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전
경제학에는 매몰비용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미 잃어버려서 되찾을 수 없는 비용을 의미한다. 가령 1박에 20만 원짜리 호텔을 예약했다고 가정해보자. 호텔 규정에 따르면 일주일 전에 예약을 취소하면 전액을 돌려받을 수 있고, 5일 전에는 70%, 3일 전에는 50%, 그 이후로는 아예 돌려받을 수 없다고 한다. 이때 일주일 이전에 호텔 예약을 취소한다면 매몰비용은 없다. 전액을 돌려받았기 때문에, 잃어버려서 되찾을 수 없는 비용이 없는 것이다. 한편 5일 전에 한다면 매몰비용은 30%다. 70%만 돌려받았기 때문에 나머지 30%는 돌려받을 수 없는 매몰비용이 된다. 만약 하루나 이틀 전에 했다면 100%다. 한 푼도 돌려받을 수 없다.
경제학에서 전제하는 합리적 인간은 의사결정을 할 때 매몰비용을 고려하지 않는다. 10%의 확률로 10만 원을 따고, 90%의 확률로 3만 원을 잃는 도박을 가정해보자. 이 도박의 기댓값은 0.1 * 100,000 + 0.9 * (-30,000) = -1.7만원이다. 즉, 이 도박은 하면 할수록 돈을 잃는 게임이다. 10판을 하면 17만 원, 100판을 하면 170만 원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하면 안 된다. 하지만 이미 이 도박을 하다 1,000만 원을 날린 상태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날린 돈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계속 도박에 매달리게 된다. 그러다보면 손실은 2,000만원, 3,000만원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매몰비용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활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기업에 들어간 사람들 중에는 일부러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거나 외제차를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일단 큰 돈을 쓰고 나면 회사 생활이 아무리 힘들어도 할부금을 다 갚을 때까지는 꾸역꾸역 다니게 된다는 것이다. 이건 경제학적으로 합리적인 사고는 아니다. 차는 소모품이다. 타고 다닐수록, 아니, 그냥 주차장에 앉혀 놓기만 해도 감가상각이 일어난다. 중고차로 내놓아도 가격이 쭉쭉 떨어진다. 그 격차는 매몰비용이다. 돌려받을 수 없다. 그러니 고려하지 말아야 한다. 회사 생활을 계속할지 말지를 결정할 때는 회사 생활 자체를 통해 발생하는 손해와 이익만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다른 직장을 새로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거나, 부양 가족이 있어서 회사를 쉽사리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이라면 달라질 수도 있다. 매몰 비용에 매달리는 인간의 비합리적인 심리를 이용해서라도 회사에 남아있는 게 더 도움이 되는 일일 수 있다.
추억은 가슴에 묻고 지나간 버스는 미련을 버려.
- 영화 <내부자들>
매몰비용의 원리는 남녀 관계에서도 활용될 수 있다. 주변 친구들과 연애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일단 술을 먹여서 모텔에 데려가고 따먹으라는 조언을 많이 듣곤 했다. 그러고 나면 이전에는 도도하고 까칠하고 표현도 잘 안하던 여자들도 먼저 애교 부리고 살갑게 대하게 되어서 연애하기가 더 쉬워진다는 것이다.
왜 그런 걸까? 왜 남녀 관계는 섹스를 기점으로 역전되는 걸까? 왜 섹스하기 전에는 여자가 갑인데 하고 나면 남자가 갑일까? 여자에게는 섹스가 매몰비용이기 때문이다. 섹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번식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많은 자원을 투자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은 남성에 비해 파트너를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남자들처럼 아무나에게 연락처를 묻고, 술집에서 합석을 시도했다가 무책임하고 무능한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면 여자가 투자한 많은 자원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문화는 여성에게 조신함을 요구한다. 성 경험이 많은 남자는 알파 메일, 능력자로 추앙받지만 성 경험이 많은 여자는 헤픈 여자, 창녀, 걸레 취급을 받는다. 남녀가 섹스만 하고 사귀지 않았거나, 사귀었지만 금방 헤어진 경우 여자는 먹버(먹고 버리다의 준말)당했다며 괴로워하지만 남자의 친구들은 “그래서, 섹스는 했냐?”라고 묻고, 남자는 뿌듯해하며 했다고 대답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에게 섹스란 매몰비용이다. 임신이나 성병의 위험, 아이를 낳음으로써 생겨나게 될 많은 책임들, 헤픈 여자라는 비난과 조롱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그 심리를 이용한다면 편하고 즐거운 연애를 할 수 있다. 매몰비용이 없을 때 사람들은 당장의 이익과 손해만을 고려한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남자에게 해주는 것(손해) 이상의 것을 받으려(이익) 한다. 남자는 당연히 더 자주 연락하고, 더 많은 돈을 쓰고, 더 매너있게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매몰비용을 박아두면 달라진다. 남자와의 관계에서 자기가 계속 손해를 보게 되더라도 이미 지불해놓은 매몰비용이 아까워서 쉽사리 헤어지자고 하지 못하게 된다. 연락을 자주 안해도, 돈을 많이 안써도 오히려 매달리게 된다. 마이너스 통장을 뚫어놓은 대기업 신입사원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일단 섹스를 해야 한다. 한 번만 해달라고 애걸복걸 매달리건, 술의 힘을 빌리건, 비싼 선물과 감언이설로 구워삶건 뭐라도 해야 한다. 투자할 수 있는 모든 걸 투자해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일단 섹스를 하고 나면 여자로부터 그 이상의 것들을 회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