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
사랑에 대한 관념부터 뜯어고치기로 했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내가 꿈꿔온 여자였다. 평소 같았으면 말도 못 붙였을 여자가, 나랑은 안 어울린다고 진작에 접었을 여자가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꿈만 같았다.
그래서 최선을 다했다. 네가 뭘 좋아할지, 뭘 하면 나에게 웃어줄지 하루 종일 생각했다. 서운한 게 있어도 티를 내지 않았고, 헤어지고 난 뒤에도 단 한 번도 너를 원망하지 않았다. 다 내가 부족한 탓이라고 자책했다. 너를 탓하느니 내가 상처를 받는 걸 택했다.
하지만 다 끝났다. 너의 삶에 아주 작은 개입조차 할 수 없도록 모든 걸 차단당했다. 너의 삶에 나는 없는 사람이 되었고, 나는 한동안 너에 대한 기억을 붙들려고 애썼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런데 주변에서 다른 사람들이 연애를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지 않았다. 막 대할수록 오히려 잘 됐다. 일단 술을 먹이고 진도를 빨리 빼고 나면 여자가 오히려 더 을이 되어서 매달렸다. 예쁜 말만 하고 예쁜 짓만 하려고 쩔쩔매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매번 이렇게 얼마 가지도 못하고 차이는 사람도 나밖에 없었다.
“왜 이 세상에서는 선이 패배하고 악이 승리하는가?”
이건 내가 평생 동안 고민해왔던 문제였다. 어른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래서 열심히 했는데 막상 중학교 2학년 때 내가 좋아했던 소녀는 내가 아니라 불량스럽고 양아치 같은 애들을 좋아했다는 걸 알았을 때,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생각하면서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취업할 땐 그런 게 하나도 쓸모가 없다는 걸 느꼈을 때 나는 이 질문을 던졌다. 내 삶의 중요한 순간들에는 늘 이 질문이 있었다.
선의지는 보석과 같이 그 자체만으로도, 그 자신 안에 온전한 가치를 가진 어떤 것으로서 빛난다.
- 칸트, 정언명령
그런데, 내가 정말 착한 남자이긴 했던 걸까?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선의 본질은 선한 의지라고 했다. 결과가 좋지 않았더라도 선한 의지를 갖고 한 행동이라면 그건 선행이고, 결과가 좋았더라도 악한 의지로 한 행동이라면 선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기업가들은 사회에 재화나 서비스를 공급하고, 일자리를 창출한다. 사회에 선한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그들이 선한 의지로 이런 행동을 하는 건 아니다. 돈 벌고 싶어서 하는 일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가들이 사회에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건 칸트의 관점에서 선행이라 할 수는 없다.
내가 사랑이라 믿었던 건 어땠을까. 분명 나는 너에게 착하게 행동했다. 그런데 그 행동에 정말 선한 의도가 깃들어있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냥, 나는 너를 원했다. 너와 손 잡고 같이 걷고 싶었고, 함께 있고 싶었고, 너를 안고 싶었다. 그게 너를 위한 거였을까? 아니다. 내가 좋으니까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거다.
너의 마음은 어땠을까? 나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서 일부러 나를 버렸을까? 아니다. 나는 너와 함께 있는 게 행복했지만 너는 나와 함께 있는 게 행복하지 않았을 뿐이다.
주변 사람들은 어땠을까? 그들은 여자에게 막 대할수록 여자가 오히려 더 매달린다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상대방의 진심을 악용하는 그들이 못됐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 내가 복을 받는 게 더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굴러가지 않았다. 나는 세상이 잘못됐다고, 여자들이 보는 눈이 없어서 착한 남자를 못 알아보고 나쁜 남자만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일까? 만약에 네가 나에게 모텔에 가자고 했으면 내가 안 갔을까? 만약 내가 너에게 맞추건 맞추지 않건 네가 변함없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너를 배려하고 너에게 맞추려고 노력했을까? 안 그랬을 것이다. 나도 갑질을 할 수 있었다면 했을 것이다.
너, 나, 그리고 주변의 소위 말하는 나쁜 남자들. 이들 중 칸트주의적 관점에서 선한 의지에 근거하여 행동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각자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니까 다른 방식으로 자기 행복을 추구했을 뿐이다. 나는 을이니까 너에게 고개를 숙였고, 너는 갑이니까 그렇게 하지 않은 것 뿐이다. 내가 갑이었다면 당연히 나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선악이라는 게 없다면 남는 건 하나, 강자와 약자가 있을 뿐이다. 너는 내게 매력적인 여자였지만 나는 네게 매력적인 남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너와의 관계에서 나는 을이고 너는 갑일 수밖에 었다.
결국 누구도 탓할 수 없다. 탓할 건 부족한 나 자신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