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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이주 Feb 19. 2024

판사님께 따지겠어요

사심을 채우는 독서 수업 

혼자는 너무 외롭고 쓸쓸해. 나도 가족이 있으면 어떨까?
그래, 이제부터 여러 가족을 살펴보고 내가 살 곳을 정할 거야! 
「이웃집에는 어떤 가족이 살까?」 유다정



여자 아이 두 명과 남자아이 두 명이 둥글게 앉았다. 김민지, 박시영, 임수호, 김정안. 나와 책을 읽는 가장 어린아이들이다. 하지만 벌써 초등학교이란 신분으로 사계절을 겪은 예비 2학년. 성장의 속도가 눈부시다.


단발머리 민지는 학교 선생님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오른손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왼손으로 보드마커를 칠판에 툭툭 친다. “모두 조용히 하세요-옷.” 입꼬리와 눈빛에 힘을 단단히 주는 마무리도 놓치지 않는다. 민지가 있으면 나는 쉬는 시간에 할 일이 없다. 아이들은 진짜 선생님보다 쇼맨십이 좋은 리더를 찾아간다. 민지가 빈 교실을 찾아 복도를 어슬렁거리면 세 아이가 그 뒤를 따른다. 책상과 의자를 야무지게 구석으로 몰아넣고 말한다. “이제 들어와도 돼.” 교실 문이 쾅 닫힌다. 눈을 감고 술래잡기를 하는 일명 ‘눈감술’이 유행인데 교실에서 하면 부딪힐 물건이 많아 다칠 위험이 있다. 민지는 선생님이 조심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다른 놀이를 하도록 유도하는 모습을 유심히 보고 봐두었다. 나는 깜찍한 치밀함에 놀라 조용히 문밖에서 지켜본다. 볼에 붙은 코딱지를 살살 떼어주면 입에 넣으려던 작은 아이가 사계절이 지나니 전략가가 되었다. 어른의 행동을 유심히 분석하며 야무지게 성장한다. 애틋한 과정이다.


시영은 흐트러짐이 싫은 아이다.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갈라 단정하게 땋았다. 묶이지 않는 잔머리는 핀으로 고정되었다. 시영이 손길이 닿으면 질서가 생긴다. 책상 위 연필, 지우개, 필통은 무인양품 광고 사진이 된다. 시영의 몸과 몸이 놓인 의자, 책상의 각도는 교과서에 그려진 철수와 영희처럼 올곧다. 친구 팔꿈치가 넘어와 물건의 위치가 달라지면 재빨리 원래대로 놓는다. 사물만 가지런한 것이 아니다.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을 땐 “나와 같이 놀지 않을래?” 또박또박 당차게 묻는다. 거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친구들과 놀고 싶지 않은 날에는 “오늘은 나 빼줘. 앉아서 구경하는 게 낫겠어” 말한다. 나는 시영의 정돈된 마음을 구경한다.


수호는 태권도장에서 온다. 도장에서 나에게 오기까지 오분이 안 걸린다. 문을 열자마자 벽시계한테 안녕하세요 외친다. 누구에게 인사하는 걸까. 초침의 움직임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내 얼굴을 보고 말한다. “오늘은 30초 늦었네요.” 수호는 숫자를 좋아한다. 그래서 초등학생이 익히는 사회의 규칙이 자연스레 수와 연결된다. 쉬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책 몇 쪽을 읽어야 하는지, 숫자가 들어간 일은 수호가 맡는다. 수호는 일곱 살 여자동생이 있다. 동생 수영이는 문 밖에서 오빠가 교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보다가 참지 못하고 수호 등에 소리친다. ”나도 여기 다닐 거야! 오빠보다 책 많이 읽을 거야!” 수호는 귀찮다는 듯 교실 문을 닫아 버리고 허리춤에 느슨하게 묶인 초록 띠를 꽉 조인다. “동생은 정말 귀찮아. 집에 가면 엉덩이를 꼬집어버릴 거야.” 왠지 안 꼬집을 것 같아서 괜히 귀찮은 이유를 묻는다. 수호의 마음이 더 듣고 싶다. ”나는 좋은 오빠예요. 그런데 자꾸 쟤는 나를 나쁜 오빠처럼 굴게 해요. 동생이 없다면 엄마한테 혼나지도 않을 걸요.” 수호가 계절을 몇 개 더 보낸 뒤 동생을 바라보는 자신의 눈빛을 알게 되면 방금 한 말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임을 알게 될 거다. 수를 좋아하는 수호는 벌써 동생의 까랑한 눈빛에 져주고 있었다. 초 단위로 쪼개며 살아서일까. 시간을 응축해서 경험하고 마음을 키운다. 생의 농도가 짙은 사람처럼 또래보다 성숙하다.


