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십 대는 사람에 대한 믿음과 불신을 동시에 쌓아가는 시간이었다. 친구라고 여겼던 이들은 뒤에서 나를 욕하거나 나와 남자친구 사이를 이간질하거나 나에 대해 없는 소문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최소의 인원에게만 곁을 내었는데, 그들도 몇 년을 알고 지냈지만 속은 모를 때가 많았다. 계속된 거짓말이나 이유도 모르는 연락두절에 상실감과 허망함은 켜켜이 쌓였다. 그런 일이 계속 일어나는 건 결국 나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타인은 물론이고 나조차 나를 믿지 못할 때도 나를 믿어주는 이가 있었다. 나의 이십 대는 그가 있었기 때문에 어쨌거나 빛날 수 있었다. ‘소울 메이트’에서 한 글자를 따와 우리는 서로를 ‘메’라고 불렀다. 편지는 늘 ‘나의 메에게’로 시작한다. 왜, 어쩌다가 소울 메이트 같은 것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누가 먼저 그런 별칭을 생각했는지도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고 있었다. ‘친구’라는 단어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는 나와 많은 부분이 비슷하고 많은 부분이 다르다. 연애에 관한 가치관은 비슷하지만 남자 취향은 정반대다. 그는 이동하는 시간단위까지 계획하는 사람이고, 나는 무계획이 계획이라 믿는 사람인데 둘 다 여행은 좋아한다. 음식 취향도 극과 극인 부분이 많지만 그럼에도 대학시절 내내 붙어 다니며 같이 먹고 마시고 여행을 했다.
수원에 ‘방화수류정’이라는 연못이 있다. 수원 화성의 동북쪽 군사지휘부인 동북각루로 만들어진 곳이라고 한다. 경관이 좋은 자리에 위치해서 경치를 조망하는 정자의 역할도 겸했다고 하더니 과연 그랬다. 군사시설로만 활용하기엔 경치가 너무 좋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학에 있던 호수를 떠올렸다. 우리는 그 호수 앞에서 시간을 보내며 많은 것을 공유했다. 컵 밥을 사들고 맥주에 빨대를 꽂아 마시며 불안한 연애에 대해, 버거운 수업에 대해, 이해하기 힘든 친구들에 대해 몇 시간이고 떠들 수 있었다. 내 마음을 모조리 읽는 듯한 그와 이야기하는 일은 그 자체로 즐거웠다.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해서 헤매면 적확한 단어를 찾아주는 이였다. 구태여 구구절절한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 앞에서만은 마음이 말랑해졌다. 어떤 이야기든 꺼내 놓을 수 있었고, 쉽게 울 수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힘듦을 먼저 알아채고 세련된 위로를 건넬 줄 아는 친구였다.
추억 속의 호수와 닮은 연못 앞에서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났고, 그간 쌓인 이야기들이 많았다. 계속해서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고 한없이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어떤 말을 하거나 하지 않아도 다 아는 그 앞에서 넌지시 나의 우울과 불안에 대해 이야기했다. 글을 쓰고 싶은데, 글을 쓰는 게 두렵다고 고백했다. 10년을 알고 지내는 동안 내 글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때때로 너무 가깝기 때문에 보여주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글에는 대개 나의 못난 부분이나 결핍이 묻어났기 때문에 의식적이진 않았으나 그에게 내 글을 숨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내가 쓰는 글에 대해 이야기했다. 친구는 잠자코 듣더니 명쾌하게 한 마디를 했다. “너는 일단 뭐라도 써.”
그는 나에게 재능이 있다고 했다.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냐고 물으니 너는 네가 재능이 없다고 어떻게 확신하냐며 되받아쳤다.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도 재능의 일부가 된다고 했다. 그리고 너를 보면 나를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안 될 것 같으면 미리부터 포기하고 시작하지 않는 게 너무 나 같아서 안타까워.”
“그래서 우리가 친구인 거야.”
“아냐, 너는 나랑 달라. 넌 조금만 더 하면 뭐든 될 것 같은데 안 하니까 안타까운 거야.”
생각해 보면 그는 언제나 나를 북돋우는 사람이었다. 내가 하는 일에 무조건적인 응원을 보내는 사람이었다. 온갖 뒷담과 이간질과 배신이 몸을 휘감던 시절에도 묵묵히 곁에서 어깨를 두드리는 사람이었다. 주변의 사람이 계속 줄어드는 삶 속에서, 누군가에게 조건 없이 마음을 쏟는 것은 얼마나 다정한 일인가. 십 년 내내 그런 다정함을 받아왔다. 그가 차곡차곡 그러모아 다진 다정한 모래가 나를 이만큼 자라게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만큼 다정한 친구가 아님을 안다. 무뚝뚝하고 직설적인 말로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준 적도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기적이게 나는 그의 계속된 친구이고 싶다. 그래서 앞으로도 조건 없는 다정함을 온몸과 마음으로 받고 싶다. 그리고 결국에는 나도 그런 다정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너로 인해 나도 이렇게나 다정해졌다고 당당히 말하며 받은 마음을 되돌려주고 싶다. 그때까지 그가 지치지 않고 내 곁에 친구로 있어주길 바라본다.
2023. 7. 14. 금