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닮았다
예쁘다. 장미로 태어난 걸 스스로도 기뻐하고 있겠죠?
「빨간 머리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
틀렸어, 노력해, 다시 하렴. 빈은 학교와 학원에서 자주 부정당한다. 어른은 야박하고 집요하다. 실수에 집착하고 재시험을 좋아한다. 빈은 어른과 경계를 긋고 세계를 분리해 버렸다. 그래서일까. 빈은 집에 가고 싶단 말을 자주 한다. 글을 쓰면 연필을 굴리고 발표를 하면 창밖을 본다. 쑥쑥 자라기는커녕 점점 오므라들었다.
빈은 넘치는 사랑과 적당한 무관심이 필요하다. 빈아, 오늘은 뭐 했어, 기분은 어때, 시험을 잘 봤니. 요란을 떨고 싶지만 참는다. 참는 정도가 아니라 절대 들키면 안 되는 감정처럼 태연하게 군다. 자칫 열세 살 소년이 꽁꽁 숨어 들어갈까 조심스럽다.
8월 중순, 기회가 왔다. 빈과 둘이서 「빨간 머리 앤」을 읽게 된 것이다. 긴 휴가로 같은 반 친구들이 모두 결석했다. 우리 자리에 '앤'까지 초대받았다. 빨간 머리 '앤'은 어른과 벽을 쌓을 시간에 어른의 세상에서 춤을 추고 돌아다닌다. 어른의 말도 신념에서 벗어나면 따르지 않는다. 어른에게 웃음도 주고 희망도 준다. 나는 빈이랑 다시 보고 싶은 장면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앤의 말에 밑줄을 치면서 빈이가 그어 놓은 경계선이 옅어지는 상상을 한다. 하지만 아마도 오늘 당장 앤처럼 되긴 어려울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텅 빈 교실을 둘러보다 앉은 빈은 불편하다. 어른과, 단 둘이, 그것도 학원에서, 두 시간을 보낸다니. 시선을 피할 수도 없고 멍 때릴 여유도 없다.
"오늘 저 밖에 안 오나요?"
"아니야. 오늘 수업은 세명이야. 나, 빈, 앤"
설마 책 주인공 '앤'을 말하는 건가. 빈은 황당해서 웃는다. 나는 계속 황당한 말을 늘여 놓는다. 너는 앤이 어때, 나는 마음에 들어. 빈은 공허하게 대답한다. 소설이니까 가능한 판타지죠. 이런 애가 어딨어요.
요란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형형색색 덕지덕지 포스트잇이 붙은 책을 편다. 빈이와 번갈아 읽는다. 소리를 내어 느릿느릿.
"'아이들은 눈에 띄어도 되지만 조용히 있어야 한다'라는 속담이 있잖아요. 전 그 말이 정말 싫어요.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려고만 하면 사람들이 이 속담을 백만 번 넘게 말해주더라고요. 또 사람들은 제가 하는 말이 너무 거창하다면서 웃어대요. 하지만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거창한 말도 쓸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빈은 속담을 읽다가 피식 웃는다. 앤의 감정을 알겠냐고 물었을 때 모르겠다, 모르겠어요, 모르겠는데, 모르쇠였다. 그런데 앤의 말을 따라 읽다 보니 기분이 후련해졌다. "앤도 짜증 나는 거예요. 간섭이 많으니까"
대화에 속도가 붙었다. 나는 양팔을 들고 야호를 외치며 몸을 흔들었다. 물론 마음속으로. 우리는 더 느릿느릿 읽었다. 빨간색 포스트잇이 붙은 장면에서 앤에게 공감하기도 하고 이상하다고 거리도 뒀다. 노란색과 파란색이 붙은 장면에서 우리는 앤을 부러워하다가 불쌍해하기도 했다. "선생님은 우울하면 뭘 해요?" 옅어진 경계선에서는 질문이 자란다. "나는 멍하니 유튜브를 봐. 우울한 날에는 스크린 타임이 늘어나. 조금 힘이 나면 음악을 들으며 강변을 달려" 빈은 게임을 한다. 레벨은 높이고 싶지만 현질은 자존심이 허락 안 한다. 피시방에서 김치볶음밥을 사주고 친구 숙제를 베끼기도 한다. 빈은 알려 주었고 나는 감사했다. 빈은 앤이 되고 나는 빈이 되고 우리는 뒤섞였다. 우리가 번갈아가며 삶의 조각을 꺼낼 때마다 우리는 번갈아가며 놀랐다. 우리의 삶은 색만 다르고 규격이 같은 비스포크 냉장고처럼 닮아 있었다.