정안이는 연필로 글씨를 쓰는 게 제일 귀찮다. 손보다 빠른 입이 있기 때문이다. 말이 많다. 그런데 말하는 솜씨가 재미있고 내용도 유익해서 모두가 집중한다. ”에펠탑을 지은 사람이 누구게?” 아이들은 고민한다. 정안이는 여유 있게 말한다. “누구긴 누구야, 에펠이지!” 이 순간을 위해 달려온 것이다. ‘합죽이가 됩시다, 합’이나 ‘벙어리장갑’을 쓰면 안 되는 말이라 알려주기도 한다. 정안이가 지식 공유의 기쁨에 취하면 나는 넌지시 말해본다. ”정안이가 아는 세상을 글자로 말하면 글이 되는 거야. 말과 글은 크게 다르지 않아.” ”입으로 말하는 게 빨라요. 손가락이 입보다 느리다고요. 쓰다 보면 생각을 까먹어요. 그런데 쌤, 미국의 수도가 어디게요?” 만만치 않다. 말한 김에 하고 싶은 말을 더 하는 정안이. 글씨를 쓰려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속도가 성급한 마음을 따라잡지 못하니 입을 부단히 움직이며 아는 지식을 뽐낸다. 뽐낼수록 귀여운 나이다. 앎을 드러낼수록 사랑스러운 건 아이들의 특권이다.

교실에 동글게 모인 우리는 오늘도 책과 함께 부지런히 자란다. 이번 주 책은「이웃집에는 어떤 가족이 살까?」 주인공은 고양이 미오다. 미오는 길고양이 세계의 우두머리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화가 나면 터럭을 곤두 세운다. 하지만 고양이 친구들이 짝을 찾거나 사람들의 가족이 되어 미오 곁을 떠나고 미오는 생각한다. “나도 가족이 있으면 어떨까?” 미오는 동네를 거닐며 집 안을 들여다본다. 사는 모습을 구경한다. 파란 셔츠가 널린 집에는 엄마와 아들, 둘이 산다. 식물이 많은 집은 피부색이 다른 가족이 산다. 강아지와 둘이 사는 집도 있다. 책을 고르긴 했지만 걱정스러웠다. 아홉 살이 된 아이들은 미오가 만난 가족의 얼굴을 얼마나 이해할까. 아이들이 혼란스러워하면 무얼 하지.


나는 칠판에 미오가 만난 가족을 차례로 적었다. 1인 가족, 조손 가족, 다문화 가족, 한부모 가족, 입양 가족… 다 적기도 전에 아이들은 먼저 말하겠다고 겨드랑이를 늘려가며 손을 든다. 설명 끝에는 질문이 붙는다.


“아빠랑 엄마랑 이혼을 하면 나는 누구와 살아야 해요? 엄마랑 살면 아빠는 볼 수 없나요?”
민지가 심각하게 묻는다.
“아빠와 엄마가 친구가 된다고 해도 민영이 엄마, 민영이 아빠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아. 당연히 볼 수 있지.” “음,, 지금처럼 아빠 할머니를 안아줄 수는 있는 거죠?”

쏟아지는 질문에 어디까지 대답을 해야 할지 갈팡질팡 하던 중, 빛이 든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할머니를 안아 주지 못할 까봐 걱정이 가득한 민지, 대답을 기다리는 아이들 머리 위로 핀조명이 켜진다. 따- 다닥.


“아빠 할머니라면 아빠의 엄마를 말하는 거죠? 친할머니.”

