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내가 정말 원했던 건 그게 아니었다.
신입 사원 때 여자 동기 중 하나가 남자 친구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던 적이 있다. 남자 친구가 자기에게 화가 난 것 같은데 왜 화가 났는지 솔직히 말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화를 풀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그 남자친구의 불만이 무엇인 것 같냐고 물어봤다. 그래서 여자 동기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듣고 있던 남자 동기가 말했다. "야! 그냥 가서 술이나 한잔하고, 잠이나 자. 남녀 사이엔 그저 떡 한 번 치면 다 풀리는 거다. 떡정이 최고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야."
화가 났다. 당사자인 여자 동기도 가만 있는데 엉뚱하게 내가 열불이 났다. 하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그리고 이내 우울해졌다.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사랑의 본질은 성욕이다, 그러니까 일단 섹스를 하고 봐야 한다, 그러면 오히려 여자가 더 매달린다, 다 내가 앞에서 했던 말이다. 저 말을 한 남자 동기와 내 생각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저 말을 듣고 내가 우울해하는 건 말이 안 된다. 맞장구를 치거나, 흐뭇해하면서 듣고 있었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듣고 화를 냈다. 아니, 감히 화를 내지도 못했다. 그냥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척, 무슨 말인지 다 아는 척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사실 나는 사랑이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20년 전부터 그랬다. 당시 나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다. 부모님의 사랑과 선생님의 총애를 받았으며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내 앞길이 탄탄대로일 거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그 모든 건 무의미해졌다. 저 숙제도 안 해오고 뒷골목에서 담배나 피우는 양아치 새끼들처럼 되어서라도, 이후의 내 삶을 모두 걸어서라도 단 한 순간이라도 널 갖고 싶었다. 하지만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전에도 후에도 그랬다. 중학생 때 처음 사랑했던 갈색 단발 머리 소녀와는 다신 만날 수도 없는 원수지간이 되어 버렸고, 고등학생 때 좋아했던 여자는 대학 가고 나서 교제하자고 해놓고 다른 남자가 생겨버렸고, ‘너’는 아예 연락처를 차단해버렸다. 내가 부재중 전화를 100통 쯤 한 것도 아닌데, 장문 카톡을 보낸 것도, 집 앞에 찾아간 것도 아닌데.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늘 최악이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면 그렇지 않았다. 별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 같은데 결과는 늘 잘 풀렸다. 어제는 나이트에서 누굴 따먹었네, 적당히 섹파로만 지내고 싶은데 사귀자고 매달려서 피곤하네, 여자 친구가 너무 섹스를 밝혀서 힘들어 죽겠네, 하는 얘기들 뿐이었다. 나에겐 모든 게 어렵고 저들에게는 너무 쉬웠다.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노력이 부족했거나, 방법이 잘못되었거나. 첫 번째 이유는 너무 잔혹했다. 나는 충분히 노력했다. 좋은 말만 하고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했다. 내 감정을 강요하지 않았고, 너의 입장을 헤아리고 배려했다. 상처를 받아도 내가 받았고 손해를 봐도 내가 봤다. 내가 좋아서 선택한 길이니까 다 내가 감내했다. 그런데 덜 노력하는 저들에 비해 항상 결과가 안 좋았다. 그건 아마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런데 얼마나 더? 도대체 언제까지? 내가 그 정도로 부족한 인간인가? 도대체 얼마나 노력해야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건가?
두 번째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세상일은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축구공을 찰 때도, 수영을 할 때도, 노래를 부를 때도 힘을 빼야 오히려 잘 된다. 요령이 있으면 힘을 덜 써도 되고, 그러면 능률이 높아진다. 그러니 나도 요령을 배우면 된다. 주변에 연애 잘하는 친구들한테 배우던지, 픽업 아티스트 강좌를 보고 따라하던지 하면 된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그러기에 사랑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안 먹어본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먹는 거라던지, 평소와 다른 길로 출퇴근을 하는 정도의 도전이라면 나도 얼마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건 별로 중대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패해도 잃을 게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내게 너무 중요했다. 그 소중한 걸 걸고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질투심을 유발하려다, 밀당을 하려다, 선섹후사(먼저 섹스를 하고 후에 사귐)를 하려다 실패하면 어쩌지? 날 떠나버리겠다고 하면 어쩌지? 다른 여자를 만나면 된다고? 하나 만나기도 이렇게 어려운데 어떻게 둘을 만나? 차마 나는 그 모험을 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어느 길로도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제3의 방법을 택했다. 그건 사랑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원래 별것 아닌 것이다. 그냥 성욕일 뿐이다. 수컷에겐 젊고 쭉쭉빵빵한 암컷들을 한 트럭씩 거느리고 싶은 욕망이 있고, 암컷에겐 강하고 우월한 알파 메일로부터 보호받으면서 안락한 삶을 누리고 싶은 욕망이 있을 뿐이다. 로맨스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예쁘고 달달한 사랑 같은 건 그냥 그 추악한 욕구에 그럴싸한 포장을 덧씌운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렇게 해야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