학교, 학원, 집. 회사, 지하철, 집. 반복의 연속에서 얻은 무료함이 우리의 말에서 짙게 묻어났다. 기대하고 실망하고 원하고 포기하고 좋아하고 미워하고. 그런 게 모여 인생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우리는 반가웠다. 서로가.
"빈아. 가장 중요한 일과는 뭐야?"
"루리 산책이요."
빈도 물었다.
"선생님은요?"
"꾸따 화장실을 치우는 거"
아이 등원을 마치고 짜뚜리 시간 육아고충 나누는 초보 부모처럼 육견육묘 이야기가 이어졌다. 반려동물을 사랑해서 겪는 축복과 두려움. 앤은 소외당했다.
이제 글 쓸게요. 그날 빈은 막힘없이 글을 써냈다. 연필 잡은 손목에는 힘이 잔뜩 실리고 올라간 입꼬리는 가벼웠다. 빈은 글을 읽었다. 처음으로 빈의 목소리로 듣는 빈의 글이다. 루리를 향한 애정이 글에 잔뜩 묻었다. 걸게 변하기 시작한 열세 살 아이의 목소리에 다정함도 묻었다.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직장인과 학생, 이것저것 불리는 이름이 다른 우리가 풍만해지는 시간은 딱히 다르지 않다. 우정은 이렇게 나누는구나. 친구가 된 나는 물었다.
"내가 이 글 베껴도 돼? 내 마음이랑 똑같거든. 이름만 바꿔서 써 보고 싶어"
빈은 쿨하게 허락하고 쿨하게 집에 갔다. 나는 빈의 글과 빈 종이를 나란히 놓았다. 화자 '나'를 그대로 두고 '루리'를 '꾸따'로 바꾸어 옮겨 썼다. 바꿔도 거짓이 되지 않았다. 단어를 고치고 문장을 베끼며 우리는 가까워졌다. 글자가 빈과 나 사이에서 서서 둘을 이어주는 것처럼. 앤이 사는 세상도 글자로 만나고 빈의 세상이 글자로 써졌다. 따라 쓰며 또 다른 글자도 생겼다.
빈의 글이다.
제목 : 내 하루의 마지막을 꾸며 주는 것
오늘 학원 수업도 너무 지루했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다. 1분을 1시간 같이 느끼던 중, 드디어 선생님 입에서 "짐 싸라"라는 말이 나왔다. 이 말 굳게 닫힌 교실 문을 열고 우리를 집으로 이끌어주는 마법의 말이다. 나는 버스를 타고 속으로 격렬한 춤을 추며 집 앞에 도착했다. 도어록을 삑-삑- 누르자, 우렁찬 음 소리와 함께 리 집 강아지 루리가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마중 나왔다. 이것은 마치 '의 하루'라는 트리의 꼭대기에 별 장식을 올려놓는 것처럼, 내 트리의 마지막을 꾸며주었다. 나는 루리를 보자마자 품에 안아주었다. 그러자 루리는 내 손톱만 한 혀로 얼굴을 할짝할짝 핥으며 세수를 시켜주었다. 얼굴을 어찌나 핥았는지 얼굴이 흥건하게 루리의 침으로 젖어있었다. 나는 밖에 나가지 못해 심심했을 루리를 위해 목줄과 산책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 다시 양말과 신발을 신은 후, 문을 철컥 열었다. 엘리베이터 옆 숫자가 '3'이 되고 문이 열렸다. 루리가 너무 흥분했는지 문이 열리자마자 짧은 다리로 우다다다 뛰쳐나갔다. 나는 루리를 데리고 집 앞 공원에 갔고, 루리는 주변 풀 냄새를 킁킁 맡으며 바깥세상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약 30분 뒤, 루리와 나는 다시 집으로 걸어갔다. 루리도 이제 다 놀았는지 헥헥 소리와 함께 혀를 내밀고 가뿐 숨을 쉬었다. 엘리베이터 소리, 도어록 소리, 문 열리는 소리를 다시 들으면서 집에 도착했다. 나는 다시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반려동물용 물티슈를 한 장 뽑아 루의 발을 뽀득뽀득 닦아주었다. 이렇게 오늘도 나와 루리는 밤 산책을 끝내고 꿀잠에 들어 꿈에서도 산책을 했다.