“네, 지금처럼 친할머니를 만나서 꼭 껴안아주는 건 괜찮냐고요.”

대답은 안 하고 감동에 벅차올라 이상한 표정을 짓는 선생님이 답답하다. 민지의 걱정은 꽤나 구체적이었다. 일어나지 않은 상황이지만 상상만으로도 자신에게 결정권이 많지 않다는 먹먹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엄마와 아빠가 따로 사는 장면까지 머릿속으로 구현되었으나 친할머니가 등장하자 상영이 멈춘 것이다.

“되고 말고! 당연하지! 친할머니가 민영이 할머니라는 사실도 변하지 않지”
”정말 다행이에요. 그러면 됐어요.”
민지의 자기 주도적 리더십은 사랑에서도 발휘된다. 가족의 모습이 달라지더라도 사랑의 모습은 지금처럼 지키겠다는 것이다. 글쓰기를 하려면 다음 수업단계로 넘어가야 하지만 조금만 더 감동을 느끼기로 한다. 왜냐하면 아이라서 가능한 순수한 질문은 귀하기 때문이다. 이 직업을 택한 이상 조금만 더 사심을 채워도 된다.


“한부모 가족이면서 입양가족일 수도 있어요?” 흐트러짐이 없는 시영이는 흘러 내려온 잔머리를 다시 핀으로 야무지게 꽂으며 묻는다. 어라, 내가 아이들은 얕본 걸까. 아이들은 길고양이 미오가 만나지 못한 가족의 모습까지 그려내고 있었다.

“가능하지만 안 되는 나라도 있어.”
“어딘데요?” “우리나라”

아이들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뭐라고요? 그렇다면 내가 당장 판사에게 따지겠어요!”
엄마와 아빠가 어찌 되든 간에 아빠 할머니를 안아 주겠다는 아이의 쩌렁쩌렁한 외침이다.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이들은 감정이 변하면 자세도 변한다. 세 아이도 따라 외친다.
“따지겠어요. 한 부모만 있어도 가족이고 입양을 해도 가족이 된다면서, 왜 한 부모가 입양을 하면 가족이 아닌지 말이에요!”
잠시 줄어든 머리 위 핀조명의 광량이 커진다. 이제 막 학교에서 네 번의 계절을 지낸 아이들과 비판적으로 법을 분석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진짜다. 하지만 아이들의 비판을 잠시 들어본다. 잠잠해질 때까지 생각을 펼치게 둔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절제되지 않은 흥분은 가끔 그럴만하기 때문이다. 이 직업을 택한 이상 조금만 더 사심을 채워도 된다.


“무려 14분이나 기다렸어요. 이젠 내 차례예요.” 

십사 분. 겨드랑이를 세차게 드러내던 아이들이 전부 팔을 내린다. 맞다, 구체적인 수치는 묘하게 힘이 있다. 수호가 묻는다.
"만약 일본 사람이랑 미국사람이랑 결혼을 해요. 그리고 한국 아이를 입양하면 가족이 될 수 있어요?”
정안이는 당연한 질문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당연하지. 나라가 다른 게 무슨 상관이겠어. 그럼 다문화 입양 가족이라고 부르면 되는 건가? 그 가족은 분명 재밌을 거야. 문화가 많으니까. 햄버거도 먹고 초밥도 먹고 김치찌개도 먹는 거지.”
다 함께 목젖을 보여가며 즐겁게 웃는다. 맛있는 음식 대화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도 웃게 할 게다.


어쩌다 보니 아이들도 나도 4인 가족이다. 엄마와 아빠가 있고 형제자매가 있다. 그러니까 살아 보지 않은 가족의 모양은 이해하기 힘들 거라는 내 걱정은 경기도 오산이었다. 아이들이 쏟아 올린 질문은 나의 굳은 땅에 떨어져 균열을 일으킨다. 경쾌하게 콩콩 뛰면서 깨 부시고 흙처럼 만든다. 다져진 땅에 빛이 비치며 싱그러운 생각을 키운다. 묵은 생각은 거름이 되어준다. 아이에게 부서지며 튼튼한 어른이 된다.

내일의 빛을 쬐기 위해 나는 또 책을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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