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신여성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본능

by 김선비

메갈리아 사태와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나는 한동안 페미니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페미니즘이 단순히 남자가 가진 걸 뺏어서 여자에게 퍼주자는 사상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유한하다. 그래서 모두가 가질 수 없다. 한 사람이 무언가를 더 가지려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빼앗아와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들 행복해지고 싶어한다. 남보다 더 갖고 싶어하지 자기가 가진 것을 떼어서 남 주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남녀는 끊임없이 자기의 고통을 부풀리고 남의 고통을 후려치면서 싸운다. 남자는 여자를 속물, 김치녀라고 비난하고, 여자는 남자를 잠재적 성범죄자라고 비난한다. 결국 더 달라는 거다. 내가 약자고 선이라야 강자이며 악인 저들의 것을 합법적으로 뺏어올 수 있기 때문에 남녀는 서로 자기가 선이고 약자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그런데 꼭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다. 남자와 여자는 함께 행복해질 수 있다. 남녀의 고통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왜 여자보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가? 남자는 왜 힘들고 위험한 일을 도맡아 해야 하는가? 남자는 왜 울면 안 되고 두려움, 상처, 열등감과 같은 자기의 감정적 약점들을 솔직히 털어놓으면 안 되는가? 남자는 강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자를 이끌어주고 지켜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자는 왜 결혼 이후 자기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육아와 남편 내조에 전념해야 하는가? 여자는 왜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거나 성적인 욕망을 표출해서는 안 되는가? 여자는 남자라는 그늘 안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덩치가 커야 하니까 여자는 가녀려야 하는 것이고, 남자는 호색한이어야 하니까 여자는 조신해야 하는 것이며, 남자는 야망이 크고 자신감이 넘쳐야 하니까 여자는 순종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쪽의 편견이 사라지면 다른 쪽의 편견도 같이 사라질 수 있다. 자기 분야에서 남자들과 당당히 경쟁해서 성과를 내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쟁취한 여자들이 많아지면 여자는 남편 내조와 아이들 육아를 하며 안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편견이 사라지고, 그 반대편에 있는 남자는 큰 야망을 갖고 성과를 내야 한다는 편견도 사라진다. 그러면 남자들이 여자보다 데이트 비용을 많이 내고, 집을 해와야 한다는 편견도 사라지게 된다. 남녀는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페미니즘의 이상을 현실에서 실천해보려는 시도들을 해본 적도 있다. 데이트 비용을 반반씩 내자고 해본 적도 있고, 내 마음을 먼저 표현하기보다 여자가 다가와주길 기다렸던 적도 있고, 나의 감정적 결핍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적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잘된 적이 없다. 좋은 사람인 것 같긴 하지만 남자로서 설렘이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대답만이 돌아오곤 했다. 심지어 페미니즘을 지지한다는 여자들조차 그랬다. 직장이나 학교에서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연애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여자들은 철저히 여성스러웠다. 내가 좀 튕겨도 남자가 남자답게 확 끌어당겨주길, 내가 원하는 걸 직접 말하지 않아도 남자가 센스있게 눈치채주길 바랐다.


그때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건 인간의 본능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랑은 본능적 끌림이다. 그리고 인간의 본능은 자연선택이라는 과정을 통해 진화되어왔다. 분명 태초에는 지금보다 더 다양한 인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호색적이고 경쟁심과 호기심이 넘쳐나는 여자도 있었을 것이고, 조신하고 수줍어하며 수동적인 성향의 남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 중 이성이 선호하는 특질을 가진 이들은 이성과 결합해서 자기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했을 것이고, 나머지는 그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결과물이 오늘날의 우리다. 그렇게 만들어진 여자들이 남자다운 남자를 선호하고, 남자들은 여자다운 여자를 선호한다. 그 사실은 결코 가벼운 게 아니다. 태초의 인류였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등장한 이래 지금까지 200만 년에 걸쳐 서서히 형성되어 온 것이다. 페미니즘 따위 그럴싸한 말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편견을 없애겠다는 건 10년 넘게 하루 한 갑 씩 피워온 담배를 하루 이틀만에 끊겠다고 하는 것 만큼이나 우스운 일이다.


그러니까 남자답게 굴어야 한다. 근육을 키우고, 돈을 벌고, 비싼 차를 사야 한다. 어떤 상황이라도 자신감과 호전성을 잃지 말아야 하고 여자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그런 모습을 받아줄 여자, 나약하고 자신감 없는 당신을 지켜줄 신여성은 적어도 향후 200만 년이 더 지나가기 전까지는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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