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 만에 알게 된 충격적인 진실
오늘은 하루 종일 외근을 다니다 왔다. 오전 11시쯤 나가서 5시까지 5군데 정도의 병원에 다녀왔다. 1시간을 이동해서, 30분을 기다리고, 5분 남짓한 미팅을 5번 반복하고 나니 어느덧 5시가 되었다. 본격적인 업무는 5시부터 시작했고, 결국 야근을 해버리고 말았다.
영업에서 마케팅으로 직무를 바꾼 이후로는 외근 나갈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예전 회사에서 보기로도 마케팅 PM들은 대부분 사무실에서 보고 자료를 만들고, 매출 전략을 짜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오히려 외근이 꼭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케팅과 영업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다. 마케팅은 영업을 위한 전략을 짜고, 영업은 그 전략을 실행에 옮긴다. 그런데 마케팅이 현장을 알지 못하면 뜬구름 잡는 전략을 짜게 되고, 그러면 영업은 그 뜬구름 잡는 전략을 실행에 옮기는 수밖에 없다. 마케팅은 책상 머리에 앉아서 숫자 놀음이나 하는 놈들이라고 욕하면서.
나도 그랬다. 5월에 예정되어 있는 신제품 출시 전략을 팀장님께 보고하자 너무 뻔하다고, 너만의 뾰족함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했다. 맞는 말이긴 했다. 기발하고 참신한 전략이라기보다는 무난하고 뻔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삐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누군들 그렇게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있나? 그런 게 있으면 내가 무엇하러 쥐꼬리만 한 월급받으면서 여길 다니나, 내가 회사 차려서 돈 벌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막상 진짜 뾰족한 거 가져오면 애들 장난이냐면서 빠꾸시킬 거잖아?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막상 거래처에 가서 고객을 만나니 달랐다. "그래서 얼마야?", "제품이 좋다고? 그걸 써봐야 알지 네 말을 어떻게 믿어." 라는 한 마디에 내가 몇 주 동안 짠 모든 전략은 무의미해졌다. 3C가 어쩌고, 4P가 어쩌고, SWOT이 뭐고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지난 몇 주 동안 이 제품에 대해서만 생각해온 내가 보기에는 이 제품이 정말 특별한 제품이고, 무조건 잘 될 제품이었지만 고객이 보기에는 세상의 깔리고 깔린 제품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걸 생각지 못했다. 영업을 6년 했는데 불과 3개월 만에 내가 욕하던 그 뜬구름 잡는 PM중에 하나가 되어 버렸다.
물론 딱히 뾰족한 수가 나오지는 않았다. 아마 내일도 나는 외근을 나가고, 갔다 와서는 머리를 뜯으며 나오지 않는 아이디어를 쥐어 짜게 될 것이다.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