나의 글이다.
제목 : 내 하루의 마지막을 채워 주는 것
오늘따라 더 피곤했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일 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데 "퇴근하세요"라는 말이 들렸다. 이 말은 굳게 닫힌 저 문을 열고 나를 집으로 데려주는 마법의 말이다. 기후동행카드를 찍고 9호선을 타고 또 찍고 5호선을 타고. 빽빽한 지하철 칸에서 가방을 앞으로 메고 스마트폰만 보고 버텼지만 마음은 날 듯이 후련했다. 도어록을 삑-삑 누르자, 앙칼진 울음소리와 함께 우리 집 고양이 꾸따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마중 나왔다. 이것은 '나의 하루'라는 드라마의 엔딩이다. 절정으로 치닫던 하루는 꾸따 꼬리의 쓰다듬으로 마무리된다. 나는 꾸따를 보자마자 꼭 안았다. 그러자 꾸따는 "넌 좋지만 껴안는 건 싫어. 굳이 만질 거면 궁둥이를 쳐라"는 표정으로 내 품에서 튕겨 나갔다. 그리고 엉덩이를 내 다에 비볐다. "캬앙~" 늦게 왔다고 얼마나 잔소리를 하던지 얼른 캔을 찾아 뚜껑을 땄다. 캔뚜껑 소리에 "꺄앙!!". 나는 하루종일 잠만 잤을 꾸따를 위해 장난감을 골랐다. 깃털에 반응이 없다. 구슬 달린 공을 집자 궁둥이를 떨면서 달릴 준비를 한다. 동공은 커지고 귀털이 뻣뻣해진다. 쓰리, 투, 원! 공을 던진다. 초식동물을 사냥하는 호랑이처럼 용맹하게 달려간다. 다음 놀이는 축구다. 종이를 구깃 뭉치자 꾸따가 의자 뒤로 숨는다. 우리는 호흡이 좋다. 식탁 아래로 던지자 손흥민처럼 달려 발로 통통 찬다. 드리블 연습을 하고 소파 밑으로 골인시키고 나서야 만족한 듯 날름 물을 먹는다. 훈련을 게을리 하지 꾸따가 장하다. 나는 정성껏 빗질을 해드리고 눈곱을 떼 드린 후 턱 밑을 긁어 드린다. 집사 오늘의 할 일 끝. 이렇게 나와 꾸따는 골골송을 부르며 잠든다. 우리는 꿈속에서도 낚싯대를 흔들고 공을 차고 궁둥이도 함께 흔들었다.
며칠 후 빈은 「걸리버여행기」를 들고 '이건 더 재미없어요'를 외치며 왔다. 더 재미없는 책 사이로 포스트잇 몇 장이 보였다. 우리가 함께 읽는 책이 한 권씩 늘어날 때마다 우리는 더 비슷해지고 더 달라질 것이다. 빈의 책 끝이 무지갯빛으로 물들수록 빈이 만든 경계선은 옅어질 것이다. 우리가 소리 내어 함께 읽는 글자가 많아질수록 우리가 함께 만드는 글자는 더 많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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