줄었고 놀이터를 좋아해서 친구가 생겼다. 유준이는 아빠의 중독도 좋다고 했다. 유준 아빠는 금주 선언을 했다. 마시면 유준이에게 삼만 원을 주기로 했다. 유준이는 벌써 십오만 원이 생겼다.


중독은 독의 한가운데 있는 상태다. 바닷속에서 바다를 통제하는 건 어렵다. 망망대해로 가는 건 좋지 않다. 아이에게 중독은 놀이와 가깝다. 즐겁게 노는 것만으로도 멀리 휩쓸리지 않고 해변에 두둥실 떠있다. 어른은 왜 삶을 망가뜨리는 정도로 중독되는 걸까. 놀이로 해결되지 않는 덫에 걸렸거나 고단함을 쉽게 해결하려는 게으름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는 가벼워져야 한다. 어깨 힘을 풀고 가쁜 숨을 진정시켜야 한다. 아이처럼 놀아야 한다. 물론 어렵다. 어른이 되어 버렸으니까. 시간이 우리를 어른으로 만들수록 우리는 더욱 아이처럼 굴어야 한다. 냉소보다 폭소를 터뜨려야 한다. 건강한 중독만 남기 위해.


* 커버 이미지 :

https://www.instagram.com/modoo.I

https://blog.naver.com/sluu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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