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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자식 간에도 궁합이 있다면 나와 준오의 궁합은 철저히 상극이다. 맹하고 내향적이고 수동적인 엄마에게서 예리하고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자식이 나왔다. 남편의 성향도 나와 비슷하니, 우리 부부가 첫 아이 준오를 사랑하는 덴 늘 노력이 필요했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다.
둘째 태오가 태어나자 그게 더 절실히 느껴졌다. 둘째를 대하는 건 편안한데 준오는 어렵다. 힘들다. 부담스럽다. 태오를 향한 나의 애정 가득한 눈빛을 보며 준오의 가슴속 구멍은 커졌을 테다. 그 빈 구멍을 할아버지 할머니가 채워주었지만, 낳아준 부모가 아니니 그 사랑이 완전하진 않았을 거다.
준오야 미안하지만 이게 진실이다.
세상에 자식을 온전히 사랑하며 자기를 한없이 내어주는 부모만 있는 거 아니다.
늬 아빠엄마 같은 부모도 있다.
그게 너의, 우리의 운명이다.
자식 가슴에 구멍을 낸 채로 끝났으면 우린 못난 부모였을 거다. 하지만 새벽과 나는 준오를 덩더쿵에 보냈다. 우리 자신을 덩더쿵에 보냈다. 덩더쿵에 다닌다는 건 부모가 자기 자신을 넘어서야 한다는 뜻이다. 일일이 설명하기 구차한 수많은 크고 작은 일들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관계 속에서 배우고 성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린 때론 이를 드러내 웃고, 또 때론 이를 바득바득 갈며, 우리 자신과 아이를 덩더쿵에 보냈다.
덩더쿵에 다니며 준오를 향한 마음이 달라졌다.
다른 아빠 엄마들을 만나고 내가 옳은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부모 됨의 다양함을 경험하고서야 아이가 나에게 맞춰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게 됐다. 부모 자식이 종속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임을 다른 좋은 아빠 엄마들을 보고 알게 됐다.
각각 고유의 색을 가진,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보며 비로소 내 자식 준오가 아닌, 고유한 준오를 볼 수 있게 됐다. 준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황홀한 빛을 보게 됐다. 남의 아이를 사랑하게 되면서 내 아이를 사랑하게 됐다니, 아이러니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너무 깊숙이 안에 있을 땐 보지 못했던 걸 한발 나와 다른 것들과 아울러 보면 발견하기도 하는 거다.
어떻게 이런 아이가 우리에게 왔을까?
여전히 사랑이란 게 뭔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널 한없이 이해하고 싶고 널 위해 집착적으로 염원한다는 것으로 감히 널 많이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작고 작은 널 탓하고 어려워하고 난감해했던 것에 대해 사죄한다. 아빠 엄마는 덩더쿵에 다니며 비로고 널 제대로 보게 되었다. 이제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떻게 이렇게 대단한 네가 우리에게 와줬을까?
by 카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