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뽕에서 홍합 껍데기를 골라내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남자들의 대화가 들렸다. 각자 부인과 여자 친구에 대한 험담이었는데 한 문장에 욕이 최소 세 개씩 들어갔다.
“씨발, 내가 술 처먹고 존나 자는데 존나 옆에 붙어서 개 빡치잖아, 씨발.”
존나 자는 건 엄청나게 잔다는 걸까? 안 듣기엔 테이블이 너무 붙어 있었고, 무시하기엔 목소리가 너무 컸다. 계속되는 쌍자음을 듣다 보니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 기억났다. 주어, 서술어, 목적어, 감탄사까지 욕으로 말하던 시절. 부단한 노력으로 욕쟁이가 되고자 했던 시절.
초등학교 2학년이 끝나갈 무렵 경기도로 이사 왔다. 그전까지 경상남도 마산에 살았는데 막 신도시가 되어가던 곳이라 사람도 적고 소담한 분위기였다. 핸드폰이나 개인 컴퓨터가 없던 시절의 우리는 순박하고 순수했다. 욕이라고 한다면 ‘바보, 멍청이, 똥개, 말미잘’ 정도였다. 누군가 저 중 하나로 놀리면 바로 선생님한테 달려가 ‘쟤가 욕했어요.’라고 이르는 수준.
전학 와서 수업시간에 쪽지 하나를 받았다. 누군가에게 전달하라는 쪽지였는데, 종이에는 凸가 그려져 있었다. 그게 뻐큐를 의미하는 욕인지 모르고 옆자리 짝에게 ‘근데 왜 모자를 그려서 전달하는 거야?’라고 물었다. 바보라고만 해도 우는 애들이 있는 곳에서 자랐는데, 뻐큐는 무슨. 순수한 질문은 놀림의 대상이 되기 쉬웠고, 나는 ‘뻐큐도 모르는 애’로 찍혔다. 반에서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던 아이조차 나를 무시했다. 욕을 몰라서 촌스러운 애가 되어 버렸다. 사투리를 썼던가는 기억도 안 나지만, 표준어 보다 욕 배우기에 급급했다.
재능은 모르겠고 성실함만은 자신 있었는데, 욕을 습득하는 속도는 성실함에 비례했다. 입이 걸어질수록 친구가 많아지던 이상한 시절이었다. 경험이 쌓이고 익숙해질수록 욕은 입에 착착 감겼다. 그러니까 같은 ‘씨발’ 이어도 누군가 하면 탄산 빠진 콜라처럼 밍밍하다면, 내가 하는 ‘씨발’은 냉동실에 넣어 뚜껑을 돌리는 순간 탄산기포가 촤아악 올라오는 청량한 맛이었다. 나의 마산 친구들이 들으면 거품을 물고 쓰러질지도 모를 정도로 욕쟁이 중에 욕쟁이가 되어갔다.
잘 자란 욕쟁이는 어쩌다 보니 미션스쿨에 진학했다. 딱히 종교적 이유는 아니었고, 대학을 잘 보낸다는 명성에 부모님이 떠밀어 억지로 가게 된 학교였다. 어색한 학기 초의 분위기를 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온 욕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는데, 같은 반 친구 P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욕을 줄이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내가 쓰는 욕들이 어떤 기원을 가졌는지, 그래서 왜 하지 않아야 하는지 매우 다정하게 설명해 줬다. 욕을 하지 말라는 친구는 처음이었다. 그동안 욕을 못해서 놀림을 받았던 적은 있었지만 잘해서 문제가 됐던 적은 없었다. P가 별로였다면 ‘씨발, 네가 뭔데.’ 했겠지만, P는 다정하면서 웃기고 웃기면서 착한 친구였기 때문에 나는 그의 말을 듣기로 했다. 내가 계속 욕을 한다면 그가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대부분 욕을 하지 않았고, 기독교인이 많아 은근히 종교적 분위기가 있었다. 욕은 또 하지 않으면 줄어드는 것이어서 나는 곧 욕쟁이 타이틀을 내려놓게 되었다.
다시 욕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 건, 수능을 망치고 재수를 하면서였다. 수능이 엿 같고,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엿 같고, 수학이 엿 같고, 비싼 재수학원이 엿 같고, 세상이 엿 같았다. 공부가 잘 되지 않거나 모의고사를 망치고 등수가 학원 벽에 붙으면 어김없이 욕이 나왔다. 그리고 P처럼 욕을 말리는 친구가 없었다. 심지어 학원 선생님들도 욕을 하며 수업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다시 욕을 하지 않았다가 또 욕을 했다가 반복하는 시간이었다.
나이를 더 먹고는 의식적으로 욕을 안 하려 노력했다. 이제는 ‘씨발’을 해도 착 감기기보다는 내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어색하게 들렸다. 나는 이제 욕이 어색하구나, 하던 차에 회사에서 온갖 일들을 겪다 보니 다시 순도 백 퍼센트의 ‘씨발’을 뱉을 수 있게 되었다. 도저히 욕을 하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는 일들과 사람들이 많았다. 전쟁 같은 매일을 겪고 나면 하루가 씨발 그 자체여서 욕을 하지 않아도 욕을 하는 기분이었다.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들과 끊임없이 싸우는 매일이었다. 그러니까 욕은, 그런 상황이 되면 노력하지 않아도 어쩔 수없이 나오게 되는 거였다. 욕이 아니고서는 표현되지 않는 마음과 기분이 있었다. 어제보다 더 씨발 같은 오늘, 오늘 보다 더더 씨발 같은 내일로 달력을 채우다 보면 따뜻한 말을 할 수 있는 날은 점점 줄어갔다.
열다섯의 씨발과 서른의 씨발은 농도가 달랐다. 전자는 아무 의미도 없이 그냥 붙이는 감탄사 같은 거였다면, 후자는 온갖 것이 압축된 응어리였다. 하루 끝에서 뱉는 씨발은 열다섯의 씨발처럼 청량하거나 가볍지 않았다. 무겁고 진득해서 내 마음에도 달라붙고, 같이 일하는 사람이나 엄마나 친구에게도 가 달라붙었다. 씨발의 어원만큼 끔찍한 계절이었다.
회사를 나오고 나서 더 이상 욕을 하지 않는다. 간혹 기분 나쁜 일을 마주하면 ‘젠장’을 뱉긴 하지만, 이건 욕이라기엔 귀엽다. 아직 살아갈 날들이 많다면 남은 날들을 농도 짙은 씨발로 채우고 싶지 않다. 누구와 싸우지 않고, 누구를 욕하지 않고, 누구에게 욕을 전하지 않으며 살아가고 싶다.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씨발’을 주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3. 6. 27.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