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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이주 Oct 27. 2024

하늘색 풍선을 타고 날아온 기억

행복할 수 있는 사람

바나나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을 수 있어요. 바나나 껍질이 없었다면 여기 오지 못했을 거예요. 놀랍지 않아요? 지금 우리를 이루는 원자들이 전에는 어디 있었는지 알아요? 다른 것 안에 있었어요. 어떤 행성이나, 공룡, 돌멩이 안에요. 원자들은 절대로 죽지 않아요. 무작정 떠돌아 다니던 아주 나이 많은 원자들이 한데 모여서 친절하게도 우리를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거예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여기 있는 거예요. 「숨을 참는 아이」뱅상 자뷔스


행복했나. 한 번도 행복한 적 없던 사람처럼 과거가 뿌예질 때가 있다. 분명 아닐 텐데. 어른은 가끔 그렇다.


그러다 작은 기억이 부상한다. 침전한 행복이 날 살리러 온다. 기억은 혼자가 아니다. 쨍한 빛도 오고 쿰쿰한 냄새도 온다.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시리던 코끝의 감각도 온다. 빛이, 냄새가, 소리가, 기억을 따뜻하게 데워서 온다. 진짜 일어났던 일인지 마음에 담아 둔 남의 이야기인지 생경할 정도로. 어쨌거나 그제야 이 몸도 행복이 작동하는 인체라는 사실에 안심한다. 반가운 불청객이다.


하루는 해가 지면 쌀쌀한 가을이었다. 피곤을 묻히고 택시를 탔다. 이 자리에 앉았던 본 적 없는 사람의 잔향까지 피로하다. 코를 옷깃 사이 깊게 묻고 상체를 웅크렸다. 뜨겁게 메마른 눈을 감았다.


‘엠비씨 에프엠 포유’ 열 한시다.

라디오 시그널이 시간을 알린다. 자동차 뒷좌석에서 가능한 최적의 편한 자세를 찾는다. 눈이 감기더니 귀가 열린다. 오늘 나는 '별이 빛나는 밤'이 될 때까지 무엇을 했나. 빛나는 별은커녕 쿰쿰한 냄새뿐이다. 몸은 방전인데 머리는 윙윙 가동된다.


부단히 몸을 움직여 일을 하고 돈을 버는 어른으로 살게 해 주셔서 고마워요. 일이 없을 때 정말 원하던 하루였어요. 잊지 않았어요. 그런데 조금은 쉬어도 좋겠단 생각이 들어요. 그냥 그렇다고요. 진짜 쉬겠다는 건 아니구요. 쉬면 불안해지겠죠. 다들 이렇게 사는 건가요. 이게 삶이란 건가요⋯.


누구한테 말하는 거야. 또 시작이다. 녹초로 귀가하는 서울 시민의 고질병. 온오프가 고장 난 자동생각장치.

택시는 잔향과 라디오 시그널과 넋두리를 태우고 올림픽대로를 달린다. 뻥 뚫린 대로 위에서 액셀을 밟는 기사님의 발이 경쾌하고 택시 엉덩이는 들썩인다.


'파란 하늘, 하늘색 풍선은, 우리 맘 속에 영원할 거야.
너희들의 그 예쁜 마음을 우리가 항상 지켜줄 거야.'


가수 지오디의 노래 하늘색 풍선이 흘러나온다. 서울 밤, 택시 안, 엿가락처럼 늘어진 몸, 뜨겁게 가동 중인 머리. 그 머리에 달린 입이 중얼중얼 노래를 따라 부른다. 내 의지가 아니다. 한평생 경전을 왼 스님처럼 줄줄 새어 나온다.


열세 살 가을도 해가 지면 쌀쌀했다. 오빠와 전주 할머니 집으로 가는 길. 엄마와 아빠는 배추를 소금에 절이려고 먼저 갔다. 나는 오빠와 둘이 있는 시간이 좋았다. 고달픈 사춘기 인간관계를 푸념할 기회였다. 오빠는 종알종알 떠드는 열세 살의 일그러진 영웅 스토리를 묵묵히 듣는다. 심각한 나는 무던한 반응이 성에 차지 않아 더 소리를 높여 쫑알거리고 ‘원래 다 그런 거야’ 뻔한 말로 종알거림을 끝낸다. 그리고 음악 소리를 키운다.


‘2001. 가을’ 폴더에는 다운로드한 192K 음원이 가득했다. 지오디 3집 첫 번째 트랙이 시작된다. 그 시절엔 앨범에 기승전결이 있었다. 잔잔한 첫 곡이 끝나고 두 번째 트랙 ‘촛불하나’. 우리는 열창한다. 오빠는 데니안의 랩, 나는 김태우의 보컬을 담당한다. 앨범의 마지막 곡 ‘하늘색 풍선’으로 커튼콜까지. 차 안은 노래방이 되고 진짜 가수는 코러스가 되고 우리는 가수가 된다.


마을 어귀에 도착해서야 볼륨을 줄인다. 나는 개운하다. 생각을 생각으로 없애는 법 밖에 몰랐던 나는 사는 법 하나를 배웠기 때문이다. 가락에 몸을 흔들고 가사 따라 소리 지르며 기우는 사춘기의 균형을 찾아갔다.


다시 올림픽대로. 아직 노래가 안 끝났다. 슬개골을 치면 앞으로 튕기는 무릎반사처럼 가사가 새어 나오고 열창의 기억이 떠오르니 웃음이 난다.


집 앞이다.
감사합니다. 안전 운전하세요.

오늘 밤 몇 번이고 고장 난 사람들을 태워 올림픽대로를 오갈 기사님의 무탈을 바라며 인사한다. 기억을 배달한 노래 한 소절 덕에 인사할 여유를 찾았다. 별이 빛나는 밤에 피디에게 고맙다. 지오디도 고맙다. 물론 환기의 방법을 노래에 새겨 준 열세 살 나의 기사님에게도 감사하다.


해 질 무렵 주택가에서 밥 냄새가 나면, 나무에 묶인 검정 고무줄을 풀어 챙기는 아이가 떠오른다. 이마에 맺힌 땀, 손에 배긴 고무 냄새, 아쉬운 마음도 생생하다. 가끔 학원에 오는 아이들이 알사탕 하나를 쥐어 준다. 입 속에서 사탕을 굴리다 보면, 사탕이 기도에 막혀 울던 아이도 떠오른다. 입을 쩍 벌리면 아빠는 손가락으로 툭 빼내었다. 불규칙한 호흡, 살았다는 안도감, 혀에 남은 텁텁한 단맛도 그대로다.


아이들이 복도를 달린다. 쉬는 시간이 끝났다는 말에 정수기로 달려가 물을 벌컥 마신다. 더 놀고 싶다며 찡그린다. 수업이 끝난다. 데리러 온 할머니는 아이의 무거운 가방을 들고 손을 꼭 잡는다. 태권도 도복을 입은 아이는 신나게 아래층 태권도학원으로 달려간다. 아이들은 자라고 기억들은 가라앉을 것이다. 그러다 바람을 가르며 뛰는 시원함이, 할머니의 포근한 손이, 허리를 쪼이도록 꽉 묶은 도복의 감촉이 느닥없이 나타날 것이다. 행복했노라고.
지금도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해줄 것이다.


* 커버 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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